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여성 단독 일시종주기 <5>] 운계봉서 뜻하지 않은 개척산행으로 온 몸이 너덜너덜

  • 글 사진 성예진
    입력 2019.09.09 14:21 | 수정 2019.09.09 14:26

    마암터에서 대관령 지나 닭목령까지 운행…13호 태풍 링링 영향으로 4일간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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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령으로 가는 길에 만난 대간 능선의 초원이 무척 아름답다.
    9월 2일 백두대간 일시종주 9일차
    마암터~운계봉~용연사~사기막저수지~사기막임도~매봉삼거리~곤신봉~선자령~새봉~대관령~신재생에너지전시관 (31.2km)
     어제도 늦은 밤까지 걷게 되었다. 가로등까지 꺼져버린 시골의 밤은 온통 컴컴하기만 하다. 달마저 구름에 가려져 온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인 밤이다. 지쳐갈 무렵 저 멀리 아른거리는 은은한 불빛을 발견하곤 단숨에 달려갔다. 마을버스 정류장이다.
     정류장 한 편에 텐트를 치고 잠이 들었다. 커다란 노목 아래 아늑한 자리가 있어 야영하기 좋았다. 다음날 날이 밝고 자세히 보니 삼각지 모양의 자리가 꽤 넓었다. 이곳이 마을 정류장의 종점인 것 같았다. 밤중에 감각에 의지해서 자리 하난 잘 잡은듯하다. 
     대개 시골에서는 밤중에 활동하는 사람이 적다보니 텐트를 칠 때 눈치 보이지 않는다. 텐트를 걷을 때도 새벽녘, 닭이 우는 시각이기에 사람들과 마주할 일이 거의 없다.
     아마 내가 그곳에 잠시 머무른 것은 그 시각 깨어있던 야행성 동물들만 알 테다. 누구든 내가 다녀간 흔적을 알 수 없도록 처음과 같게끔 깨끗이 정리하고 있다. 사실 텐트에서 잠만 자고 다시 걷는 정도라 치울 것도 없지만 혹시 쓰레기는 흘리지 않았는지, 지저분해진 건 없는지 늘 주위를 신경 쓰고 있다.
     특히 마을 주변을 지날 때는 더욱 신경 쓰고 있다. 나 하나로 인해 여행자들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면 안 되니깐. 진고개 휴게소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쓰레기에 대한 당부 말씀을 듣고 난 뒤로 그런 부분이 더욱 신경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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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계봉 정상.
     아침에 눈을 뜨고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트럭을 타고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간다. 다른 분들이 더 나오기 전에 얼른 치우고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하며 정리를 서두른다. 내 옆을 지나쳐 간 트럭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이윽고 후진을 해서 내 텐트 옆에 섰다. 할아버지는 차창 너머로 한참을 말없이 날 내려다 봤다.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먼저 “할아버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남자인줄 알았더니 여자였네”하며 말문을 열고 본인도 젊은 시절 국토종주도 하고 여행하는 걸 좋아했다며 젊은 친구가 대단하다고 칭찬해 줬다. 그러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어디로 가는 건지, 며칠 동안 여행하는 지 이것저것 물어본다. 아침은 먹었는지 물어볼 땐 안 먹었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집으로 데려가 먹여줄 친절한 기세였다. 
     어젯밤부터 물을 구하지 못해 슬슬 걱정하던 참이었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주변에서 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여쭤 보았더니 자기 집 마당 한 편의 호스를 마음껏 이용하라 하신다. 덕분에 양치도 하고 식수도 확보했다.
     큰 소리로 감사를 전하자 잔잔히 웃던 할아버지는 내 손에 들린 쓰레기가 신경 쓰이셨는지 대신 치워주겠다며 쓰레기도 가져가주셨다. 인심 좋은 할아버지 덕분에 짐의 무게도 덜게 되었다. 길 위에서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 기분이다.
