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문화인류학<9>ㅣ티베트 낭첸의 밀교 은둔수행] 티베트 은자들은 ‘은둔’을 같이한다

  • 글 오영훈 기획위원
    입력 2019.10.28 11:35

    공산당 탄압 받으면서도 1,000년 전통 이은 밀교…여승 중심 ‘라시 곰파’ 공동체 생활 원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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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시 곰파의 해발 4,400m 암자 지대. 사진 라팔 라데키.
    ‘높은 산, 외딴 곳일수록 은둔수행의 공력이 크다.’
    티베트 불교의 밀교 전통에 전해지는 속설이자 실제 관습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티베트 밀교 은자들은 어떻게 깨달음을 추구하는지 종교인류학적으로 분석해 본다. 사례는 최근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티베트 동부 캄 지방, 중국 칭하이성 남부 낭첸 지역에 위치한 사원인 ‘라시 곰파Lasi gompa’다. ‘곰파’란 티베트인들이 수도원이나 암자를 일컫는 말이다.
    먼저 흔히 오해하고 있는 티베트 불교에 대한 세 가지 고정관념을 수정해야 한다. 첫째는 티베트 불교를 지탱해 온 저력은 수도원 조직이라는 생각이다. 틀린 생각이다. 암자를 중심으로 한 은자 수행이 더 핵심적이다. 은둔 사제 간에 형성된 긴밀한 관계를 통해 불교철학과 수행법을 전수해 왔다.
    두 번째 고정관념은 티베트불교 수도원은 명상을 위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이도 틀렸다. 수도원은 명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수도원은 집단 의례, 강습, 축제 등 마치 학교나 다름없이 바쁘고 소란스럽다. 수도원은 규모가 클수록 사회와 나라에 공을 세우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진정으로 참선을 터득하고 수행자의 길을 가려면 수도원을 나와서 은둔수행의 길을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은둔수행은 오로지 혼자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다. 이것도 틀렸다. 티베트에서 은둔수행은 가족과 지역사회가 직접 참여하며 서로 공덕을 나눠 갖는 조직적인 활동이다. 이 점을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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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시 곰파의 해발 4,400m에 위치한 여승의 암자. 사진 사비에르 하젠보쉬.
    밀라레빠로부터 시작된 은자의 전통
    티베트불교의 밀교전통은 전설적인 티베트 은자 밀라레빠(1052~1135)로부터 시작됐다. 티베트와 남아시아 전역에 퍼진 밀교의 특징은 음주, 성교, 고행 등의 일탈적인 방법을 통해 ‘현생의 육신에서’ 해탈의 완성을 본다는 것이다. 계통을 중시하는 티베트불교에서는 밀라레빠와 같은 성자 숭앙이 수행의 핵심이다. 성자의 전철을 밟음으로써 어느 수행자나 현생 육신의 해탈을 꿈꾸게 된다. 달라이라마와 같은 환생의 교리는 은둔수행에 비해 훨씬 나중에 생겨난 것이다.
    밀라 가문에서 태어난 퇴빠가(밀라레빠의 본명)는 어릴 적 마술을 익혀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등 나쁜 짓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한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인도에서 온 밀교 승려 나로빠(마르빠)의 문하생이 됐다. 쐐기풀만 먹으며 은둔의 고행을 계속하자 몸은 비쩍 마르고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고난도의 ‘나로빠 육성취법(여섯 요가)’에 통달했고 특히 ‘뚬모’를 익혔다. 뚬모는 영열靈熱 또는 ‘배꼽불 수행’으로도 불린다. 몸에서 열이 나 맨살로 눈도 녹여낼 정도다.
    퇴빠가는 추운 겨울도 얇은 무명옷 한 겹(레)으로 보냈다. 그래서 퇴빠가는 ‘무명옷 입은 고행자’라는 뜻의 ‘레빠’를 붙여 밀라레빠로 불리게 됐다. 이후 뚬모에 통달한 은자는 모두 ‘레빠’라고 불렸고, 영력과 정화의 상징이자 밀라레빠의 전철을 제대로 밟고 있는 성인으로 떠받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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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승 암자 내부. 가장 중요한 가구는 나무로 된 큰 의자 세 개로 ‘참선상자’라고도 불리는 ‘곰뜨리’다. 여기에 앉은 채 참선하며 잠도 잔다. 사진 막달레나 마리아 투렉.
    한편 캄 지방의 낭첸 왕국은 1300년경부터 1949년 국민당을 섬멸한 공산당이 티베트로 진격해 1951년 티베트를 합병할 때까지 나름대로 자율성을 유지한 곳이다. 낭첸은 불자들에게 ‘레빠의 고향, 수행자의 왕국’으로 여겨진다.
