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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해외 트레킹ㅣ알프스 융프라우<下>] 엔도르핀 펑펑 솟는 풍경의 천국!

글 사진 신준범 기자
  • 입력 2019.11.1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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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등산인에게 안성맞춤 당일 트레킹 쉬니케플라테~휘르스트 하이킹 16㎞

16㎞의 트레킹을 마무리하는 느낌표 역할을 하는 휘르스트의 전망대.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기념사진 명소다.
16㎞의 트레킹을 마무리하는 느낌표 역할을 하는 휘르스트의 전망대.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기념사진 명소다.

답답할 땐 그 순간을 떠올린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 포근했던 오후의 마지막 햇살, 작품처럼 솟은 아이거·묀히·융프라우 연봉,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이 푹신한 침대 앞 창문에 모두 담겨 있었다. 방에 들어왔을 때, 다른 세상에 접속한 것 같았다. 소박하고 편안한 공간, 여행자의 빗장이 풀렸다.

흙먼지 쌓인 등산화 끈을 풀고, 꽉 조였던 등산복 바지끈을 풀고, 냄새 나는 양말을 벗고,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창밖으로 딴 세상이 펼쳐졌다. ‘멋진 풍경’이란 말은 이 순간을 담기엔 부족했다. 천국을 잠시 엿보았다. 한없이 평화로운 지금, 복잡한 서울에서 최대한 먼 곳에 와 있었다. 세상을 살다가 힘겨울 때, 지금을 되새김질 할 수 있게 순간을 꼭꼭 눌러 담았다.

트레일의 최고봉인 파울호른(2,681m)이 삼각형으로 좌측에 솟았다. 정상을 자세히 보면 산장이 있다.
트레일의 최고봉인 파울호른(2,681m)이 삼각형으로 좌측에 솟았다. 정상을 자세히 보면 산장이 있다.

이곳이 천국인가? 쉬니케플라테

17시 53분 막차를 탔다. 열차는 텅텅 비어 우리 일행이 전세를 낸 듯했다. 빌더스빌Wilderswill에서 쉬니케플라테Schynige Platte로 가는 열차에서도 달콤한 풍경은 넘치도록 지나갔다. 1893년 개통한 융프라우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의 노선이지만, 쉬니케플라테만 오가는 탓에 짧은 ‘꼬마열차’다. 해발 1,967m에 자리한 쉬니케플라테는 열차로만 올 수 있으며, 호텔이 단 하나뿐이다. 호텔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막차가 끊어지기 전에 빌더스빌로 내려가야 한다. 산장에 가까운 호텔 쉬니케플라테는 융프라우 트리오의 맞은편에 있어, 융프라우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경치로 꼽을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스 신화 같은 거대한 풍경 속에서 클래식한 밤이 지나자, 이번 여행에서 가장 화창한 아침이었다. 며칠간 걸었던 하이킹 코스가 식욕을 돋우기 위한 에피타이저라면 오늘이 메인 요리다. 쉬니케플라테에서 휘르스트First까지 16㎞의 장거리 트레킹이다. 해발 1,000~2,700m를 오가는 코스로, 관광객이 아닌 산山 사람을 위한 제대로 된 알프스 당일 산행이다.

먼 길을 가는 만큼 일행의 얼굴에 설렘과 약간의 긴장이 흐른다. 월간<山> 여행팀을 통해 모객된 3쌍의 부부, 김동득·이혜경, 윤희영·김미경, 송해영·김영희씨가 스틱 길이를 조절하고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긴 산행을 준비한다.

멀리서 본 휘르스트 전망대.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이용되며 전망대 좌측 아래에 곤돌라 정류소가 있다.
멀리서 본 휘르스트 전망대.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이용되며 전망대 좌측 아래에 곤돌라 정류소가 있다.

650종의 야생화가 천상화원을 이룬 것으로 이름난 쉬니케플라테에 올라서자 광대한 알프스 전경이 무딘 아침의 몸과 마음을 단번에 깨운다. 하이킹 시작과 동시에 풍경에 압도되며, 긴장감은 사라지고 소풍 가는 초등생처럼 웃음 가득하다.