     할아버지는 일이 급하셨는지 물은 알아서 쓰고 가면 된다고, 조심히 가라고 이야기 하시곤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서둘러 짐정리를 끝내고 식수를 한가득 채워 산길을 찾아 길을 떠난다. 산행 지도를 보니 한동안 물을 구하기 힘들 것 같아 3L 가득 넉넉히 채웠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아침 산행을 시작한다. 양치를 했더니 입 안 찝찝함이 사라져 기분이 좋다. 9일간 노숙 아닌 노숙을 해온 터라 식수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내게 양치는 사치였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호사스러움을 느끼며 걷는다. 덩달아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길 시작점이 있었다. 네이버 지도의 도움을 받으며 산길을 찾아 걷다가 두 갈래의 길을 만난다. 한 쪽은 사람이 밟아 아주 선명한 길, 다른 한 쪽은 비교적 희미한 길이다.  네이버 지도는 희미한 길로 나를 안내한다. 고민된다. 지도를 크게 보면 최종 목적지는 비슷한 것 같다. 눈 앞에 보이는 선명한 길을 택할 것인가, 네이버를 믿을 것인가. 고민만 하다가는 오늘 하루가 지나도 결정을 하지 못할 것 같아 네이버 지도를 믿고 희미한 길로 가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수풀에 쌓여 있다. 왠지 오늘 하루가 험난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는다. 한참 수풀을 헤치고 헤쳐 나오니 아까 고민했던 갈림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수풀 사이를 헤치며 한참을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괜한 에너지를 낭비했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없다.
     아마 네이버 지도의 길이 옛길인 것 같고, 비교적 선명한 이 길이 새로 만들어진 길인 것 같다. 돌아 가지 않고 운계봉으로 곧장 직진하는 방향의 길이다. 운계봉 산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은 참고해두면 좋을 것 같다.
     후회하며 선명한 길을 따라 다시 걷는다. 이제부턴 감을 믿고 가보는 거다. 초입은 선명했으나 몇 걸음 가지 않아 이내 수풀로 뒤덮인 길이 이어진다. 딱 동네 뒷산 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잘 찾지 않는 동네 뒷산.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풀이 무성한 걸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가보다. 
     나무가 길을 뒤덮어버린 산길을 따라 산비탈을 계속해서 오른다. 오르고 올라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미로에 갇힌 느낌이다. 그간 잘 정돈된 등산로에 대해 불평했는데, 막상 자연 그대로의 산길을 따라 걸으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마을에서 채 1.5km를 떠나왔는데 벌써 지친다. 일반 등산로 1.5km와 수풀을 헤치고 길을 찾으며 한 발 한 발 겨우 떼어 걷는 1.5km는 느낌이 많이 다르단 걸 뼈저리게 느낀다.
     이런 길인 줄 알았으면 국도로 경유할 걸 그랬다. 지친다. 대간의 마루금도 아닌데 괜히 힘을 빼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푸드덕 날아가는 새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며 걸음을 재촉한다. 새가슴이 되었나보다. 하긴 당장 내 앞에 뱀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길이다. 나무 사이를 헤치며 걷다보니 큰 배낭이 걸림돌이다. 좁은 길을 지날 때마다 걸리적거려 신경을 긁는다. 초행길인데다 개척 산행으로 예민해진 신경은 별게 다 거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무의 틈바구니를 지나다 보니 가지는 날 찌르고, 난 가지를 부러뜨리기 일쑤다.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나무는 나무대로 아프다고 아우성이고, 나는 나대로 곤욕스럽다. 나무 사이 거미줄은 또 어찌나 많은지! 온갖 벌레란 벌레는 다 내게 안기는 것 같다. 리얼 야생의 길이다. 
     그렇게 운계봉에 겨우 올랐다. 정상 직전부터 길의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길이 넓기도 하고 한결 수월한 길이었다. 트랭글에서 먼저 축하를 전했다. 운계봉에도 뱃지가 있었나보다. 대간도 아닌데 이 뱃지마저 없다면 억울할 뻔했다. 자그마한 뱃지 하나로 험난한 산길을 헤쳐 오른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정상에는 그늘도 없고 벌레도 많아 쉬어갈 곳은 아니었다. 인증 사진 한 장 남기고 계속해서 이어간다. 내려가는 길은 다행히도 오르는 길에 비하면 훨씬 낫다. 여기저기 사람의 흔적이 많아 길이 헷갈리기도 한다. 이 흔적들은 벌목 작업자들의 것인 듯 했다. 길을 찾으며 내려가다 보니 나무와 나무 사이를 노끈으로 묶어 길을 표시해두어 길 찾기에 좋았다. 
