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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백두대간 에코 트레일ㅣ46~47구간 석병산 르포] 구절초로 핀 자병산을 위한 초혼가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주민욱 기자
  • 입력 2019.11.1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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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병풍을 두른 석병산 지나 화란봉 넘어 닭목재까지 32㎞

운무에 휩싸인 석병산 정상을 오른다. 여백이 많은 그림인 듯 몽환적인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도 산행의 즐거움이다.
운무에 휩싸인 석병산 정상을 오른다. 여백이 많은 그림인 듯 몽환적인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도 산행의 즐거움이다.

가슴에 구멍 난 산이 있다. 바위로 병풍을 두른 석병산石屛山이다. 석병산에는 백년해로를 기약한, 아니 수 천 년을 함께 한 배필이 있었다. 자줏빛 병풍산이란 뜻의 자병산紫屛山. 석병산·자병산이란 이름처럼 억겁의 세월을 함께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으나, 이제 자병산은 없다.

석회암 광산으로 목이 잘리고, 몸통이 파헤쳐져 나가는 모습을 석병산은 바라만 봐야 했다. 석병산의 돌 가슴은 타 들어가 결국 구멍이 생겼다. 자병산은 예부터 이곳에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올리던 산. 기우제 후에는 어김없이 비가 왔다고 한다. 석병산은 극에 달한 슬픔을 산불로 표출하고 있다. 2000년 동해안 산불, 2005년 낙산사 산불, 2019년 강원도 산불 같은 대형 산불로 자병산을 위한 초혼가를 부르고 있다. 대간꾼들 입에 오르내리는 근거 없는 이야기지만, 절제를 모르는 물질만능주의로 사라진 산을 생각하면 흘려들을 얘기만은 아니다.

블랙야크 허영섭 셰르파가 듬직한 모습으로 산행을 이끈다. 그는 20~30㎞는 걸어야 몸이 개운하다고 말하는 종주 산행 마니아다.
블랙야크 허영섭 셰르파가 듬직한 모습으로 산행을 이끈다. 그는 20~30㎞는 걸어야 몸이 개운하다고 말하는 종주 산행 마니아다.

백봉령·백복령 정확한 이름은?

백복령에서 닭목재까지 32㎞를 이틀에 나눠 걸을 계획이다. 익숙한 사람들과 백복령에서 반가운 악수를 나눈다. 부산에서 온 블랙야크 허영섭 셰르파와 최경순씨(부산벚꽃산악회), 김천의 김찬일 셰르파, 의정부에서 온 김강은씨다. 힘든 산행을 함께한 사람은 금방 친해진다. 산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덕분이기도 하다.

이제 백두대간 고개들이 낯설지 않다. 백복령, 삽당령, 닭목재 같은 이름만 들어도 숲 향기가 끓어오르며 당장 산행을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원초적인 귀소 본능을 자극하는 추억의 힘 같은 것이 있다. 백복령에 닿자 안도감이 든다. 할머니 냄새 같은 향이 난다. 무릎베개하고 듣는 할머니의 옛이야기처럼 날것의 바람이 밀려오고 밀려간다. 

이곳은 <택리지>에는 백봉령白鳳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와 <여지고>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했다. 지금도 백복령·백봉령 모두 불리고 있지만, 산림청에서 세운 표지석과 지도는 백복령으로 적혀 있다.

산길은 사라진 자병산을 우회한다. 산길에 집중하다 보니 자병산 구간을 지나 생계령이다. 자줏빛 병풍 바위산을 추억하고 있기에는, 갈 길이 멀다. 오늘 18㎞를 가야 한다. 빽빽한 신갈나무숲을 오른다. 경쟁이 치열해 위로 자라지 않으면 햇볕을 받을 수 없기에, 거목이 될 사이 없이 위로 뻗었다.

짙은 조릿대 숲을 걷는 김강은씨와 최경순씨, 허영섭 셰르파. 이번 구간은 조릿대 숲이 많았다.
짙은 조릿대 숲을 걷는 김강은씨와 최경순씨, 허영섭 셰르파. 이번 구간은 조릿대 숲이 많았다.

가풀막을 헉헉 거리며 넘어서자 장군마냥 위엄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신갈나무가 점령한 참나무 숲에서 친족 몇을 이끌고 제공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공존할 수는 없을까. 소나무가 조금만 조화로운 성품을 지녔다면 이렇게 사라져가지는 않을 텐데. 자연의 흐름은 결국 모든 관계의 결과물이다.

