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에코 트레일ㅣ소백산 구간 역사문화] 퇴계의 소백산 국망봉 등정기

입력 2019.06.14 18:16

지금은 당일에 오르내리는 코스, 4박5일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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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주능선에서 본 풍기읍 삼가리 일대.
퇴계는 가마를 타고 소백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서구적 등반관념으로 본다면 비난 받을 행동이다. 하지만 퇴계 이황은 소백산을 관할하는 풍기군수였음에도 수십 명의 관비나 백성을 동원해 화려한 산행원정대를 꾸리지 않았다. 
퇴계는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즉 소백산 산행기를 담은 책을 남겼다. 퇴계 스스로 ‘어릴 적부터 영주와 풍기를 자주 왕래하였으며,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보이고, 발만 옮기면 올라갈 수 있는 곳이지만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하고 가보지 못한 지 40년이 되었다’고 했을 만큼 애정 깊은 산이었다.
1548년 풍기군수(당시 48세)로 부임한 그는 해가 바뀌어 소백산 주능선의 눈이 녹은 음력 4월 22일(양력 5월 17일) 소백산을 찾았다. 정상을 오를 목적으로 집을 나선 첫날 소수서원에  당도해 유생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4월 23일 소백산을 향하는 그의 곁엔 거창한 원님의 행렬이 아닌 진사 민서경과 그의 아들 민응기가 동행했다. 말을 타고 배점리를 거쳐 죽계계곡을 거슬러 올랐다. 아름다운 계곡의 명소를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붙여 지금의 9곡이 생겨났다. 
당시 양반들이 산을 찾는 것은 지금의 등산과는 차이가 있었다. 계곡의 마당바위에서 판을 벌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등 좋게 보면 사대부 특유의 풍류 문화이고, 비판적으로 보면 땀 흘릴 일 없는 양반들의 놀자판이었다. 그런 시대에, 정상을 목표로 하여, 그것도 관할 군수가 대규모 인력 동원 없이 조촐하게 찾은 것은, 퇴계의 담백한 성품이 드러나는 면모다.
퇴계는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승려 종수宗粹였다. 퇴계가 왔다는 소식에 묘봉암의 승려 종수가 마중을 나왔다. 퇴계가 “잔병 많은 나는 비록 쇠약한 몸이지만 이 산을 꼭 한 번 올라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종수는 좁은 산길을 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가마인 견여肩輿를 만들어 이것을 메고 갈 스님들을 데리고 왔다. 
약속이나 한 듯 진사 민서경은 학질에 걸려 산행은 무리라고 하며 돌아가고, 승려 종수가 퇴계를 모시게 되었다. 말을 타고 초암사까지 온 퇴계는 이후부터 걷거나 가마를 탔다. 석륜사(봉바위 인근으로 추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산을 올랐다. 여기서부터는 가마를 탈 여건이 못 되었던 것이, ‘산길을 곧바로 올라가자니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며 ‘힘을 다하여 당기고 밀면서 올라갔다’고 한다. 
퇴계는 주능선에 이르러 다시 가마를 탔고, 국망봉 꼭대기에 올랐다. 안타깝게도 구름이 끼어 시야는 깨끗하지 않았다. 퇴계는 이 순간을 “등산의 묘미는 꼭 눈으로 경치를 보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 말하며 능선의 식물을 살폈다. 
세찬 바람으로 기울어지고 외소한 나무들, 봄인데도 이제야 신록이 돋기 시작한 혹독한 능선의 바람을 느끼며, ‘나무들이 전쟁을 대비하는 태세 같다’며 ‘깊은 숲에서 쑥쑥 자라는 나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이런 깨달음으로 ‘나무나 사람이나 환경에 따라 체질이나 성품이 바뀌는 것은 똑같다’고 했다. 이후 능선을 내려와 석륜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죽암폭포를 지나 관음굴에서 1박하고, 비로사를 거쳐 욱금리 쪽으로 하산했다. 지금은 하루에 오를 수 있는 코스를 당시 4박5일의 대장정으로 마친 셈이다.  
참고 문헌_‘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퇴계 <유소백산록>’ 박정원, <현오와 함께 걷는 백두대간> 권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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