     평소 걷던 등산로에 비하면 좋지 않은 길이었지만, 앞서 오른 길을 생각하니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많은 이들이 운계봉을 이 등산로로 오르나보다. 길도 비교적 잘 닦여 있고, 표식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날머리에 용연사가 있다. 대개 등산로 들‧날머리에는 사찰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기왕 용연사도 들렸다 가고 싶은데, 지도상 산길을 따르면 사기막 저수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도무지 다시 오를 자신이 없어 감으로 방향을 잡아 산비탈을 내려간다. 운계봉에 오르며 없는 길을 찾아 다녔더니 금세 자신감이 붙었나보다.
     없는 길을 만들어 용연사로 내려섰다.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기운을 받은 뒤 아름다운 임도길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종교는 없지만 가끔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제 사기막 저수지에서 매봉까지만 오르면 이번 구간의 큰 오름은 끝날 것 같다. 오늘 운행은 매봉에서 대관령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듣기로 대관령까지는 거의 내리막인데다 평이한 구간이라 그리 힘들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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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간 능선의 초원과 풍력발전기가 어울려 멋진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저수지를 돌아 사기막 임도를 오른다. 그토록 힘들었던 운계봉을 넘고 나니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이제 힘든 구간은 끝이겠지, 설마하니 운계봉보다 더 힘든 구간이 있을까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임도를 오른다. 
     이곳 사기막 임도는 두세 번 와보았기에 낯설지 않은 곳이다. 두 차례 자전거 대회를 이곳에서 치렀다. 45km 장거리 대회이기에 꽤 오랜 시간 숨을 헐떡이며 달린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경쟁자와 1분 1초를 다투며 올랐던 기억, 마음이 급해 내리막에서 서두르다 코너에서 낙차해 무릎에 피를 쏟았던 일,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난 추억에 즐거운 것도 잠시 산길까지 거리가 상당했다. 7km 가량의 길이다. 이곳을 자전거로 달릴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여태 걸어온 산길은 그늘이었기에 그나마 괜찮았는데, 이곳 임도는 그늘조차 없다.
     아침에 마을에서 떠 온 물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고, 또 다시 식수에 대한 걱정이 밀려온다. 그 사이 차량 세대가 지나간다. 임도 시작점에 국유임도 안내문이 있었는데 공사 때문인지 관련 차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을 구하려 지나는 차마다 물을 구걸해보았지만 모두들 없다며 미안하다 하고 지나갔다. 아침의 할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임도 코너를 돌자 산길을 따라 계곡으로 흐르는 물이 보인다. 정말이지 휴대용 정수기를 챙겨오길 잘했다. 졸졸 흐르는 물 옆에 바짝 엎드려 타들어가는 목부터 축인다. 대간의 깨끗한 계곡들을 보면 한 편으로는 눈으론 보이지 않으나 저 위에서 동물의 사체나 지저분한 것이 섞여 흐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꺼림칙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타는 목마름으로 인해 별 신경 안 쓰고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럴 때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달게 마시던 일화가 떠오르곤 한다. 대간 길에서 그간 몰랐던 물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고 있다.
     다시 출발한 뒤 매봉까지 가는 길의 1/3쯤 지났을까, 갑자기 산길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길이 좁아지며 계속해서 산비탈을 치고 오르는 길이 이어진다. 오전에 운계봉을 오르던 딱 그 길이다. 길은 더 험해졌고 경사도도 더 세져 나타났다. 계속해서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운계봉에 이어 매봉 가는 길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3시간을 산 속에서 나무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헤매었다.
     전투 산행으로 팔 토시는 이미 걸레짝이 된지 오래였고, 새로 산 바지는 온갖 풀에 긁혀 보풀이 일었다. 땀으로 떡이 진 머리엔 여러 겹의 거미줄과 벌레들이, 가방엔 나뭇가지와 풀의 잔해들이 가득했다. 옛날이었다면 간첩으로 여길 몰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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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에서 바라본 노을.