922m봉 바위 끄트머리에 올라서자, 산의 왕국이 숲 위로 떠오른다. 잊고 있던 가을이 주능선에 내려앉았다. 이제 막 시작된 가을 축제의 초대장을 받은 듯 차분했던 마음이 들뜬다. 참회나무 열매가 축포마냥 열매를 예쁘장하게 터뜨리고 바위구절초와 개쑥부쟁이, 자주쓴풀, 과남풀이 흥겨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개쑥부쟁이는 발음이 상스럽지만 그 울림은 고귀해 작지만 씩씩하게 핀 야생화의 진수를 보여 준다.

키 큰 조릿대숲을 지난다. 양손에 쥔 스틱으로 얼굴을 막으며, 방어하는 권투선수처럼 숲을 가른다. 그런데도 웃자란 수풀이 채찍질을 한다. 된비알을 올려칠 땐 ‘여름이 끝나지 않았구나’ 싶다가도, 멈추면 다가오는 서늘한 바람에 가을임을 실감한다. 두 계절을 모두 누리며, 부지런히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체온 관리를 한다.

신갈나무 아래를 조릿대가 빽빽하게 메웠다. 석병산과 석두봉 외에는 트인 곳이 드물었다.
신갈나무 아래를 조릿대가 빽빽하게 메웠다. 석병산과 석두봉 외에는 트인 곳이 드물었다.

석병산 정상이 다가올수록 가스가 짙어진다. 구름 속인 양 앞선 사람이 지워진다. 인간관계도 이렇게 부드럽게 지워졌으면 싶다. 모든 관계를 항상 이웃사촌처럼 유지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것도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약이 될 것 같다.

석병산 정상에 올랐으나 구름 속이다. 어떤 슬픈 기억이라도 다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욱한 가스다. 산꼭대기 바위틈에 핀 구절초와 쑥부쟁이. 마치 자병산과 함께했던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 같다. 정상 아래에는 그 유명한 바위 구멍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구멍 속으로 뾰족한 암봉이 보인다. 자연의 멋진 그림이 은밀하게 숨어 있다. 바위 구멍 모양이 해와 달을 닮았다 하여 ‘일월문日月門’이라 불린다.

두리봉(1,033m)은 경치는 없지만 평상과 벤치가 있어 쉼터로 안성맞춤이다. 배낭을 내려 놓고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니, 짙은 신갈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모습이 미술 작품처럼 멋있다. 그러고 보니 산행이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석두봉 정상에서 풍경을 빠르게 채색하는 김강은씨의 붓놀림
석두봉 정상에서 풍경을 빠르게 채색하는 김강은씨의 붓놀림

만만한 대간은 없다. 끝날 것처럼 끝없이 대간이 이어진다. 부산 ‘여행트레킹’ 밴드에서 백두대간 종주를 이끌고 있는 허영섭 셰르파는 “미쳐야 할 수 있는 것이 대간”이라며, “아무리 쉬운 구간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산의 생김새가 삼지창처럼 생겨 이름이 유래한다는 삽당령揷唐嶺에 닿자 어둠이 마중 나온다.

삽당령 천막 휴게소의 불빛이 반갑다.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여니,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다 안다는 듯 뚝딱 감자전을 부쳐 준다. 5,000원이라 너무 저렴해 기대하지 않았던 감자전이 어찌나 맛있는지,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직접 담근 찰옥수수 막걸리는 걸쭉함이 없어 처음엔 생소하지만 맑은 식감이 부드럽게 갈증을 풀어 준다. 숙소로 이동해 땀내 나는 몸을 씻고 하루를 정리한다.

석병산 정상부. 구름에 가린 경치 대신 바위구절초가 드문드문 피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석병산 정상부. 구름에 가린 경치 대신 바위구절초가 드문드문 피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멈추면 비로소 들리는 낙엽 소리

하늘이 제주도의 투명한 바다빛깔이다. 어제와 다른, 청명한 가을 하늘로 바뀌었다. 쭉쭉 뻗은 낙엽송처럼 길도 편안해 발 디딤 푹신한 산길과 임도가 번갈아 나온다. 862m봉을 넘어서자  나무를 간벌해 시야가 트이는 산불방화선이다. 산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능선의 나무를 간벌한 것이다. 시원한 대간길과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잘 어울린다. 산림청에서 우량종자를 얻기 위해 심었다는 잣나무가 넓은 숲을 이루었다. 곧게 뻗은 잣나무숲 덕분인지 기운도 맑고 편안한 분위기다.