    캄 지방은 전통적으로 호전적이다. 공산당의 폭압적인 지배에 1958년 캄빠 무장봉기가 일었고, 공산당은 이듬해 군대를 보내 승방을 파괴하고 수많은 라마승과 수도승을 죽였다. 남아 있는 모든 종교적 시설과 문물을 파괴했던 문화혁명(1966~1976)은 이들의 씨를 말리는 과정이었다. 참선이나 순례는 사형에까지도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였다.
    난세의 영웅은 ‘두 번째 밀라레빠’로 불리는 이로 드럽첸 까르노르(1906~1984)다. 그 역시 고행의 수련 끝에 나로빠 육성취법과 뚬모에 통달했다. 그는 20세기의 질곡을 거치면서도 밀교 명맥을 지탱한 위대한 인물로 숭앙됐다. 까르노르는 중국 정부에 체포되어 승복을 벗고, 인민공사에서 집단노역에 처해지는 등 갖은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요가수행을 멈추지 않았고, 문화혁명 이후 덩샤오핑 시대가 오자 다시 곰파를 차리고 설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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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시 곰파의 해발 4,400m 암자 지대. 사진 라팔 라데키.
    세 번째 밀라레빠, 출띰 따르센
    세 번째 밀라레빠의 칭호를 얻은 이는 출띰 따르센으로 드럽첸 까르노르의 제자 중 하나다. 따르센은 칭하이성 남부 낭첸 지방의 산골마을에서 1947년 출생했다. 마오쩌둥 집권기였던 성장기에는 중국어, 마르크시즘을 배워야 했다. 18세에 결혼해 일곱 자녀를 두었다.
    덩샤오핑 집권 초기인 1980년은 칭하이성에서 불교활동 금지가 풀리던 해다. 이때 드럽첸 까르노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따르센은 먼 길을 찾아가 직접 설법을 들었다. 그렇게 직접 찾아가 가르침받기를 몇 년을 반복한 끝에 1988년, 41세가 된 따르센은 스스로 속세를 등지고 수행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후 따르센은 티베트 시짱성에서 5년, 다시 칭하이성 낭첸으로 돌아와 찹띠산을 택해 5년을 은자 수행했다. 아주 외진 곳에 위치한 찹띠산은 산정과 동굴에 각종 술법의 전설이 담긴 곳이었다. 그러나 공산당 정권이 순례나 수행을 심하게 통제한 까닭에 당시에는 인근 주민들이 가끔 순례를 위해 찾아오는 곳이었다.
    처음에 따르센은 홀로 해발 4,400~4,800m 인근에서 동굴을 전전하고 때로는 바위 위에서 지냈다고 한다. 육중한 덩치에 강건했던 몸은 밀라레빠와 마찬가지로 바짝 말라 갔다. 그의 제자들은 따르센이 당시 바위와 돌의 정기를 먹고 건강을 유지한다는 ‘쭐렌’으로 5년의 은둔생활을 보냈다고 얘기한다. 마침내 따르센의 은둔수행은 결실을 보아, 육성취법에 통달했고 특히 눈을 녹여내는 뚬모 징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설법을 청해 듣는 이들이 많아졌다. 따르센은 스스로 흰 무명옷을 입고 레빠의 지위를 자처했다. 밀라레빠가 쓰던 붉은 띠까지 둘렀다. 특히 바위에 손자국을 남기는 행적도 보여 놀라움을 자아냈다. 사람들은 따르센이 하늘을 날기까지 한다고 추켜세웠다.
    2002년 독자적인 은둔수행을 마친 따르센은 3년 뒤인 2005년 찹띠산에 라시 곰파 명상학교를 세운다. 추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족, 친지가 제자로 입문했다. 이어 마을 사람, 나중에는 시짱성이나 저 멀리 베이징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명상학교는 도로, 다리를 건설하는 등 지역사회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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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시 곰파의 해발 4,800m에 위치한 수행 오두막. 출띰 따르센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크기다. 내부에는 큰 알람시계, 방문객 선물용 사탕 한 사발이 있다. 바닥에는 양가죽이 깔려 있다. 밖을 향한 유리창 하나도 달려 있다. 사진 막달레나 마리아 투렉
    해발고도 높을수록 불도 영력↑
    라시 곰파는 여승들의 수행도량이다. 은둔수행은 남녀평등적인 성격으로 인해 여성들의 인기를 끌었다. 성별은 물론 나이, 민족배경, 교육배경 등도 문제 되지 않았다.
    당국도 은둔수행에 대체로 우호적이어서 라시 곰파를 ‘교육기관’으로 인가해 줬다. 수도원에 비해 덜 조직적이고 덜 집단적이기 때문에 정치적 조직이라는 의심을 살 일이 없었다. 지방관청이 라시 곰파 개발을 돕기도 할 정도였다.