    매봉 삼거리에 올라서니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마 그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미쳤다 생각할 만큼 혼자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부터 산 속에서 장장 18km를 걸어 8시간 만에 매봉에 도착했다. 무엇보다 생존의 기쁨이 앞섰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다. 곤신봉을 거쳐 선자령, 대관령까지 10여km는 더 가야하는데, 빠듯할 것 같다. 아침에 전투식량을 먹은 것 외에는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해 허기가 밀려온다. 전력투구하며 올랐기에 그럴 만도 하다. 올라올 때는 길을 찾는 것에 급급해 느끼지 못했는데 에너지가 부족했나보다. 배고프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한국등산학교 동기인 상진오빠가 챙겨준 프랑스군 전투식량을 꺼냈다. 큼지막한 수제 소시지 두 개와 푸실리 파스타면, 갖은 야채가 토마토 베이스에 함께 버무려진 식량이었다. 은은하게 치즈향이 올라오는 서양식 도시락이다. 
     무엇보다 우리 군식량에 들어있는 찐밥처럼 물을 붓고 기다려야 하는 수고스러움도 없고, 바로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실제로 대간을 걸어보니 식수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밥을 불리기 위해 약간의 물을 사용하는 것에도 부담을 느낀 적이 있기에 더욱이 유럽형 식량이 마음에 들었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대관령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곤신봉을 지나 선자령, 새봉, 대관령까지 대부분 내리막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나온 산길에 비하면 차가 다니는 임도라 편안했다. 조망 역시 백두대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멋진 경치를 자랑하는 구간이다. 
     오대산에서 소금강으로 내려가 비법정 탐방로를 우회한다고 하니 소황병산과 매봉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좋다며 아쉬워하던 산객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에코트레일이 괜한 고생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비법정 탐방로라 해봤자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말처럼 그냥 눈 한 번 딱 감고 소황병산으로 내려오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막상 몸이 힘들어지니 흔들리지 않던 생각들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이 길이 끝나고 나면 어떠한 방향이든 생각이 잡히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계획한 걸음을 돌리고 싶지 않다. 
     넓고 푸른 초원이 이어지는 길을 지난다. 마치 몽골 같기도 하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초원길이다. 동해전망대와 삼양 목장에서 만들어 둔 포토존을 지난다. 날이 흐려 동해까지 보이진 않는다. 최근 유독 흐린 날이 많은듯하다.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곤신봉에 도착했다. 임도길 한 가운데 있어 봉우리인지 의심스러웠는데, 지도를 확인하니 봉우리가 맞다. 그럼에도 왜인지 거저먹는 느낌이다. 지나온 운계봉과 비교해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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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경봉 정상.
     곤신봉을 지나 선자령까진 무척 아름다운 길이지만 이를 즐기기엔 너무 지쳐있었다. 오전의 산행이 힘들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한 눈에 들어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선자령까지 가는 짧은 길에 많이도 쉬어갔다.
     편안한 길을 걸으니 이제 온 몸에서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무거운 배낭에 어깨도 뻐근하고, 산비탈을 오르며 발 뒷목을 많이 사용해서인지 부하가 느껴졌다. 느릿느릿 걷다보니 선자령 정상에서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고도 상으로 새봉을 지나 대관령까지 내리막길일 테고, 길 또한 좋을 것 같아 서두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럴 땐 야간 산행이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선자령에서부터 평일임에도 비박을 즐기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멀리서 그들을 보니 초원 위 텐트가 그리도 낭만적으로 보일 수 없다. 땀에 젖은 내 모습과 비교하니 부러움이 밀려온다. 나도 이 길이 끝나면 한동안 낭만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몰두할 테다.
