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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백두대간 에코 트레일ㅣ44~45구간 두타산 르포] ‘링링’ 번뇌는 ‘頭陀’ 사투하며 정진!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주민욱 기자
  • 입력 2019.10.1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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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재~두타산~청옥산~이기령~원방재~백봉령 29㎞ 안간힘 짜내

막강한 오르막, 만만찮은 무게의 배낭, 가야 할 먼 길, 모든 게 녹록하지 않지만 포기는 없다. 두타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최경순씨.
막강한 오르막, 만만찮은 무게의 배낭, 가야 할 먼 길, 모든 게 녹록하지 않지만 포기는 없다. 두타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최경순씨.

“못난 놈” 소리가 울컥 튀어나왔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정신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방수 배낭도 종일 내린 비에 무너져 내렸다. 허리끈은 끝까지 조여도 물기에 미끄러져 내렸고, 젖은 어깨끈은 25㎏ 넘는 무게로 걸을 때마다 어깨와 척추, 골반을 집요하게 쑤시고 있었다. 야영하고 남은 음식과 쓰레기를 가지고 내려가야 한다는 신념이, 내 안에서 허물어졌다가 다시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히말라야도 아닌 국내산에서 이토록 무너져 내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이 지옥 같은 오르막은 언제 끝나는지, 젖은 얼굴을 가렵게 만들며 리듬을 흐트러트리는 거미줄로부터 언제쯤 자유로워질지 하는 생각을 하다간, 여지없이 진흙과 젖은 바위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고, 짐을 버리고 싶었지만 버릴 수 없었다. 게다가 동행한 이들은 야영을 처음 하는 이들, 내가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다. 산으로부터 조롱 받는 기분이었지만, 이 정도 밀당(밀고 당기기)에서 버티지 못한다면 산에 올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산은 없다.

1,400m대 험산답게 신갈나무도 육중한 몸짓으로 숲의 깊이를 더한다.
1,400m대 험산답게 신갈나무도 육중한 몸짓으로 숲의 깊이를 더한다.

태풍 ‘링링’이 북상하고 있다. 불가피하게 산행 일정을 미뤘으나 태풍의 여파는 남아 있어, 며칠간 전국적인 비 예보다. 추석이 있어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어 우중산행을 하기로 했다. 우중산행보다 신경 쓰이는 건 두타·청옥산이었다. 댓재에서 백봉령까지 악명 높은 깔딱고개가 많은 반면, 29㎞ 동안 지나는 도로가 없어 체력의 한계치로 몰아붙이며 완주해야 하는, 난코스였다. 느린 취재산행 특성상 청옥산 정상에서 야영하고 완주하기로 했다.

반가운 손님은 일시종주 중인 블랙야크 성예진 셰르파다. 태풍으로 인해 우연히 일정이 겹쳤고, 각각 남진과 북진하는 와중에 청옥산에서 만나 하룻밤 함께하기로 했다. 힘든 일정임을 아는지 평소와 달리 참가 신청자가 없다가 부산의 허영섭 셰르파가 합류했다. 더불어 부산의 최경순, 울산의 김정희 도전자, 히말라야 1,700㎞ 트레일을 완주한 문승영씨가 함께했다. 복병은 문승영씨를 제외한 세 사람이 야영 산행은 처음이라는 것. 고맙게도 대형 배낭을 비롯한 야영 장비를 구입해 참가했다. 

고도를 높일수록 구름 속으로 오르는 듯 가스가 짙어졌다.
고도를 높일수록 구름 속으로 오르는 듯 가스가 짙어졌다.

“욕심 부리면 꼭 사고 나는 곳”

댓재휴게소 주인장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여러 번 대간을 탔음에도 댓재에 휴게소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는 일행의 말에 그는 “20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며 “어두운 새벽에 와서 앞사람 뒤꽁무니만 보며 걷는 사람은, 대간을 제대로 탄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댓재휴게소의 노식(68세) 사장은 “서울 시장 박원순, 가수 이문세, 만화가 허영만 같은 유명 인사들도 대간을 종주할 땐 모두 이곳 민박에서 자고 갔다”고 자랑스럽게 전했다. 일행의 큼지막한 배낭을 보고선, “욕심 부리면 꼭 사고가 나는 곳이니 조심하라”는 당부로 이야기를 마쳤다. 

낙엽송이 깔끔하게 뻗은 숲은 대간다운 기품이 흐른다. 야산과는 다른 왕족의 기백이 깃들어 있다. 오버트라우저(방수바지)와 비옷으로 단단히 방수 대비를 했으나 짙은 구름만 가득할 뿐, 비는 아직 내리지 않는다. 햇대등을 넘자 키다리 금강소나무와 낙엽송이 바통터치를 한다. 경치는 없지만 초록 가득한 숲의 빛깔과 향기에 정신이 또렷해진다. 

