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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초점ㅣ산악인 추모비 논란] 북한산 무당골 추모비, 누구를 위한 것인가?

월간산
  • 입력 2019.05.3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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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없는 봉안자 선정으로 혼란 가중… 자연사·자살한 사람까지 이름 올려
기준 있어도 유명무실… 산악인 국립묘지화되어 산악회 명예경쟁 장소로 변질

고 김창호 대장과 임일진 감독의
비석 앞에 추모객이 꽃과 술을
가져다 놓았다.
고 김창호 대장과 임일진 감독의 비석 앞에 추모객이 꽃과 술을 가져다 놓았다.

북한산 합동추모공원이 ‘북한산국립공원 내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추모비석을 한 곳에 모은다’는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 ‘집에서 노환으로 자연사한 이들도 이름 올리는 산악인들의 국립묘지’로 변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봉안자 선정에 주도권을 쥔 일부 산악단체에서 ‘우리 선후배 이름 올리기’에 열 올린 탓에, ‘원칙 없는 산악인 명예의 전당’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산에 자리한 산악인 합동추모비의 역사는 2008년부터다.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비석이 너무 많아 공동묘지 같은 인상을 준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산재한 추모비석과 동판을 철거해 산악인 합동추모비에 모은 것이다. 이때 추모비 운영을 위해 ‘산악인 추모비 운영위원회(이하 위원회)’를 구성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위원회는 대한산악연맹, 한국산악회, 서울시산악연맹, 한국대학산악연맹, 국립공원공단 북한산사무소까지 5개 단체별 1인이 운영위원이며, 위원장은 서울시산악연맹 전무이사가 맡고 있어 서울시산악연맹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명예교장은 “추모비 관리규정에서 자연사한 산악인도 봉안할 수 있게 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라 지적한다. 합동추모비의 원래 원칙에서 벗어난 규정을 만들어 산악회들의 명예 경쟁의 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규정에 따른 봉안대상은 다음과 같다.

1. 5개 단체의 단체장으로 장의된 산악인.    

2. 자연사(산악사고 외)하신 산악인은 산악계 발전을 위해 현저한 공이 인정돼 산악관련 체육 훈·포장을 받았거나 추모비위원회와 산악5개 단체의 승인을 얻은 자로 한다.    

3. 5개 단체의 소속단체회원으로 북한산국립공원 내 훈련 중 사고로 사망한 산악인.

 이 중 2항은 지난 4월 4일 위원회 회의를 통해 변경된 것으로 원래 규정은 ‘산악계 또는 산악문화 발전을 위해 현저한 공이 인정된 자 중에서 단체의 장이 추천한 자’였다. 논란이 되고 있는 자연사 산악인에 대한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산악인 합동추모비의 선후배
비석 사진을 찍는 추모객.
산악인 합동추모비의 선후배 비석 사진을 찍는 추모객.

합동추모비가 건립된 이후 올해 가장 많은 16명이 새로 이름을 올렸는데, 청죽산악회 문주식, 한국산악회 김세경, 백운산장 이영구씨는 자택이나 병원·요양원에서 노환과 지병으로 별세했다. 16명 중 원래 목적이던 ‘북한산국립공원 내에서 사망해 추모비가 있던 사람’은 없다. 언제부턴가 자택이나 병원에서 노환과 지병으로 별세한 사람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4월 27일 열린 2019년 산악인 합동추모제에서 노환과 지병으로 별세해 새롭게 봉안된 이들의 면면을 알아보았다. 이들의 이름을 올린 산악회 관계자들은 “비록 북한산에서 돌아가신 것은 아니지만, 산악계 발전에 이바지한 훌륭한 분”이라 입을 모았다. 

문주식씨는 1984년 명문인 서울 청죽산악회를 창립했으며 개척등반을 여럿 했다. 아웃도어 브랜드 ‘스노우프랜드’ 창립자인 김세경씨는 1970년대부터 열악한 환경의 산악인들에게 등산복을 후원하고, 전국 구조대원들을 후원한 덕망 있는 산악인으로 이름 높다. 이영구씨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백운산장을 평생 지켰으며, 구조활동에 도움을 주는 등 북한산을 찾은 등산인과 산악인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추모사를 하는 한국산악회 정기범 회장(우측). 옆으로 한국대학산악연맹 이동훈 회장, 서울시산악연맹 김인배 회장, 국립공원공단 권경업 이사장 등의 단체장들이 서있다.
추모사를 하는 한국산악회 정기범 회장(우측). 옆으로 한국대학산악연맹 이동훈 회장, 서울시산악연맹 김인배 회장, 국립공원공단 권경업 이사장 등의 단체장들이 서있다.

물론 고인들이 남긴 족적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 산악계 발전에 공헌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원칙 없는 봉안자 선정이 합동추모비를 국립묘지마냥 누구나 이름 올리고 싶어 하는 산악회 명예경쟁 장소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추모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울시산악연맹 서우석 사무국장은 “위원회의 각 단체에서 새로운 봉안자 명단을 올릴 때 논란이 없게끔 최대한 엄격히 심사를 하고 있다”며 “자연사한 분들이 무분별하게 이름 올리는 걸 막기 위해 위원회 5개 단체장이 모두 동의해야 하게끔 규정을 바꾸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산악회를 대표해 추모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변건호 한국산악회 사무국장도 “산악 관련 체육훈장을 받을 정도로 산악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5개 단체장의 합의하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바뀌었다”며 “올해는 그동안 놓쳤던 고인들 이름을 올리느라 많은 것이고, 내년부터 자연사는 이름 올리기 어려울 것”이라 전망했다. 

4월 27일 열린 산악인 합동추모제에는 유족과 추모객 등 200여 명이 찾았다.
4월 27일 열린 산악인 합동추모제에는 유족과 추모객 등 200여 명이 찾았다.

개선된 규정 과연 효과 있을까?

지난 20여 년 동안 매주말 북한산과 도봉산을 찾고 있다는 익명을 요구한 A씨는 “누구는 이래서 들어가고, 누구는 저래서 이름이 올라가면, 결국 추모비에 더 이상 이름 새길 곳이 없을 것”이라며, “반대하면 골이 생길 것이 분명한데 단체장 중 누가 반대를 하겠냐”고 개선된 규정에 회의적인 시각을 밝혔다. 더불어 “작년에 누구는 들어갔는데 왜 우리는 안 되냐는 식의 요청이 이어지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 뻔하지 않냐”며 원칙 없는 봉안자 선정으로 인한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 전망했다.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가 제동을 걸어야 하지만, 4개 산악단체가 협의해 국립공원에 통보하는 방식으로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합동추모제에 참석한 국립공원 권경업 이사장은 “무분별한 이름 올리기보다는 원칙적으로 운영돼야 하는 것이 맞다”며 “임기 내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변화를 줄 것”이라 밝혔다.    

현재 합동추모비는 새로운 봉안자의 이름을 올릴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로 인해 산악단체의 이름 올리기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란 전망에 대해 한국산악회 변건호 사무국장은 “추모비 옆에 새로운 추모벽을 세워서 공을 세운 고인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할 것”이며 “이에 대해 위원들이 동의했으며 세부적인 협의만 남았다”고 밝혔다.     

이용대 명예교장은 추모비 봉안자 논란에 대해 “자기 산악회의 영광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원칙대로 해야 한다”며 “살아 있는 선후배들도 각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고 자연 그대로의 등반을 추구해 왔다는 산악인들이, 인공 시설물인 추모비를 산에 추가로 세워 노환으로 자연사한 산악인의 이름을 새겨 넣겠다는 발상이 과연 산악인다운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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