     선자령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선자령에서 일몰을 보기 위해 그 힘든 길을 지나왔을까 싶기도 하다. 아마 좀 더 빠르게 왔더라면 이곳에서 이 멋진 노을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붉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쉬어간다. 노을은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것처럼 있는 힘껏 기운을 내뿜더니 금세 사라져버렸다. 아쉬움도 잠시, 이젠 앞에 놓인 컴컴한 하산길을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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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헷갈릴 때마다 표지를 보고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랜턴에 불을 밝히고 내려갔다. 길이 넓고 좋아 내달리기 딱 좋은 코스다. 내리막에서도 땀이 절로 날만큼 열심히 달려 대관령에 무사히 도착한다. 아직 9시가 지나지 않은 시각이라 혹시 대관령휴게소가 문을 열지 않았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한달음에 달려간다. 그러나 불만 켜져 있을 뿐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휴게소 하나만 보고 하산 지점에서 800m를 더 걸어왔는데 힘이 쭉 빠져버린다.
     너무 힘들어 자포자기 심정으로 벤치에 드러누웠다. 피곤에 지쳐 잠시 선잠이 들어버렸다. 10분쯤 잤을까. 눈을 뜨고 오늘 밤을 보낼 자리를 고민한다.
     그러다 며칠 전 알게 된 기능을 떠올리고 네이버 지도에서 "화장실" 을 검색해본다. 그러면 상시 개방중인 화장실이 확인이 된다고 하는데 나 역시 실제로 사용해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근처의 신재생에너지 전시관에 화장실을 안내해준다. 마침 내일 능경봉으로 가는 산길 바로 옆의 건물이다. 좀처럼 기운이 없어 터덜터덜 자리를 옮긴다.
     다행히 화장실이 열려 있었고 넓고 깨끗했다. 어쩐지 주위에 차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까지 3일째 제대로 씻지 못해 찝찝하던 차였는데,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으니 행복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 곳곳에 생채기가 많이 생겼다. 오늘 운계봉과 매봉을 지나며 생긴 상처다. 양쪽 골반에는 배낭에 눌려 벌건 피멍이 들었었는데, 이젠 검게 변해 있었다. 발의 굳은살과 물집은 이젠 당연한 상수가 됐다.
     진부령에서 출발해 대관령까지 9일 동안 걸으며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집을 나선 그 순간부터 고생의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 침낭에 가만히 누워 오늘 일을 돌이켜보니 정말이지 한 순간도 위험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는데,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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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을 이용해 간이 스페츠를 만들었다.
    9월 3일 화요일 백두대간 일시종주 10일차
    대관령 신재생에너지전시관~기념비~능경봉~행운의돌탑~샘터~전망대~고루포기산~왕산제1쉼터~왕산제2쉼터~닭목령 (14km)
     새벽 3시.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달콤한 잠을 깨운다. 그러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분명 내일부터 비소식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실시간 날씨를 확인하니 새벽에 잠깐, 그리고 오후 2시부터 비 예보가 있다. 지금 내리는 비가 그치면 오전에 잠시 시간이 있다는 판단에 그 시간을 틈타 산행을 할 요량으로 텐트 안 짐 정리부터 시작한다.
     새벽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8시가 되어서야 그쳤다. 그 사이 아침도 챙기고 그간 놓쳤던 트랭글 기록을 업데이트 하며 시간을 활용한다. 텐트를 마저 정리하고 빠르게 산행을 시작한다.
     기념비를 지나 능경봉으로 향한다. 능경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강릉 바우길과 연계되어 관리가 잘 된 모습이다.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길인데 이렇게 대간을 걸으며 지날 수 있어 좋았다.
     전국의 테마길에도 관심이 많다. 이미 제주의 올레길과 대구와 서울의 둘레길은 모든 구간을 걸었다. 언젠가 바우길도 전구간을 걸어볼 기회가 있겠지? 기회가 된다면 외국의 장거리 트레일 PCT, GHT와 같은 길도 걸어보고 싶다. 
     능경봉까지 약 1.8km의 아기자기한 산길을 오른다. '솔올 강릉' 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솔향 가득한 숲길이다. 이미 한 차례 비가 촉촉하게 내린 뒤라 폭신폭신 산책을 나온 듯 기분이 좋다.