거미줄이 많지만, 의외로 쓰러진 나무가 드물어 온전히 산길에만 몰두한다. 통골재에 닿자 신갈나무가 능선을 접수했다. 대간에서 가장 많은 나무답게 빠른 번식력으로 두타·청옥을 자기 땅으로 만들고 있다. 

고도를 높이자 구름 속인 듯 숲이 가스로 덮인다. 두타가 다가올수록 오름도 가파르다. 두타頭陀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세상 모든 번뇌망상을 버리고 수행에 정진한다’는 불교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부처가 누운 모습이라는 능선의 형상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연칠성령 부근의 전망바위에
올라 트인 경치를 즐긴다. 인간의 흔적은 하나도 없는, 초록의 왕국 한가운데 온 것이 실감난다.
연칠성령 부근의 전망바위에 올라 트인 경치를 즐긴다. 인간의 흔적은 하나도 없는, 초록의 왕국 한가운데 온 것이 실감난다.

몸은 두타산 정상에 가 닿지만 번뇌는 버리지 못한다. 당장 야영 터 도착 시간이나, 내일 날씨, 샘터 상황 같은 것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너른 정상에서의 경치는 일찌감치 포기했는데, 두타는 과분한 선물로 문득 하늘을 열어 주었다. 시야가 트이며 운해가 흐르는 첩첩산중 진경이 펼쳐졌다. 어찌나 구름의 흐름이 빠른지 사진 찍기 전 풍경과 찍은 장면이 다르다. 

정상을 내려서자 “후드득” 빗방울이 잎사귀에 떨어진다. 늦었다. 해 지기 전 청옥산 정상에 오르긴 글렀다. 아직 멀었는데 해가 저물었다. 빨리 가는 건 중요하지 않으니, 헤드랜턴을 켜고 산길에 더 집중해 줄 것을 당부한다. 땀범벅이 되어 어둠이 내린 청옥산에 닿자, 젊은 처자의 코 고는 소리에 웃음이 난다. 먼저 도착한 성예진 셰르파가 고단한 산행 끝에 텐트에서 잠이 들었다.  

큼직한 쉘터를 세워 모두 둘러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태풍 링링의 끝자락에 놓인 청옥산엔 아무도 없다. 세상 끝에 고립된 것 같은, 가난하지만 따뜻한 느낌의 밤, 이 맛에 백패킹하는 것이다.

비에 젖고, 오르막에 지친 몸을 몽환적인 숲이 끊임없이 시험한다.
비에 젖고, 오르막에 지친 몸을 몽환적인 숲이 끊임없이 시험한다.

다행히 비가 그친 아침, 성예진 셰르파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북진한다. 남은 거리를 생각하면 감상에 빠질 여유는 없다. 그럼에도 걸음을 멈춰 세우는 것들. 산신령마냥 멋진 맵시의 구상나무와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마가목, 긴 세월을 버틴 주목, 하얀 도포를 입은 자작나무가 번갈아 나타나 산길이 다채롭다. 

연칠성령連七星嶺은 독특한 이름과 달리 돌탑이 있는 평범한 안부다. 글자 그대로 보면 하늘의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라는 의미로 볼 수 있으나, 이 고장 이름 풀이에 의하면, 동쪽 사원 터에서 서쪽 하장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7개 등성이가 있다고 하여 유래한다. 노란 올챙이들이 장관이다. 선괴불주머니 꽃으로 능선이 뒤덮여 무뚝뚝한 사내도 그냥 지나지 못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노란 선괴불주머니 꽃이 지천으로 핀 고적대 능선.
노란 선괴불주머니 꽃이 지천으로 핀 고적대 능선.

마지막 힘 짜내 이기동으로 탈출


젊은 구상나무가 있는 전망바위에서 잠깐 경치가 터진다. 가야 할 고적대가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솟았다. 산을 넘느라 바쁜 구름의 향연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본다. 고적대가 다가올수록 길이 거칠어진다. 힘을 과시하는 공룡의 뿔 같은 바위들을 부드럽게 달래듯 디디며 오른다. 

청옥산에서 부족했던 경치를 고적대가 채워 준다. 동해에서 밀려오던 구름이 대간 능선을 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다. 구름과 산이 고요한 몸사위로 합을 맞추고 있었다. 고적대를 내려서자 구름 속이다. 숲이 가스로 채워져 몽환적이다. 는개가 느리게 내려서고, 몽환적인 풍경 속을 꿈꾸듯 걷는다. 무의식적으로 걸음이 나가고, 무의식적으로 안전한 곳을 딛는다. 걸음의 무아지경에 빠져 가는 비 내리는 산길을 걷는다. 

