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ㅣ옛 문헌에 나오는 금정산] <삼국유사> 의상의 화엄10찰에 금정산 첫 등장

입력 2019.11.06 10:26

이후 고려시대까지 전혀 언급 없어…조선 들어 모든 지리지에 ‘금샘신화’ 언급

금정산金井山(801.5m)은 역사적으로 여느 산 못지않게 오래된 듯 보이면서도 역사의 전면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 더욱이 왜구가 한반도로 침입하는 전초기지로서 많은 난리를 겪었을 법한데 이에 대한 기록이 조선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야와 왕래한 기록은 있지만 금정산과 직간접 관련된 기록은 없다.
   
금정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권4 의상전교조에 등장한다.
‘(중국 유학 간 의상이 귀국하여 밀단법密壇法을 설치하고 기도하여 국난을 면하게 하였다. 이에 의상이 태백산에 돌아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의상은 (조정의 뜻을 받들어) 이에 열 곳의 절에 교를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金井山의 범어사, 남악의 화엄사 등이 그것이다. (후략)’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범어사의 역사는 한반도의 웬만한 사찰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범어사를 있게 한 금정산과 관련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기 어렵다. <삼국유사> 기록으로 범어사는 한국의 화엄 10찰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고려사>까지 어느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려사>에서는 차령 이남 산세는 배덕하므로 인심도 비슷하다며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 무등산이나 나주 금성산 등은 <고려사>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반면 경상도 지역은 거의 언급이 없다. 오히려 매우 역설적이다. 경상도 지역의 지방 호족은 중앙정부에 매우 순종적이었고 난리가 전혀 일어나지 않아서 기록할 게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판단까지 할 정도다. 신라시대의 화엄십찰조차 불교국가인 고려시대에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 호기심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기록은 더더욱 없어 궁금증만 자극할 뿐이다. 단지 역사적 사실을 분석해서 ‘경상도 지역은 순종적이고 난리가 일어나지 않은 평화적인 지역’으로 짐작할 뿐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금정산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23권 동래현 산천조에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마루에 3장丈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자이며, 깊이는 7치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이렇게 그 산을 이름 지었고, 그로 인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梵魚寺라 불렀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 ‘금정산 돌우물(석정石井)은 동래현 서북쪽에 있다. 산꼭대기에 세 길 정도 높이의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높이는 7척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며, 그 아래에 범어사가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금정이라는 산 이름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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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둘레길.
정상 고당봉 아래 남근석에 있는 금샘 눈길
금정산 지명유래와 함께 범어사 창건과 관련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범어사 창건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1700년에 편찬 간행한 목판본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을 참고하면 된다.
‘범어사는 당나라 문종 태화太和 19년 신라 흥덕왕 때 창건했다. 당시 왜인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 했으므로 대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을 청하여 화엄신중기도를 할 것을 권했다. 신인은 “태백산 속에서 의상이 3,0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들이 항상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또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다. 그리고 대왕이 의상을 청하여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했다. 왕이 그대로 했더니 왜선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의상을 예공대사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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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범어사창건사적>에서 보여 주는 시대적 오차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5년) 때라고 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범어사 창건연대를 67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의 150여 년 차이난다. 더욱이 의상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생몰연대를 대략 625~70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 후 당이 신라를 다시 침범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할 즈음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이같은 사실을 간파하고 부랴부랴 귀국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로 미뤄볼 때 문무왕 10년(670) 쯤으로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흥덕왕 때와는 너무 동떨어진 시기다. 범어사의 유물들도 대부분 신라양식을 띠고 있다.
창건내용의 진위여부와 시대적 오차에도 불구하고 신라 화엄십찰 중의 하나이고,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로서의 중요한 가람이 된 범어사라면 이후의 역사에도 제법 등장할 만한데 금정산은 수 백 년간 더 이상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범어사라는 명칭은 금빛 물고기金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금샘에서 놀았다 하여 명명된 금정산 자락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창조신화와 역사성이 가미된 범어사 창건에 얽힌 재미있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지리지에 ‘금정’과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고,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대부분 금정산성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조선 숙종 때 외침과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전국에 산성을 일제히 정비 작업하는 일환으로 금정산성도 완공했다. 둘레길이만 18km에 가까운 명실상부 국내 최대 규모였다. 숙종 때 완공했지만 실제는 고려 이전 가야시대부터 있었던 산성을 증축 보강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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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고당봉 바로 아래있는 남근석 끝에 금샘이 있다.
1700년 이후 산성 축조, 마을도 형성된 듯
금정산성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첫 기록은 효종 6년(1655)에 ‘임의백이 동래부사가 되어 금정산에 성을 쌓아 부府의 소재지를 옮겨 설치할 것을 청하고, 또 기장과 양산을 동래에 합하여 하나의 큰 진鎭으로 만들기를 청하니, 상이 먼 지방의 형세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비국으로 하여금 감사 남선에게 묻도록 했다. 이때 남선이 치계하기를 “산세가 몹시 험준하여 산 위에는 겨우 한 가닥 좁은 길이 있을 뿐으로 비록 올라가 두루 살펴보고자 하여도 형세상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산의 형세는 좌우가 기울어져 있어 오르내리기가 곤란하니, 성을 축조하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고 하니 (중략) 그대로 따랐다’고 나온다. 당시 금정산은 지금과 같이 산성 내부에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산성마을은 1700년 이후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에도 산성 축조건조차 합의 못 하고 오락가락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여전히 보이고 있다.
몇몇의 신하가 조정에 금정산성 축조를 건의한 뒤 숙종 28년(1702) ‘경상도 관찰사 조태동이 동래는 바다를 방비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해적이 침입하는 첫 길목인데, 조그마한 성도 없어서 소홀하다 하여 금정산성을 쌓기를 청하니 윤허允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금정산성은 바로 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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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에 걸터 앉아 한반도 내륙에서 가장 빠른 일출을 맞고 있다.
이듬해 숙종실록에는 ‘병조 참지 조태동이 상소하여 금정산성의 편의를 조목별로 진달하니, 비국備局에 내렸다. 조태동이 일찍이 경상 감사가 되어 금정산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는데, 쓸데없는 곳에 재력을 낭비하고 성첩만 낮아지게 됐다. 일이 끝나기도 전에 과장하여 치계함으로써 일을 맡은 사람들로 하여금 분별없이 은상을 받게 하니 영남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는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금정金井’과 ‘범어사梵魚寺’가 뚜렷이 등장한다. 금정산과 금정은 그 의미상 조금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금정이란 명칭은 산으로서보다는 신화적 의미를 강조하는 듯하다. ‘금정의 신화’를 은연중 암시한다.
금정산은 금정의 신화를 지닌 생명의 산인 동시에 의상의 화엄십찰을 보유한 역사성을 지닌 산으로서 의미 있는 산이다. 정상 고당봉 아래 억새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11월, 억새를 즐기면서 금샘을 찾아 그 신화를 살펴보고, 화엄십찰 범어사를 둘러보면서 그 역사성을 느껴보는 것도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하는 일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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