     빗물을 머금은 풀잎과 풀내음 가득 머금은 숲을 지나며 땀을 흠뻑 쏟는다. 습도가 높으니 그리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 움직이기만 해도 쏟아지는 땀은 어쩔 수가 없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몇 차례나 닦았을까. 어느새 능경봉 정상이다.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계속해서 고루포기 산을 향해 오른다. 잘 닦인 등산로 양옆으로 '등산로 아님', '식생복원중' 안내표지가 계속해서 눈에 띈다. 그간 무분별한 통행으로 훼손이 많이 되었나보다. 자연에서 걸으며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말이 모순일진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백두대간 길이 훼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기를 희망한다.
     샘터에 도착했다. 표지판에 샘터라 표시되어 있는데, 샘터가 어디 있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앞전의 조침령에서 갈전곡봉 구간에서도 샘터를 찾기 어려웠다. 분명 지도엔 몇 곳이나 표시되어 있는데 말이다. 앞으로도 샘터를 얼마나 발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지도상의 샘터 여부로 식수 조달을 계획하기엔 무리가 있겠다. 다소 힘들더라도 안전한 곳에서부터 물을 지고 넘어가야겠다. 
     능경봉을 지나 고루포기산을 향해 반쯤 오를 때였을까.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진다. 급히 고어텍스 자켓과 비닐을 꺼낸다. 비닐은 급할 때 간의 스패츠로 사용 할 수 있다. 비닐 아래에 구멍을 뚫고 한쪽은 양말에 집어넣고 다른 쪽은 아래로 젖힌다. 비닐이 스패츠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빠르게 환복을 끝내고 가방에 레인커버를 씌워주고 다시 출발한다. 그 사이 비는 거칠게 퍼붓다가도 그 기세가 약해지기도 하며 제 멋대로 성질을 부리고 있다. 고루포기산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비가 내려 주위를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기에 묵묵히 앞만 보고 내달렸다. 마침 산길의 흐름 역시 부드러운 능선길이 이어지는 곳이라 빠른 시간에 구간을 주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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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사위가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정상은 블랙야크 '백두대간에코트레일' 인증지라 정상석과 사진을 찍어 인증을 받아야 한다. 다행히도 하늘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비를 잠시 멈춰주었고 무사히 인증을 받았다. 아주 무심하지는 않은 하늘이다. 빠르게 인증만 하고 닭목령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10여km를 제대로 쉬지 못하고 쫓기듯 움직였더니 어깨가 가방에 눌려 내려앉을 것 같다. 아침에 급하게 패킹을 하며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린 것 같다. 배낭 패킹을 다시 하고 싶지만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 어쩔 도리가 없다. 
     온몸이 젖으니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진행 속도가 자연히 빨라졌고 기왕 젖은 김에 삽당령까지 내달릴까 생각도 했다. 닭목령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조금씩 좁아지며 수풀이 등산로까지 뻗어 있었다. 비에 젖은 풀들을 헤집으며 지나가야 했는데 그 덕에 바지는 완전히 젖어버렸고 결국 등산화까지 영향을 끼쳤다. 비닐로 임시방편을 마련했지만 그것만으로 버티기엔 비의 양이 너무 많았다.
     바지가 젖으며 발목을 타고 물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금세 등산화 안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등산화가 젖으니 걷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등산화 안에서 물이 출렁출렁 난리통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생쥐 꼴로 닭목령까지 내려왔다. 삽당령은 고사하고 당장 운행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우천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중등산화가 젖어버려 더 이상 진행이 어렵다 판단하고 트랭글을 종료한다.
     닭목령 옆의 창고 한 편에서 비를 피하며 날씨를 확인하니 이번 주 주말까지 5일 내내 비소식인데다 태풍이 상륙한다는 특보가 전해진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까운 강릉으로 움직여 하루 이틀 쉬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문제는 컨트롤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생각한다.
     쌀쌀해진 날씨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비를 피하며 쭈그리고 앉았다. 이제 시내로 내려가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곳 닭목령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라 대중교통편이 적다. 강릉까지는 또 어떻게 가야하나, 택시를 부를까, 히치하이킹을 할까 고민하던 찰나 승영 언니가 속초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쏟아지는 비에 걱정이 되어 전화를 주셨단다. 닭목령에서 탈출 할 방법을 고심하던 내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연락이었고, 염치 불구하고 언니께 넙죽 도움을 청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곧바로 달려와 준 언니 덕에 강릉까지 편히 이동해서 점심을 먹었다.
