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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스틱 대통령' 윤치술의 힐링&걷기 <16>]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글 윤치술 한국트레킹학교장
  • 입력 2019.07.1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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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트레킹을 즐기는 등산 동호인.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즐기는 등산 동호인.

초록 바람에 자귀나무 꽃술 붉은 부채춤이 골목길 담을 넘어 유월의 노래를 들려주던 유치원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신작로 끄트머리 삼색원통이 팽이처럼 도는 이발소엘 갔다. 주렴 젖히고 들어서면 긴 거울 속에도 있는 덩치 큰 의자들, 포마드와 무스크musk 스킨향 뒤엉킨 낯설음이 있었다. 이발사는 의자 팔걸이에 빨래판을 걸쳐놓고 나를 들어앉히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예쁘게 되지 않거든.” 바리캉에 허전해진 거울 속의 낯선 머리가 계면쩍어도 고개 못 돌리고 눈만 삼빡 치켜뜨다가 폭포수 떨어지고 여덟 마리 돼지새끼가 어미젖을 빨고 있는 유치찬란한 유화油에서 멈춘다. 그리고 궁서체로 내려 쓴 알 수 없는 문장,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유년의 액자는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중학교 때 이사 간 동네 이발소에서 다시 마주했다. 삶이 속이는 것은 무엇일까? 사춘기 소년은 갑갑궁금했고 청년이 되어도 풀지 못한 수학문제인 채,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글인 ‘삶’을 뫼비우스의 띠를 두른 시시포스Sisyphus처럼 이어갔다. 1980년 초, 설악산 장수대에서 야영을 하고 첫새벽 한계령에서 가리봉, 주걱봉으로 가던 중 발을 헛디뎌 너덜 비탈로 굴렀다. 코펠, 수통의 파열음과 나뭇가지 ‘우두둑’ 소리의 공포에 더부러지는 나, 동료들의 울음과 절박함의 수라장에 ‘혹시 내가 죽었나?’ 싶은 슬픔을 부정하고자 조심스레 몸을 세우는 순간, 이발소 그 글이 설악의 여명에 별똥 되어 필례약수 쪽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넘어질 거라고 생각지 않고, 꽃과 반려동물을 거두면서 언젠가 내 곁을 떠나리라는 슬픔 역시 셈하지 않는다. 희로애락은 우리가 만들고 지울 수 있지만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것이거늘, 이 풍진 세상에서 가슴 내어 주고 다독거려 줄 ‘절대의 벗’은 없을까? 골똘함의 끝은 ‘자연自然’에 닿았다. 히말라야 고라파니에 흐드러진 랄리구라스의 향기와 백두대간 두문동재 미나리아재비 안다미로 핀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유월의 그날, 남설악 풀섶에 흠뻑 젖은 등산화는 울컥해진 내 가슴이었고 초록잎이 물음표처럼 매달린 고샅길과 지돌이 발끝에서 ‘더불어 자연’이라는 귀한 답을 어렴풋이 얻을 수 있었다.

신이 인간에게 두터운 털과 날카로운 발톱을 주지 않은 이유는 ‘마음’이라는 강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삶은 그대를 속이고 또 속일 것이며, 우리는 속고 또 속는다. 하지만 포옹과 용기를 주는 박제되지 않은 자연에 기대어 흔들리는 삶을 다잡는다면 빛나는 희망 하나 챙길 수 있지 않을까? 먼저 간 위대한 시인 푸슈킨의 높고 큰 울림,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분명分明. 

윤치술 약력
소속 한국트레킹학교/마더스틱아카데미교장/건누리병원고문/레키 테크니컬어드바이저
경력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외래교수/고려대학교 라이시움 초빙강사/ 사)대한산악연맹 찾아가는 트레킹스쿨 교장/사)국민생활체육회 한국트레킹학교 교장/월간 산 대한민국 등산학교 명강사 1호 선정 /EBS1 국내 최초 80분 등산 강의/KBS TV 9시 뉴스, 생로병사의 비밀, 영상앨범 산/KBS2TV 헬로우숲 고정리포터/KBS1 라디오주치의 고정출연 등
윤치술 교장은 ‘강연으로 만나는 산’이라는 주제로 산을 풀어낸다. 독특하고 유익한 명강의로 정평이 나 있으며 등산, 트레킹, 걷기의 독보적인 강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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