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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해외 등반ㅣ시에라네바다 암봉] 거대한 회백색 괴물, 인크레더블 헐크

글 사진 우석주
  • 입력 2019.10.2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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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등반높이 500m 암봉…
난이도 5.11a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 8피치 등반

등반 전 베이스캠프에서 인크레더블 헐크와 루트를 관찰하고 있다. 새하얀 바위가 주변과 대조된다.
등반 전 베이스캠프에서 인크레더블 헐크와 루트를 관찰하고 있다. 새하얀 바위가 주변과 대조된다.

올해 여름휴가는 어디서 보낼지 한 달 넘게 고민하다가 결국 미국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위치한 ‘인크레더블 헐크(3,389m)’를 등반하기로 결정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휴양지와 등반지를 놔두고 이곳을 선택한 건 단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 속의 새하얗고 거대한 벽을 본 순간 오직, 저 벽을 오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클라이머라면 응당 존경할 존 롱과 린 힐이 클라이밍 실력을 갈고 닦았다는 타키즈 락, 여호수아가 두 팔 벌려 반겨주는 조슈아 트리, 여섯 캔에 10달러밖에 안 하는 수십 종류의 맥주 등 이곳을 찾을 이유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오직 내 마음을 흔든 건 인크레더블 헐크의 압도적인 등반선이었다.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영훈이 형(본지 오영훈 기획위원)이 흔쾌히 동행 요청을 승낙해 둘이 함께 등반하게 됐다.

허약한 과학자가 분노하거나 위협을 느끼면 거대하고 힘 센 초록색의 괴물로 변하는 만화(또는 영화)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헐크’라는 이름의 영웅은 모두를 압도하는 엄청난 괴력과 험악한 인상, 거대한 덩치, 터질 듯한 근육, 초록색 피부의 강인한 외모의 소유자로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위치한 약 500m의 등반높이를 지닌 암봉, 인크레더블 헐크도 마찬가지다. 주위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바위가 있다. 오히려 인크레더블 헐크 뒤로 더 크고 높은 바위들이 있고 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선 바위들도 만만치 않은 위압감을 준다. 하지만 인크레더블 헐크는 좀 특별하다. 넓은 너덜지대 위에 새하얗고 거대한 벽이 느닷없이 솟아 있다. 회색인 것 같으면서도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받으면 새하얗게 빛난다. 좌우로 늘어선 바위는 인크레더블 헐크에 비하면 얼룩덜룩한 무늬가 섞인 점박이 강아지들 같아 보인다. 주위 바위와 이질적인 하얗고 커다란 벽은 경외감이 들 정도다. 단연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봉우리이다.

난이도 5.11a의 볼더링 무브가 있는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 3피치.
난이도 5.11a의 볼더링 무브가 있는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 3피치.

곧게 뻗은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

바닥부터 정상까지 벽을 가득 메운 세로로 주름진 크랙들은 마치 분노한 헐크의 터질 듯 꿈틀대는 근육의 결처럼 보인다. 최소 수 미터부터 최대 수십 미터까지 늘씬하게 뻗어 있다. 우리는 이 중에서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Positive Vibrations’ 루트를 오르기로 결정했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전면에 위치해 있으며, 시작부터 끝까지 크랙이 잘 발달한 루트다. 가느다란 떨림을 줄 만큼 등반선이 너무나 곧게 뻗어 있는 루트다. 어떤 의미로 개척자들이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아무리 찾아도 도통 알 수 없었다.

사실 원래는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가장 난이도가 낮은 ‘레드 다이히드럴Red dihedral’을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루트는 이미 영훈이 형이 다녀온 곳이었다. 가까운 곳이라면 한 번 오른 루트를 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인크레더블 헐크는 아니었다. 이곳을 오르려면 LA에서 시속 120km로 8시간을 달려와서 주차장에서 2시간 쪽잠을 잔 뒤 하루에 4명밖에 주지 않는 선착순 등반허가서를 받고, 4~5시간을 걸어 올라가 해발고도 3,000m대에서 캠 2~3세트, 너트 1~2세트를 써야 한다.

그래서 ‘폴리시 루트polish route’라는 루트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영훈이 형이 지난 번 등반 때 눈여겨 봐두었던 전면의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를 제안했다. 검색해 보니 ‘바로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다. 난이도 5.11a, 총 8피치, 등반거리 약 400m, 인크레더블 헐크의 한가운데를 올라가는 곧게 뻗은 등반선. 인크레더블 헐크에 한 번,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에 두 번,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났다. 우리는 단박에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를 오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포티지브 바이브레이션스 4피치. 발 밑이 뻥 뚫려 있어 스태밍(짝힘을 이용해 양 옆의 벽을 밀듯이 등반하는 것)과 툭 튀어나온 바위의 핸드크랙이 관건인 구간이다.
포티지브 바이브레이션스 4피치. 발 밑이 뻥 뚫려 있어 스태밍(짝힘을 이용해 양 옆의 벽을 밀듯이 등반하는 것)과 툭 튀어나온 바위의 핸드크랙이 관건인 구간이다.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는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레드 다이히드럴과 더불어 가장 인기가 좋은 루트인 듯했다. 실제로 우리 앞뒤로 등반한 현지 클라이머들이 모든 루트를 통틀어 제일 많았고 하산 중에 만난 사람들도 한결같이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를 이야기했다.