     비로 인해 일정이 불투명해졌다. 승영 언니에게는 3일차 오색에서도 신세를 졌는데, 또 한 번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갚아야 할 지 감사하면서도 죄송함이 앞선다. 
     산에서 만난 선배, 형들은 늘 그랬다. 바라는 것 없이, 조건 없이 후배들, 동생들에게 한없이 베풀어 준다. 그럴 때면 큰 산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이 몰려올 때가 있다. 언젠가 나도 그러한 산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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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식일동안 속초스포츠클라이밍 짐에서 운동했다.
    9월 4~7일 백두대간 일시종주 11일~ 14일차
    4일 간의 휴식일
     9월 3일 화요일, 대관령에서 닭목령까지 약 15km 가량 진행했다. 원래는 못해도 삽당령까지 갈 계획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걸음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닭목령 근처 농가 한 편에서 비를 피하며 하늘을 살폈다. 비는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바람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더 이상 진행이 어렵다 판단되어 잠시 운행을 멈추고 승영언니의 도움을 받아 속초 시내로 내려왔다. 밥을 먹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본다. 이번 비로 인해 많은 장비가 젖어버렸다. 우천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던 탓에 텐트는 물론이고 침낭과 중등산화, 양말, 등산복까지 몽땅 젖어버려 주요 운행 장비를 당장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오버트라우져와 스패츠를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는 욕심에 마지막 점검에서 이것들을 빼버린 것이 몹시 후회됐다. 후회한들 이미 일은 벌어져버렸고, 수습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다. 장비를 모두 말리려면 못해도 하루는 걸릴 테다. 날씨를 확인하니 일기예보 상 이번 주말인 일요일까지 5일 내내 비소식이 예정되어 있다. 좋지 않은 소식이다. 그것도 태풍을 동반한 비소식이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 지 고민이 깊어진다.
     불가피한 상황이니 만큼 우선 수요일 하루는 속초에서 쉬며 장비를 점검하는 것으로 정한다. 승영 언니의 소개로 염치 불구하고 조민수, 남정아 선배님의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지게 되었다.
     조민수 선배님은 이번에 한국등산학교의 암벽반을 수료하며 국립등산학교 암장을 이용할 때 뵈었다. 남정아 선배님은 실제로 뵙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한국여성등반사에서 존함을 여러번 들었던 기억이 났다. 두 분 모두 오랜 시간 한국등산학교 강사님으로 활동한 대선배님들이셨다.
     지내다보니 첫인상에서 느껴지던 분위기와는 달리 민수 선배님의 유쾌한 모습에 놀랐고, 정아 선배님은 '산에 다닐 것 같지 않은' 미모에 두 번 놀랐다. 두 분은 내 사정을 들으시곤 거리낌 없이 집으로 초대해 지친 몸과 장비를 돌봐주셨다. 사실 이번이 사석에서 인사드리는 첫 만남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격의 없이 반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머무른 집은 ‘역시 산악인의 집’이라는 찬사가 절로 나오는 곳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눈에 띄는 멋진 등반 사진들과 각종 산서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거실에는 평소 읽고 싶었던, 지금은 절판된 산서부터 필독서로 손꼽히는 산서들이 가득했다. 방 하나와 작은 창고 한 편에는 다양한 등반 장비들이 가득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보물창고가 따로 없었다. 장비를 구경하며 입이 떡 벌어진다.
     열흘 간 중청대피소 외에는 오로지 야영으로만 대간을 걸어왔기에 옷이 멀쩡할 리가 없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땀내와 온갖 악취가 역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천장 달린 집에서 묵는 김에 그간 제대로 세탁하지 못한 땀에 쪄든 옷을 몽땅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시원스레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고 있노라니 속이 다 시원했다.
