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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백두대간 에코 트레일ㅣ35~36구간 소백산 르포] 철쭉 피기 직전의 봄, 그 고요한 낭만

신준범 차장대우
  • 입력 2019.06.12 11:05
  • 수정 2022.09.18 11:46
  • 사진(제공) : 주민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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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연화봉대피소~연화봉~비로봉~국망봉~마당치~고치령 27㎞

소백산의 노을은 산세만큼이나
웅장하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파노라마로 트여 있어 붉은 울음을 토해낼 수 있는 여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소백산의 노을은 산세만큼이나 웅장하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파노라마로 트여 있어 붉은 울음을 토해낼 수 있는 여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천천히 노을이 가슴속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연화봉대피소의 저녁은 아름다웠다. 달콤한 밀어처럼 석양이 붉게 물들며 희미하게 속삭이고, 바람은 1,357m 고도를 일깨워 주려는 듯 멱살잡이 하는 난봉꾼처럼 드세게 몰아쳤다. 

우리 종주팀을 제외하면 대피소 예약을 한 산객은 4명뿐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는 아이의 옷을 바싹 여며줄 뿐 말이 없었다. 아이는 보채거나 장난치지도 않고 처음 보는 풍경인 듯 가만히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장 늦게 온 젊은 연인은 바쁘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뭔가 더 해주려 애쓰는 남자의 모습에서 풋풋한 과일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해넘이가 끝나자, 따뜻하고 포근한 불빛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떠올랐다. 풍기 읍내가 수면에 가라앉았던 아틀란티스처럼 환상적인 불빛을 드러내며 부상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불빛들은 잊혀진 먼 꿈들의 환영인 듯 다가와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멀리서 볼 때 아름답다는 생각이 스쳤다. 세상의 많은 욕심과 욕망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별빛처럼 포근한 불빛들이 밤새 흘러나왔다. 

소백산 주릉에 오르면 눈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진 푸근한 능선을 걷는 블랙야크 셰르파들.
소백산 주릉에 오르면 눈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진 푸근한 능선을 걷는 블랙야크 셰르파들.

새벽 4시에 눈을 떠 아침을 먹었다. 입맛이 있을 리 없었지만 오늘 하루에만 23㎞를 걸어야 함을 알기에, 다들 꾸역꾸역 밥을 비웠다. 전국 각지에서 온 블랙야크 셰르파들이 소백산 종주에 동참했다. 창원에서 온 소광일, 강릉에서 온 김재효, 김천에서 온 김찬일, 대구에서 온 성예진 셰르파가 중등산화 끈을 질끈 묶고 대피소를 나선다. 

해돋이는 언제나 이렇게 신성한 것인지, 용의 여의주처럼 어둔 세상을 깨치며 떠오르는 태양에 힘을 얻는다. 잠이 덜 깬 탓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해돋이 한 번에 희희낙락 들썩거린다. 제2연화봉에서 천체관측소가 있는 연화봉까지는 임도를 따르는 길, 연화봉의 검은 실루엣 위로 두근두근 떠오르는 태양과 맑은 새소리, 솜털이 보송보송 난 가지 끝의 봄눈이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걸을수록 마음이 깨끗해지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만 같은 허황된 생각이 들었다. 산에게 고백성사를 받는 기분이었다.   

천체관측소를 지나 연화봉에 오르자 큼직한 표지석과 전망데크가 산행의 시작을 알렸다. 먼 산이 깨끗하게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날씨다. 아랫동네는 이미 봄꽃이 몇 번 피었다가 진 지 오래인데, 소백산의 봄은 5부 능선에 걸려 있다. 먼 지능선 언저리에서 신록이 쳐들어오고, 주능선은 아직 동장군의 영역이라 앙상하다. 한참 사진을 찍는데 “아침밥은 먹고 가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잔 정 많은 영주 토박이 대피소 직원이 마중 나왔다. 

