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ㅣ유해연 대표] 알피니스트 후원하는 맘씨 좋은 ‘스탠리 아저씨’

입력 2019.07.03 11:03

시티핸즈캄퍼니 유해연 대표의 파란만장한 풀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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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보온병을 직접 들고 야외로 나가 유저들을 만나는 그의 부지런한 마케팅으로 인해 ‘스탠리 아저씨’란 별명이 생겼다.
산악계에 통 큰 후원자가 나타났다. 본지 ‘한국의 알피니스트 아직 살아 있다’ 코너 진행 비용을 3년간 후원하기로 했으며, 각종 산악행사에서 친환경 소재로 된 식기제품을 무료로 협찬하고, 설악산 산양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비를 후원했다. 미국 보온병 스탠리STANLEY를 수입하고 있는 시티핸즈캄퍼니 유해연 대표다. 
이밖에도 산악계의 소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산악조난구조대 자문위원을 맡아 대원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고어텍스 전문가이자 장비전문가로 행사 때 무료 수선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월간<마운틴>이 몇 년 전 폐간될 때도 후원자들을 모아 살리고자 앞장 선 바 있다. ‘한국의 알피니스트’ 코너 후원은 시티핸즈캄퍼니 회사 규모를 생각하면 대단한 결단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빅 브랜드들도 한 적 없는 통 큰 후원이다.  
“김창호 대장이 사고가 났을 때 인터넷에 실린 기사 댓글을 보고 충격 받았어요. 국민들 반응이 너무 황당했어요. 대표적인 내용이 ‘자기들 좋아서 가서 죽은 걸 왜 내 세금으로 수습해야 하냐’는 식이었는데, 산악인들 중에서도 특히 알피니스트를 바라보는 일반 국민들의 시선에 왜곡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들의 눈에는 그냥 ‘무모한 짓하는 사람’인 거예요. 한국의 알피니스트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후원을 결정했어요.”
유 대표는 알피니스트들의 등반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도전을 통해서 인류가 지금껏 발전해 왔으며, 등반이라는 도전적인 파문을 통해 대중의 개척정신을 일깨워 왔다고 말한다. 
‘설악, 산양의 땅’은 이강길 감독이 4년간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과 관련해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고 한다. 후원을 한 이유는 그가 베트남에서 살 때 판시판산(3,143m)에 케이블카 설치되는 걸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설치 후 생태계가 병들고, 새가 울지 않는 산으로 변하는 걸 보았기에 설악산을 지키고 싶어서다. 
“제가 회사 주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직원들이죠. 회사 생활을 통해 행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처우복리, 자기개발, 행복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이고, 두 번째는 이 작은 회사를 통해서라도 올바른 아웃도어 문화가 자리잡고, 환경이 보전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투자하게 되었어요.”
1982년 대학교 4학년 때 한국등산학교 정규반을 수료했다. 현 윤재학 코오롱등산학교 교장과 서울등산학교 서성식 교감이 동기였으며, 이들과 ‘한등회’라는 동문산악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특히 20세쯤에 올랐던 설악산에 대한 기억은 그의 인생을 관통해 산이라는 기본바탕을 깔아 주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 보았던 설악산의 겨울 풍경들이 잊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날 그의 꿈은 알피니스트였다. 1982년 장봉완, 허정식, 홍옥선, 윤대표, 곽호균 등이 창립한 '프로알파인 가이드협회'에서 1기로 교육을 받았다. 이 협회는 해외 안내등반과 산악인을 양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해외원정의 꿈은 군 입대 문제로 틀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 성인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만 모든 해외활동이 자유로와진다. 그도 다양한 방법을 고민했지만 결국 늦은 나이에 학사장교로 군 입대를 마쳐야만 했다. 