능선엔 키 큰 나무가 적어, 시야가 확 트여 있다. 융프라우 트리오가 우측으로 신화처럼 펼쳐지고, 앞에는 영웅 같은 첨봉들이 박진감 넘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힘 있게 하이킹을 이끈다. 오르막을 올라 능선의 날등에 서자, 반대편 경치가 반전처럼 나타난다. 1,000m는 될법한 낭떠러지 아래에 인터라켄 시내와 브리엔츠호수가 그림처럼 깔려 있다.

쉬니케플라테 부근의 능선에서 본 인터라켄과 브리엔츠 호수.
쉬니케플라테 부근의 능선에서 본 인터라켄과 브리엔츠 호수.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과 멀리 만년설산, 초록의 공룡 등골 같은 능선이 감각의 천국으로 이끈다. 걸을수록, 새로운 풍경이 나타날수록, 몸 안의 엔도르핀이 마구 분출된다. 국내산 종주가 뚝배기 장맛이라면, 알프스는 7성급 호텔 식사다. 호텔 식사가 양이 적어 아쉽다면, 무한정 먹을 수 있는 뷔페처럼 종일 걸어도 끝없이 장관이 펼쳐진다.

고전적으로 융기한 바위봉우리들이 이정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당장이라도 말을 탄 기사가 나올 듯한 유럽 고성을 닮았다. 오르내림이 많아 아이거 트레일이나 파노라마 하이킹에 비해 확실히 난이도가 높다. 쏟아지는 뙤약볕까지 합세하니 힘들 법하지만 풍경의 신세계가 마음에 회오리를 계속 일으키는 탓에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

트레일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멘들레넨 산장. 맥주와 차, 생수, 식사를 판매하며 숙박도 가능하다.
트레일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멘들레넨 산장. 맥주와 차, 생수, 식사를 판매하며 숙박도 가능하다.

청량감 끝내주는 산장 생맥주!

의외로 연세 지긋한 백인 노년층이 많다. 세월의 때 묻은 장비와 균형 잡힌 하체 근육을 봐선 베테랑 하이커들임에 틀림없다. 한국 사람은 전혀 없고, 간혹 마주치는 일본 단체 등산객들이 유일한 동양인이다. 흰색과 붉은색으로 바위에 표시한 트레일 안내 표시가 자주 보이는데, ‘중등산화를 신어야 하는 중상급자를 위한 코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위험하거나 어려운 곳은 없다.

그늘 없는 뙤약볕 사면을 치고 오른다. 허기와 갈증이 절정에 이를 때쯤  오아시스 같은 산장이 나타난다. 해발 2,344m에 자리한 멘들레넨산장Manndlenen Berghaus이다. 생맥주를 마시는 유럽 하이커들의 모습에 주저 없이 500㏄ 맥주를 주문하자, 인상 좋은 스위스 아주머니가 “마운틴 워터”라며 시원한 맥주를 내어준다. 한모금 들이키자 “캬”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며, 흐물흐물했던 알프스 풍경이 안경을 쓴 듯 선명하게 보인다.

빌더스빌역의 고풍스런 열차. 쉬니케플라테만 왕복하는 열차다.
빌더스빌역의 고풍스런 열차. 쉬니케플라테만 왕복하는 열차다.

트레일 최고봉인 파울호른Faulhorn(2,681m)을 가기 위한 급경사의 시작이다. 지나온 산장은 금세 점처럼 작아지고 새로운 거대한 광경이 가슴을 헤집고 들어온다. 파노라마로 트인 능선이라 곳곳이 뷰포인트다. 상어지느러미처럼 삼각을 이루며 황금비율로 솟은 파울호른이 눈앞에 있다. 꼭대기에는 1830년에 지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산장이 있다. 그 옛날에 2,681m의 산 정상에 산장을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코스의 빼어남과 스위스 사람들의 집념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한 알프스 자연환경을 관광자원으로 만든 스위스인의 지혜를 실감한다.