산행이 길어질수록 쓰러진 나무도 점점 늘어난다.
산행이 길어질수록 쓰러진 나무도 점점 늘어난다.

비와 땀으로 다들 몸이 흠뻑 젖었다. 배낭은 더 무거워지고 땅은 미끄럽고 가팔라 힘이 더 들어간다. 오후 5시가 넘자 일행 사이의 웃음기도 사라졌다. 야영이 처음이라 힘들고, 배낭 벨트가 끊어져 힘들고, 무거워 힘들고, 모두 고통스러웠으나 마지막 힘을 짜내어 대간을 탈출한다. 이기령에서 동해시 이기동으로 산을 벗어난다.

시내의 숙소에서 하룻밤 노곤한 몸을 누인다. 다음날, 정선 임계면 부수베리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대간에 접속한다. 두타를 강타했던 링링의 반격. 쓰러진 나무와 거미줄의 역습이다. 하지만 가벼운 배낭 덕분에 어제와는 다른 몸짓이다.

상월산을 넘고 1022m봉을 넘는다. 끝없이 인내력을 시험하는 모든 것에 맞서지 않고, 받아들인다. 공기 한줌, 호흡으로 산을 넘는다. 쉬운 산은 없지만 못 오를 산도 없다. 저기 백봉령이다.

두타산 정상에 오른 순간, 마침 흐린 하늘이 걷히며 아득히 펼쳐진 첩첩산중을 볼 수 있었다.
두타산 정상에 오른 순간, 마침 흐린 하늘이 걷히며 아득히 펼쳐진 첩첩산중을 볼 수 있었다.

두타·청옥산 구간 종주 가이드

가파른 오르내림 29.2㎞ 산줄기에 마주치는 도로가 없다. 12~16시간 산행을 각오하고 새벽 일찍 시작하거나 구간을 나눠 종주해야 한다. 중간 기점으로 알맞은 곳은 이기령과 원방재다. 이기령은 댓재에서 20㎞ 지점에 있어 여기까지 산행도 사실 만만치 않다. 이기령에서는 동해와 정선 방면으로 모두 임도가 있다. 

동해 이기동은 3.6㎞를 임도 따라 걸어야 승용차 통행 가능한 도로(잎새바람 카페)에 닿는다. 정선 방면은 7㎞ 정도 임도를 따라 가야 부수베리마을에 닿는다. 하지만 임도가 완만해 SUV 차량도 오를 수 있다. 이기령에서 원방재는 2.8㎞를 더 가면 닿는다. 정선 부수베리마을로 내려서는 임도가 있다. 길찾기는 능선이 선명해 어렵지 않지만, 고적대를 지나면서부터 수풀이 거칠고 산길이 좁아 산행이 쉽지 않다. 계절별 수량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두타산 정상, 청옥산 정상, 원방재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블랙야크 백두대간 인증지점인 통골재. 왼쪽부터 김정희, 최경순, 문승영, 허영섭씨.
블랙야크 백두대간 인증지점인 통골재. 왼쪽부터 김정희, 최경순, 문승영, 허영섭씨.

교통(지역번호 033)

삼척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장 방향 버스를 타면 댓재에 내릴 수 있다. 삼척에서 하루 세 번(07:30, 13:30, 16:30) 출발하며 40분 정도 걸린다. 이 버스가 하장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삼척으로 간다. 삼척 출발 시간에서 1시간 10분을 더한 8시 40분쯤이 댓재에서 삼척행 버스 시간이라는 것이 댓재휴게소 주인장의 설명. 자가용을 댓재에 세워둘 경우 댓재휴게소 숙박객에 한해 백봉령으로 픽업(5만 원) 가능. 택시비 6만 원 정도 1시간 소요. 백봉령은 버스편이 없으므로 동해시에서 택시를 이용한다. 백봉령까지 3만 원 정도. 문의 동해개인택시(532-6000), 동해콜택시(531-3000).  

맛집(지역번호 033)

동해시 묵호물회(534-0478)는 물회(8,000원)와 회덮밥(8,000원)이 별미. 매콤한 양념에 부드러운 뼈가 있는 회를 버무려 살얼음으로 마무리했다. 양념 맛이 강해 호불호가 나뉠 수 있으나 다른 물회집 가격에 비하면 가성비가 높아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다. 냉면권가(533-9911)는 3대째 이어온 70년 전통의 냉면(9,000원) 맛집이다. 평양식과 함흥식을 모두 제공하며, 물냉면은 평양, 비빔냉면은 함흥이 낫다는 평. 별미는 통닭(1만8,000원)으로 기름기를 뺀 담백하고 바삭한 맛으로 인기. 그외에 만두, 온면, 한우불고기, 수육이 있다.

고적대 정상은 좁지만 시원한 경치가 일품이다.
고적대 정상은 좁지만 시원한 경치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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