루트를 결정한 날부터 집 벽에 전체 사진과 루트 개념도를 여러 장 뽑아 붙여놓고 매일같이 손과 눈, 그리고 머리로 그렸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은 물론 옷은 어떻게 입어야 될지도 고민했고, 캠과 너트는 어떤 사이즈로, 얼마나 챙길 것인지 고민했다. 눈을 감으면 가보지도 않은 5.10급 스태밍 침니와 50m의 핸드크랙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만 크럭스만큼은 쉽게 해결이 되지 않았다. 직접 가서 부딪쳐야만 해결될 문제였다.

인크레더블 헐크 정상으로 가는 쉬운 구간. 이곳을 지나면 레드 다이히드럴과 합류하며 두 피치를 더 등반해야 정상에 도착한다.
인크레더블 헐크 정상으로 가는 쉬운 구간. 이곳을 지나면 레드 다이히드럴과 합류하며 두 피치를 더 등반해야 정상에 도착한다.

6피치에서 추락 겪고 완등 성공

미국에 도착하고 이틀간 시차적응한 뒤 인크레더블 헐크 인근의 마을인 브리지포트 관리사무소로 출발했다. 사무소 주차장에 도착한 건 새벽 4시쯤이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 뜨자 이미 입산시간인 8시가 다 되어가고 주위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굼뜨게 침낭을 개는 나와 다르게 상황을 인지한 영훈이 형이 빠르게 움직여서 아슬아슬하게 인원이 차기 전에 등반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뒤에 네 명으로 구성된 한 팀이 더 있었다. 여자 한 명이 통사정을 해보는 것 같았지만 엄격한 미국 레인저들에게 먹힐 리가 없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로서는 천만 다행이었다. ‘너희는 아무리 멀어봐야 미국 동부에서 왔겠지만 나는 태평양을 건너왔잖아. 이해해 줘’라고 속으로 심심한 유감의 말을 전했다.

네 시간 정도 올라 인크레더블 헐크 코앞에 자리를 잡았다. 수없이 사진을 본 탓인지 눈앞의 바위에 루트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많은 팀들이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를 등반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등반을 시작하기로 합의되어 새벽 4시에 어프로치를 시작할 요량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잠을 청했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영훈이 형은 쿨쿨 잘만 잔다. 예정대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가볍게 식사하고 새벽 5시쯤 헤드랜턴를 켜고 등반을 시작했다. 5피치에 오전 10시 반쯤 도착할 정도로 속도가 아주 좋았다. 하지만 전체 구간 중 가장 어려운 6피치에서 시간이 굉장히 지체됐고, 그 위의 7, 8피치 역시 어렵기도 하고 체력적으로 지쳐 등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결국 루트의 정상인 8피치에는 오후 2시쯤 도착했다.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의 마지막 8피치를 마친 필자.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의 마지막 8피치를 마친 필자.

포지티브 바이브레이션스는 대부분의 피치가 5.10급으로 중간 중간 5.11a 구간이 섞여 있다. 등반을 하는 내내 가이드북이나 온라인의 등반기록에서 이 루트를 일컬어 ‘unrelenting(끊임없는, 가차 없는)’이라고 표현한 것이 십분 이해가 됐다. 루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디 하나 편하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피치마다 등반거리가 50m씩은 되고 크랙이 이어지다보니 확보물도 많이 가져가야 해서 장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피치마다 확보지점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직접 확보지점 설치를 해야 하다 보니 등반하면서도 장비의 운용을 계속 신경 써야 했다. 당장 필요해서 가진 장비를 모두 설치해 버리면 확보지점을 설치하기 곤란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피치별로 쉬운 구간 없이 일정한 난이도를 유지하고, 볼트도 하나도 없기 때문에 확보물 설치가 부실한 지점에서는 심적인 부담감이 늘어난다. 실제로 6피치에서 크럭스인 5.11a 핑거크랙에 도착하자 사이즈가 맞는 장비가 없어 곤욕을 치렀다. 장비를 챙기지 않은 건 시간도 절약하고 동시에 내 나름대로 한계에 도전해 보자는 판단이었다. 결국 등반 도중 크게 추락해서 시간도 더 잡아먹고 체력과 정신을 모두 갉아먹는 결과가 됐다.

그 위로도 어려운 구간이 계속됐다. 루트 정상에 도착해서도 인크레더블 헐크의 정상까지 두 시간 넘게 걸렸다. 레드 다이히드럴과 여러 루트가 합류하는 지점까지 어려운 클라이밍 다운과 쉬운 클라이밍을 4피치 더 했다. 루트들이 만나는 안부에서 다시 레드 다이히드럴을 따라 2피치를 더 등반하면 인크레더블 헐크 정상이다. 정상에는 늘 그렇듯 내 마음 외엔 아무것도 없다.

고도의 영향으로 한 동작, 한 동작을 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거의 12시간을 헉헉거리며 등반한 끝에야 정상에 올랐고 이후 하산하는 데 2시간 정도 걸렸다. 하강을 마치고 만신창이가 되어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다 돌아보니 벽 전체가 석양을 받아 붉게 타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얗던 벽이 붉게 타는 것을 보니 ‘밥값은 했구나’ 하는 뿌듯함과 크랙을 기어오르느라 혹사된 손발의 통증이 함께 밀려왔다. 당분간 크랙은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다.

하강을 위해 걸어내려 가는 능선길.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강 지점이 나온다.
하강을 위해 걸어내려 가는 능선길.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강 지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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