     건조기에 중등산화를 말리고, 패딩 리프레쉬 기능이 있는 드럼세탁기로 침낭과 경량패딩까지 손질했다. 또, 찢어진 텐트와 배낭은 급한 대로 손바느질과 테이프로 메꿨다. 지저분해진 고어텍스 자켓은 세탁하여 발수제로 코팅을 입히고, 열흘 간 걸으며 헤져버린 등산화 깔창은 선배님의 도움으로 새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렇게 장비를 손볼 때도 마치 내 일인 양 함께 고쳐주고 고민해주는 선배님들의 모습에 감동이 밀려온다. 나홀로 오른 대간인데, 도리어 많은 이들을 수고스럽게 만드는 것 같아 죄송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혼자 계획하고, 혼자 달려왔는데 결국 많은 분들께 의지하고 도움을 얻고 있다. 역시 사람은 혼자일 수 없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수요일이 되자 고민이 깊어진다. 일요일까지 계속해서 적지 않은 비소식이 내 발목을 잡는다. 온종일 삽당령과 닭목령, 댓재 근처 고속도로 CCTV 화면을 통해 현지 기상 상황을 살핀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안개가 뿌옇게 끼여 어두워진 화면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까지 어두워진다. 그렇게 비가 세차게 내리다가 잠시 멎었다가 다시 내리다 그쳤다를 반복하며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고민을 하는 사이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셨다. 모두들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은데 내가 무리해서 진행하고 있을까 걱정되신 모양이다. 많은 분들이 “다른 이유도 아니고, 태풍이 북상중인데 진행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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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더링 문제를 풀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은 무모한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4일, 어쩌면 5일이나 휴식하는 건 부담스럽다. 그간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느리긴 했지만 휴식일 없이 꼬박 열흘을 달려왔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더더욱 포기하기 쉽지 않다. 
     갈등에 휩싸인다. 애초에 내가 계획한 것은 '백두대간 일시종주'인데, 4~5일씩 쉬어버리면 과연 ‘일시종주’의 의미가 있을까. 태풍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하루에 10km 씩이라도 움직이며 동태를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아파온다.
     날은 점점 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낌새가 수상쩍다. 결국 고민을 거듭하다 일요일까지 쉬어가는 것으로 마음을 내려두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어느 선배의 한 마디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네가 이 시점에서 어떤 것들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허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의외로 해답은 간단하다. 이런 상황에서 강행하기만 한다면 이렇듯 좋지 않은 상황에 산행을 하는 내용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내용으로 인해 2차 피해가 파생되는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 강행하지 않았을 때의 지탄을 고민한다면, 반대로 강행했을 때의 비판 또한 생길 수 있다는 걸 생각해라."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해소된 느낌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때로는 과감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날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마음을 비운다.
     백두대간 일시종주 계획을 세울 때만 하더라도 사실 태풍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생각이 없었다. 너무 무지했던 탓이다. 그저 불청객인 13호 태풍 링링을 미워하다가도 너무나 무지했던 나를 탓해본다.
     속초에서 그리 편치 않은 마음으로 4일을 보냈다. 이곳에서 기상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날이 좋아진다면 언제고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일요일부터 다시 운행을 재개할 생각이다. 토요일 낮 2~3시를 기준으로 태풍은 서울을 지나 서해안으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태풍의 영향권이라 100%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운행을 해도 충분하다 판단됐다.
     태풍 속에서 홀로 고민에 빠졌을 어린 후배를 돌봐준 문승영 언니, 4일간 매끼니 따뜻한 집밥을 챙겨준 남정아 선배님과 매듭법과 시스템을 알려주며 상념에 빠지지 않게끔 공부할 거리를 만들어주던 조민수 선배님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참 그 짧은 시간 동안 몸보신하고 가야 한다며 줄서서 먹는 속초의 유명한 먹거리들을 많이도 사주셨다. 그러나 남은 40일의 여정에서는 이들보다 선배님이 손수 차려줬던 김치찌개, 삼계탕, 고등어구이 등 따뜻한 집밥이 더 생각날 것 같다. 
     밥의 온기보다 따뜻했던 마음의 온기를 지니고, 다시 태풍이 지나간 후 더욱 스산해진 대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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