정상은 트레일 경로 양방향에서 오를 수 있는데, 우회해서 뒤쪽 임도로 올랐다가 내려오는 것이 효율적이다. 정상에는 막강한 고도감의 경치가 선물처럼 드러난다. 종일 보았던 풍경들을 집약시켜 놓았다.

웅장한 풍경이 널려 있어 종일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월간<山></div> 50주년 트레킹에 참가한 참가자들. 좌측부터 김영희, 이혜경, 김미경, 송해영, 윤희영, 김동득씨.
웅장한 풍경이 널려 있어 종일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월간<山> 50주년 트레킹에 참가한 참가자들. 좌측부터 김영희, 이혜경, 김미경, 송해영, 윤희영, 김동득씨.

파울호른을 지나면 하산길에 가까운 여정이다. 2,168m의 휘르스트까지 고도를 낮춘다. 신의 연못인양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바흐호수Bachsee(2,265m)를 지나자, 아이거 북벽이 저 멀리서 마중 나온다. 휘르스트에서 이곳 호수까지 관광 온 한국 단체 관광객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산행이 끝난 느낌이지만 임도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영웅 같은 거인들이 만년설산이 되어 웅장하게 끝나지 않은 전설 같은 이야기를 힘 있게 끌어간다.

휘르스트에 닿자 손오공의 근두운筋斗雲처럼 뭉게구름이 나타나 융프라우 트리오를 슬쩍 가린다. 구름으로 손을 흔들어 주는 것만 같아,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기가 아쉽다. 엔도르핀 펑펑 솟는 풍경의 천국, 융프라우를 떠난다.

신의 연못인양 고즈넉이 자리 잡은 바흐호수를 향해 걷는다. 웅장함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섞여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신의 연못인양 고즈넉이 자리 잡은 바흐호수를 향해 걷는다. 웅장함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섞여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하이킹 정보

쉬니케플라테와 휘르스트를 잇는 16㎞의 장거리 트레일. 그림 같은 풍경이 많아 후다닥 5~6시간 만에 끝내기는 아까운 트레일이다. 아침 일찍 출발해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며 산장에서는 충분히 쉬고 현지 음식도 맛보는 것이 실속 있는 하이킹이다.

쉬니케플라테에서 출발할 때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능선을 타는 알파인가든 코스가 천상화원을 거치는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얼마 안 가 메인 트레일로 합류한다. 트레일 중간의 안부에 자리한 멘들레넨산장은 식사와 숙박이 가능하다. 생맥주 500㏄ 한 잔에 6스위스프랑(7,000원)이다. 파울호른 정상의 산장과 휘르스트의 산장에서도 식사와 숙박이 가능하다. 휘르스트에서는 곤돌라를 타고 그린델발트(1,034m)로 내려갈 수 있다.

별도의 등고선 등산지도가 없더라도, 융프라우 철도에서 제공하는 한글 가이드북의 하이킹 지도로도 길 찾기에 어려움이 없다. 전체적으로 거리가 길고 오르내림이 많지만, 8~10시간 동안 걸을 수 있는 지구력과 미들컷 이상의 등산화가 있으면 충분히 갈 수 있다.

5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걸을 수 있는 트레일이며, 산장호텔 쉬니케플라테도 그 기간에만 운영한다. 저녁 코스 요리와 숙박·조식을 포함한 가격은 1인 기준 125스위스프랑(15만 원)이다. 산장 홈페이지(hotelschynigeplatte.ch)

쉬니케플라테행 열차와 휘르스트에서 그린델발트행 곤돌라, 그린델발트에서 인터라켄행 열차는 ‘여름 VIP패스’를 구매할 경우 무제한 이용 가능하다. 인터라켄 내 버스와 유람선도 이용 가능. 동신항운 홈페이지(jungfrau.co.kr)에서 할인쿠폰을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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