소처럼 부드러운 소백산 등걸에 몸을 던진다. 5월 초에도 연분홍 물결은 없다. 신록도 없이 앙상한 가지만 능선을 메웠다. 철쭉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아직 앙상할 줄이야. 땅바닥을 메운 아기 같은 꽃망울이 마음을 풀어 준다. 병아리처럼 양지꽃, 노랑제비꽃이 노랗게 쫑알거리고, 현호색과 얼레지가 봄의 보랏빛 팡파르를 불고, 꿩의바람꽃과 홀아비바람꽃이 하얗게 축포를 쏘아 올린다. 산길에 수북수북 핀 들꽃들이 아쉬움을 달래 준다. 눈치 없이 산길 가운데 핀 봄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산꾼들이 슬쩍 피해 걷는다.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 일대는 초지와 주목 보호를 위해 데크를 깔아놓았다. 비로봉을 향해 걷는 김재효 셰르파(우측)와 소광일 셰르파.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 일대는 초지와 주목 보호를 위해 데크를 깔아놓았다. 비로봉을 향해 걷는 김재효 셰르파(우측)와 소광일 셰르파.

 

지구 온난화로 변해 가는 비로봉

 

조릿대가 많은 좁은 산길을 지나자, 하늘과 닿을 듯 능선이 열린다. 비로봉이 보이는 초원지대가 드러난다. 간간이 보이는 분홍은 철쭉이 아닌 진달래다. 소백산의 명물인 연분홍 철쭉 능 선은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다. 분홍색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다. 비슷하게 생긴 진달래는 먹을 수 있지만, 철쭉은 독성이 있어 먹을 수는 없다. 사랑의 즐거움, 그 이면에는 독성이 있다.

비로봉 초지가 다가온다. 비로봉 일대는 혹독한 기후와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키 큰 나무들 대신 초원 형태로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기후 변화로 인해 빠르게 관목지대로 변하고 있다. 50년 뒤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비로봉의 명물인 주목 군락지도 예전 같지 않다. 드문드문 시든 잎이 보인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간다’는 주목도 기후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매년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체력이 떨어지고 면역력이 약해진 것이다. 

단순히 갈수록 강력해지는 폭염을 견디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주는, 지구가 주는 경고임을 인식해야 한다. 자연의 감동을 아는 등산인들이 먼저 환경을 지키고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해 쓰레기 발생 자체를 줄여 가는 생활 속의 노력이 필요하다. 

제1연화봉 부근의 전망터에서 영주 삼가리 금선계곡 경치를 즐기는 블랙야크 셰르파들. 멀리 금계저수지가 드러난다.
제1연화봉 부근의 전망터에서 영주 삼가리 금선계곡 경치를 즐기는 블랙야크 셰르파들. 멀리 금계저수지가 드러난다.

소백산 능선은 둥글둥글하여 성격도 순하디 순할 것만 같다. 부드러움의 절정인 비로봉에 오르자, 백두대간이 끝없는 줄기를 풀어헤친 것이 드러난다. 늙은 산꾼의 끝없는 산행 이야기마냥 지평선 닿는 곳까지 산을 풀어놓았다. 봄이 영주 쪽에서 지능선을 타고 헉헉거리며 산을 올라오는 소리가, 저 아래에서 신록을 흔들며 솟구쳐 오르는 바람에서 묻어난다. 

안기고 싶은 푸근한 능선의 앙상한 봄 속으로 들어가자,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에도 언급된 소백산성이다. 당시에도 석성 흔적이 있다 했는데, 지금까지 박제된 폐허인양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다. 퇴계는 국망봉으로 이어진 이 능선을 ‘철쭉이 활짝 피어 마치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비록 비단 장막은 아니지만, 제비꽃과 양지꽃이 깔아놓은 노란 카펫도 나쁘지 않다. 작디작은 노란꽃을 보며 걷노라면 마음도 낮고 소박해지는 것 같다.    

굳이 올라갈 필요는 없지만 국망봉의 바위 위에 올라서면, 온 세상의 바람이 소백산을 지나고 있음을 실감한다. 바람에 시선을 싣고, 마음을 실어 보내면, 지상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해 일부러 실눈을 뜨고 만세를 해본다. 정상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잠깐 동안의 망명, 행복감이 든다. 