모처럼 나타난 데크계단을 올라서자, 석두봉(982m)이다. 선명한 정상 표지석 너머로 가을이 물들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시끄러워도 낙엽은 어김없이 붉고 노랗게 물든다. 가만히 있으면 몰랐던 소리가 들린다.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싸락” 땅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가 이렇게 큰데도 몰랐다. 여기저기서 떨어지고 있는데, 단풍 색깔만 보고 있었으니, 내 좋은 것만 보았구나 싶다.

블랙야크 셰르파는 어디에 있어도 산행대장다운 분위기가 풍긴다.
블랙야크 셰르파는 어디에 있어도 산행대장다운 분위기가 풍긴다.

본지에 ‘아트하이킹’을 연재하는 벽화가 김강은씨가 재빨리 종이와 물감을 꺼내 가을을 담아낸다. 20분쯤 걸렸나, 빠르게 특징적인 장면을 포착해, 과감한 손놀림으로 그려내는 것이 놀랍다.

속도 내기 좋은 능선이 이어지다가도 짙은 수풀과 조릿대가 나타나, 과속하지 않도록 산행의 리듬을 조절한다. 1006m봉도 화란봉(1,069m)도 경치가 없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실망은 없다. 읍내 분식집에서 사온 김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지나온 산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도 역시 산행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쉽다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길을 주는 것이 대간임을 실감한다.

지형이 닭의 목을 닮았다는 닭목재에 닿자, 바지에 짚신나물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옛날 짚신을 신고 걸으면 미니 밤송이 같은 열매가 유독 짚에 잘 붙었다 하여 유래한다. 멀리 이동해 번식하려는 식물의 지혜가 담긴 열매를 수풀 쪽으로 튕겨낸다. 바람에 흔들리는 구절초가 석병산이 부르는 초혼가인 듯 처연히 나부낀다.

석병산 정상의 일월문 사이로 암봉이 서있다. 바위 구멍이 해와 달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석병산 정상의 일월문 사이로 암봉이 서있다. 바위 구멍이 해와 달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석병산 구간 종주 가이드

당일 산행으로 끊어서 걷기 좋은 구간이다. 백복령에서 석병산 넘어 35번 지방도가 지나는 삽당령까지 17㎞, 삽당령에서 닭목령까지 14㎞이다. 지나온 두타·청옥산 구간에 비하면 비교적 완만하고 고도차가 적어 산행은 쉽다. 하지만 방심하면 언제든 알바로 이어지는 것이 대간종주다. 진행 방향이 90도로 틀어지는 곳이 많고 지능선이 주능선처럼 힘 있는 곳이 있으므로 지도를 수시로 살펴야 한다.

석두봉 정상에 오른 참가자들. 우측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찬일 셰르파, 김강은·최경순씨, 허영섭 셰르파.
석두봉 정상에 오른 참가자들. 우측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찬일 셰르파, 김강은·최경순씨, 허영섭 셰르파.

교통

동해버스터미널과 동해역 앞 광장오거리를 경유하는 15-3번 버스가 하루 2회 백복령을 넘어 정선 임계면으로 갔다가 되돌아 나온다. 동해시 발한동 출발 시간(05:50, 16:38). 삽당령은 강릉과 임계를 오가는 버스가 하루 10회(07:10, 08:10, 09:10, 11:10, 12:10, 13:10, 14:10, 15:10, 17:10, 19:10) 있다. 강릉행 버스(08:40, 09:50, 11:20, 12:20, 13:50, 15:20, 16:50, 19:30, 20:20). 닭목재는 강릉과 왕산면 고단리를 오가는 507번 버스가 하루 3회(06:00, 12:00, 17:05) 운행한다. 고단리 출발 시간(07:20, 13:20, 18:15). 507번 버스 정류소는 강릉역과 강릉버스터미널에 800m 떨어져 있다.    

맛집(지역번호 033)

정선군 임계면은 백복령과 삽당령을 오가는 중간 기점에 있어, 접근이 수월하다. 면 소재지 치고는 비교적 식당이 많고 번화한 편이다. 임계의 추천 맛집은 가림면옥(562-9055)이며 장칼국수(7,000원)와 감자옹심이(7,000원)가 별미다. 장칼국수는 얇게 반죽한 밀가루를 칼로 썰어 면을 내었으며, 매콤한 장소스와 육수에 끓여내 얼큰하다. 옹심이는 감자를 갈아 녹말가루와 섞어 새알처럼 빚어 끓인 강원도 향토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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