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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감동산행기] 4월에 핀 지리산 얼음꽃

글 사진 김종남
  • 입력 2019.06.0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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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꽃이 고사목을 뒤덮고 있다.
얼음꽃이 고사목을 뒤덮고 있다.

4월, 겨울의 끝자락에 지리산 산행을 나섰다. 실상사 즈음에서 바라보니 지리산 상단부가 하얗다. 전날까지 연 이틀 눈비가 내려 상고대가 핀 것 같았다. 녹기 전에 올라야 한다는 욕심이 솟아 걸음을 서둘렀다.

계곡의 수량이 많아 물소리가 시원하니 좋다. 바위틈에는 봄을 알리는 말발도리가 꽃망울을 맺고 있다. 평일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못해 적막강산이다. 하동바위를 지나니 축 늘어진 하얀 노루귀가 간간이 보인다. 참샘에서 청정1급수인 지리산 샘물로 목을 축인 후 물병에 물을 한가득 담아 올라간다.

참샘에서 소지봉까지 땀을 한바가지 흘리며 깔딱 고개를 오르고 나니, 소지봉부터는 오르막이 심하지 않아 걷기 좋다. 산죽이 늘어선 등산로 주변 여기저기서 얼레지가 꽃봉오리를 오므리고 햇볕이 나면 치마를 들어 올릴 준비태세를 한 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망바위에 다다르자 몇 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고고한 자태의 소나무가 부러져 군데군데 가지들이 내팽겨쳐져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고대가 아니라 얼음꽃(빙화氷花)이 핀 탓에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었다. 

4월에 얼음꽃이라니! 등산을 시작한 지 20년이 다 돼 가지만 4월에 핀 얼음꽃은 처음이었다. 황홀하고 경이로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느릿느릿 여유를 부리면서 올라간다. 나무에 엉겨 붙은 얼음이 녹으면서 ‘쩍’하고 갈라졌다가 ‘쾅’하고 큰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올라갈수록 얼음꽃은 장관을 이룬다. 

지리산 주능선에 하얗게 핀 얼음꽃을 배경으로 섰다.
지리산 주능선에 하얗게 핀 얼음꽃을 배경으로 섰다.

얼어붙은 고사목 보니 가슴 아파

장터목대피소 주변은 온통 하얀 얼음 세상이다. 주변을 둘러보고 제석봉으로 오른다.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귀한 4월의 얼음꽃 풍경이라 보고 또 보느라 정신이 없다. 누군가와 함께였더라면 더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제석봉의 고사목은 통째로 얼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 연출된다. 잔뜩 흐린 날씨로 하늘이 열리지 않아 얼음꽃이 반짝반짝 눈부시지는 않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이다. 제석봉 일대의 구상나무는 얼음덩이에 묻혀 안쓰럽기 그지없지만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양이라 여겼다. 등산로 바닥에는 큰 얼음덩이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어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천왕봉을 오를 때면 늘 반겨주는 큰 바위 앞 사스레나무도 허리가 꺾인 채 생을 마감하고 있다.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천문 철계단 아래는 온통 빙판이라 밧줄을 단단히 잡고 조심조심 오른다. 여기서부터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죽은 구상나무들이 많은 곳이다. 오래된 고사목들도 이번 얼음꽃으로 통째 넘어지고, 한쪽 가지가 부러진 나무도 있다. 지난번 산행 때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하나, 둘 없어져 가슴 한쪽에 응어리로 남는다.

마지막 나무계단에는 족히 20cm는 될 것 같은 얼음이 녹지도 않고 그대로 있다. 낯선 풍경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바위에도 하얀 긴 수염을 늘어뜨린 얼음이 멋진 그림을 그리며 수를 놓았다. 칠선계곡으로 내려가는 초입에 설치된 무인단속카메라도 예외는 아닌 듯 꽁꽁 언 채로 지켜보고 있다.

천왕봉이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다. 경상남도인재개발원에서 운영하는 ‘천왕봉 힐링 과정’ 교육생이란다. 지친 심신을 한국의 대표적 명산인 지리산에서 재충전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유익한 교육 프로그램인 것 같다. 

황홀할 정도의 얼음꽃이 피었지만 티셔츠 하나만 입고도 춥지 않을 정도로 날씨는 아주 따뜻했다. 정상에 서 있으니 하늘이 가끔씩 열리면서 주변 풍경을 보여 줬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이번 산행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지리산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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