1988년 당시 30세의 나이로 제대한 그는 이후 10여 년간 파란만장한 사회생활을 했다. 산은 가슴에 묻어두고 생업전선에 뛰어든 그는 당시 유명 기업이던 바른손팬시 무역 담당으로 입사했다. 1년이 못 되어 사수의 권유로 퇴사해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독립해서 문구 팬시회사를 세운 것이다. 그것도 1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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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동 코엑스 2층에 자리한 ‘스탠리스테이션’에는 스탠리의 역사를 담은 모든 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안정보다는 이상을 좇았던 그는 시간이 갈수록 사수와 괴리감이 생겨, 독립해 서울트레이더스라는 무역회사를 세웠다. 1990년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명품시계, 명품주얼리, 운동기구 등을 수입했다. 인터넷도 택배도 없을 때라 전화로 통신판매를 했다. 신용카드 명세서에 끼워 보내는 잡화안내 책자에 제품을 실었다.
그의 전략은 통했다.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전국 4대 수입업체에 들어갈 정도로 큰 손이 되었다. 아침에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상담하고, 오후 비행기로 홍콩 가서 상담하며 저녁 먹고, 다시 한국 와서 강남의 술자리에서 비즈니스를 했을 정도로 바빴다고 한다. 유 대표는 “당시 교만 떨고 물불 안 가리고 까불었던 시절”이라 한마디로 평했다. 
잘 나가던 그에게 더 큰 기회가 왔고 그는 전부를 걸었다. 당시 스위스 휠라 시계를 론칭하며 그동안 번 돈을 모두 쏟아 부었으나 걸프전이 발발하는 동시에 한반도 위기감이 고조되어 내수가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결국 사업이 쫄딱 망하게 되었다. 
재기를 노린 그는 피트니스 운동기구 통신판매에 나섰다. 당시 비디오 대여가 일상적이었는데, 홍보전략으로 비디오 영화 상영 전에 광고를 삽입했다. 러시아 금발 모델을 고용한 이 광고가 ‘과소비를 조장했다’며 9시 뉴스에 보도되었고, 전화위복으로 이것이 오히려 홍보가 되어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세관에서 국민정서를 위해하는 상품이라 하여 통관시켜 주지 않아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는 빚쟁이를 피해 집에 폐인처럼 칩거하다 도망치듯 베트남으로 갔다. 베트남 하노이공항에서 상주하던 그는 인맥을 통해 사업을 다시 성사시켰다. 베트남 공항여객운송사업 계약을 따내었고, 10년간 현대자동차 광고판을 붙이고 다니는 조건으로 현대에서 버스 100대, 택시 300대를 무상 지원 받기로 했다. 당시 베트남에 대우차가 득세하고 있어서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무료로 여객운송사업 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걸 안 베트남 측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하고 무효화했다고 한다. 그는 “사회주의의 쓴맛을 봤다”고 평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가 싶었으나 베트남전 이후 미국 기업이 최초로 오픈한 회사인 스팸의 미국 지사장 공모에 당선되어 1998년까지 지사장 생활을 했다. 새벽에 다닌 어학원과 외국 생활과 바이어 상담을 했던 덕분에 영어, 베트남어, 일본어를 구사하는 능력자가 되었다. 
1998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산과 관련된 아웃도어 수입회사 시티핸즈캄퍼니를 세웠다. 회사명에서 알 수 있듯 도시의 일상생활과 아웃도어에서 두루 쓸 수 있는 장비를 수입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후 일확천금을 노렸던 예전의 마케팅은 배제하고 직접 두 발로 현장을 뛰며 홍보했다. 
광고대행사를 안 쓰고 야외에서 직접 유저들을 만나 진솔하게 제품을 전했던 것이 파급력 있게 번졌다. 점점 그는 ‘스탠리 아저씨’로 소문나게 되었고 연예인과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스탠리를 사서 모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사업이 히트를 친 것이다. 유 대표는 최대 30개의 브랜드를 수입했으며, 현재 15개의 브랜드를 수입하고 있다. 
그는 후원에 대해 “젊은 날의 흰 산에 대한 욕구가 그렇게 불쑥 나오는 것 같다”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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