드론으로 항공촬영한 제2연화봉에서 연화봉으로 이어진 주능선길. 5월 초에도 여전히 앙상한, 고산의 느린 시간이 드러난다.
드론으로 항공촬영한 제2연화봉에서 연화봉으로 이어진 주능선길. 5월 초에도 여전히 앙상한, 고산의 느린 시간이 드러난다.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늦은맥이재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배를 채우자 나른해져 한 숨 자고 싶은 생각이 온 몸으로 스멀스멀 번져오는 걸, 싹둑 잘라내고 산행을 시작한다. 아직 9㎞가 남았다. 지금 눈앞의 산을 넘는 데만 집중한다. 

이후로는 국립공원이 아닌 것처럼 평범한 산길이다. 화려한 경치는 없지만 고도를 내리는 탓에 계절이 바뀐 듯 초록으로 싱그럽다. 진달래가 주체할 수 없는 연분홍 속내를 드러내고 있어 훨씬 색감이 다채롭다. 1032m봉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틀자 고도가 곤두박질치며, 비로소 대간의 등걸에서 풀려날 채비를 한다. 

종착지인 고치령에 닿자 산행 시작 1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수고했다며 흰 꽃을 안겨 주는 여인은, 우아한 자태로 뻗은 아름드리 돌배나무 한 그루. 흰 배꽃 흩날리는 고치령의 아늑한 분위기에, 독하게 달궈진 근육과 눈빛이 순하게 무너져 내렸다.   

마당치를 지나 고치령으로 이어진 대간길에 만난 진달래. 고치령에서 해발 762m로고도가 떨어진다.
마당치를 지나 고치령으로 이어진 대간길에 만난 진달래. 고치령에서 해발 762m로고도가 떨어진다.
국망봉 정상에 선 블랙야크 셰르파들.
국망봉 정상에 선 블랙야크 셰르파들.

 

소백산 구간 종주 가이드

 

죽령에서 고치령으로 이어진 소백산국립공원 구간은 총 27㎞. 당일에 주파하기 어려운 거리이지만 야영이 금지된 국립공원 특성상 새벽 일찍 출발해 완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제2연화봉에 대피소가 있어 여기서 숙박하면 4㎞를 줄일 수 있다. 대피소에서 늦어도 아침 6시에는 출발해야 어두워지기 전에 고치령에 닿을 수 있다. 주능선은 오르내림이 완만한 편이지만 장거리인데다 땡볕이 많아 체력 안배를 적절히 해야 한다. 

중간 탈출로는 비로봉에서 단양 천동이나 영주 비로사, 단양 어의곡으로 하산할 수 있다. 1060.6m봉 직전에서 연화동으로 하산하는 코스도 있다. 

두 개 구간으로 나눌 경우 국망봉을 기점으로 나누는 것이 효율적이다. 고치령에서 비교적 가까운 배점리의 죽계구곡을 들머리로 하는 것이 차량 회수 시 택시비가 더 적게 든다. 

 

교통

 

죽령은 단양에서 1일 8회(06:50~17:55) 버스가 운행하며, 영주버스터미널과 풍기를 거쳐 죽령에 이르는 버스는 하루 2회(08:00, 15:00) 운행한다. 희방사역에서 산길을 따라 2㎞ 걸어오르면 죽령휴게소다. 고치령은 운행하는 버스가 없으며 일반차량도 간간이 다닌다. 일부는 비포장길이다. 가장 가까운 좌석마을 버스정류장까지 5㎞ 거리이며 영주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하루 3회(07:00~17:30) 운행한다. 죽령에 세워둔 차량을 고치령까지 탁송할 경우 8만 원 정도 받는다. 

문의 풍기대리운전(054-631-8255).

 

숙식(지역번호 043)

 

대피소는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하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경쟁이 치열해 예약이 시작되는 매월 1일과 15일 오전 10시에 바로 신청해야 한다. 사전에 미리 회원 가입을 해야 하고 동행자의 개인정보도 입력해야 하므로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연화봉대피소에서는 생수와 햇반 등 간단한 식품을 판매하며, 전자레인지가 있다. 매트리스와 담요(2,000원)를 대여한다. 영주시내와 풍기읍내에 식당과 숙소가 많다. 죽령 고개에는 죽령주막(421-2830)에서 동동주와 곤드레밥(8,000원) 등으로 요기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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