    라시 곰파는 해발고도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아랫부분인 해발 4,400m 일대는 복잡하게 섞여 있다. 암자 40여 곳에 150여 명의 여승이 지낸다. 주로 10대 소녀가 많지만 훨씬 나이가 많은 이도 드물지 않다. 이들은 대개 따르센의 설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찾아왔다. 보통 두세 명 자매나 친척이 함께 사용하는 암자는 웃음이나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은자 수행을 결심한 이는 먼저 따르센에게 허락을 받고, 자기가 지낼 암자를 짓는다. 그렇게 초기 정착 비용은 총 2만 위안(340만 원)가량 소요된다. 법복 한 벌이 250위안(4만2,000원), 매달 생활비가 100위안(1만7,000원)가량이다. 비용은 대개 부모가 지원해 준다.
    설법당도 있어 종종 강습이 이루어진다. 따르센의 출가하지 않은 모친, 동생들, 친척들도 올라와 있다.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이도 따로 있다. 주로 후원자, 정부관료 등과 위성전화로 통화하며 따르센의 주요 대외행사를 관리한다. 건물 공사를 도맡는 일꾼들의 천막도 있다. 인부는 총 15명으로 대부분 인근 마을에서 무보수로 자원한 이들이다.
    13세 미만의 학생도 10여 명 지낸다. 이모, 사촌, 누나 혹은 언니네 암자에서 함께 지낸다. 티베트어와 명상 기초를 학습하는데, 배움을 마치면 대부분 더 깊은 은둔수행을 떠난다. 수행자를 만나러 가족이 찾아오는 경우도 잦다. 목동 가족은 야크떼를 데려오기도 한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은자도 있다.
    해발 4,800m 일대의 수행 환경은 확연히 다르다. 항상 조용하다. 이곳의 가장 큰 건축물은 2층으로 된 드룹캉 한 채뿐이다. 나머지는 작은 은둔처용 움막(참캉) 세 곳, 다섯 곳의 돌 오두막뿐이다. 방문객이 이곳에서 큰 소리로 떠들면 어딘가의 움막에서 ‘팟!’하는 고함을 듣기 십상이다. 현상에 얽매이지 않으려 은둔자가 내지르는 일종의 밀교 기합이다.
    참선에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더 높고 더 외진 곳을 찾아간다. 높이와 불도의 영력이 비례하는 셈이다. 이는 티베트의 고대 성산 개념이나 사리탑 건축양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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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띰 따르센이 바위 위에 남긴 것으로 회자되는 손바닥 자국. 사진 라팔 라데키.
    은둔수행은 공동의 길
    은둔수행은 고통의 길이지만 고행 자체가 수행의 목적은 아니다. 고행은 은둔을 택한 자연스런 결과다. 참선에 집중해 홀로 산중생활을 이어나가기란 쉽지 않다. 식량, 의약품 등 각종 보조가 없다. 축축한 동굴에서는 불을 피우는 것부터 큰 고역이다.
    은둔을 택하는 이유는 세속의 도덕 타락과 불경을 피하고자 함이다. 여기서 핵심은 가족관계를 끊고 세상의 관심을 버리는 것이다. 출띰 따르센은 이를 두고 “따뜻한 집에서 참선하면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참 수행을 원한다면 다 저버리고 모든 편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고행 자체가 수행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독신, 빈곤, 금식은 일상이다. 또 ‘두탕가’라 불리는, 절대 몸을 펴지 않고 잠을 자는 생활도 널리 퍼져 있다. 눕지 않으려고 낮은 천장에 못을 박아 머리카락을 묶어 놓기도 한다.
    은둔 초보자는 여럿이 함께 참선의 기초부터 배운다. 참선 지도사(드루뾘)로부터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참선 교육을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후 은둔지를 옮겨가며 참선의 강도를 높여 나간다.
    수년 혹은 평생에 걸친 은둔 생활은 주변의 도움 없이는 어렵다. 가족, 친지, 이웃들로부터 보조를 받는 경우가 많다. 낭첸은 무척 가난한 지방으로, 여름 한철 동충하초 채집으로 생계를 잇는 경우가 많다. 여승들은 여름이면 마을로 내려가 동충하초 채집을 다녀오기도 한다. 가계를 돕거나 본인의 일 년 생활비를 벌어오려는 목적이다.
    수년 혹은 평생에 걸친 은자의 길은 참으로 깊고도 깊은 내면으로의 여정이다. 그러나 자아의 탐구가 배타적일 이유는 없다. 라시 곰파의 사례는 은둔수행도 여럿이 함께 쌓아가는 공동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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