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ㅣ장기 기증자 한라산 산행]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행복한 ‘신기한 산행’

입력 2019.12.03 09:46

장기기증운동본부 주최… 얼굴 모르는 환자에게 대가 없이 신장·간 기증자와 받은 이 같이 올라

이미지 크게보기
‘신기한 산행’ 행사의 일환으로 제주 에코랜드를 찾은 신장기증인과 이식인들.
신기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콩팥(신장) 두 개 중 하나를 떼어 준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돈 한 푼 받지 않고서 말이다. 신장을 기증한 사람들의 한라산 산행, 이 말을 줄인 ‘신기한 산행’에 동행했다. 
‘신기한 산행’은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가 주최하고 한화생명이 후원한 신장 기증자를 위한 산행이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생존 시 타인을 위한 신장 기증에 동참한 전국 970여 명의 기증자 중 52명이 참가해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렸다. 
첫째 날 전국 각지에서 제주도에 집결, 서귀포에 자리한 라파의 집(만성신부전 환자를 위한 휴양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둘째 날 한라산 산행, 셋째 날 사려니 숲길과 에코랜드 관광을 하는 일정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해병대 출신의 표세철(우측) 목사는 신장과 간을 모두 기증했다. 석정호(좌측) 목사는 장애인 공동체를 운영하는 특수목회자이며 2013년 신장을 기증했다.
자신과 살아 있는 아들, 죽은 아들, 부모님 모두 기증
12일 아침 7시, 52명의 기증자가 성판악에서 남한 최고봉을 향해 출발한다. 느린 걸음으로 숲에 드는 오재철(80세)씨는 장기기증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 십이지장궤양으로 고생하던 그는 ‘이러다 곧 죽겠다’며 ‘죽기 전에 좋은 일하자’는 심정으로 신장을 기증했다.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은 놀랍게도 복을 가져다주었다. 암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았던 궤양이 완쾌된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00년 둘째 아들이 사고로 뇌사 상태에 이른 것, 충격적인 슬픔이었지만 생전 아들이 “죽거나 뇌사상태가 되면 장기를 기증해 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장기를 기증해 여러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갖게 했다.   
그의 부친이 86세로 소천했을 때 각막을 기증했으며, 모친이 2004년 숨을 거두었을 때도 시신기증을 하여 의학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큰아들도 오씨의 영향을 받아 2005년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얼굴도 모르는 환자에게 신장을 주었다. 원래 이식수술 비용은 이식 받는 사람이 부담해야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환자라 KBS ‘사랑의 열매’ 프로그램을 통해 모금해 이식수술을 마쳤다. 
살아 있는 아들과 사고로 죽은 아들, 부모까지 집안 전체가 사람을 살리는 장기기증에 동참했음에도 그는 “건강도 찾고 남도 돕고 그러는 거지요”라고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한다. 
재단법인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이하 본부)는 이런 선의의 기증 신청을 받아 조직 검사를 한 후 적합한 이식 대기 환자에게 신장 이식 수술을 연계해 주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헌혈 횟수만 730회에 이르며 신장과 간을 기증한 손홍식씨(오른쪽). 신장 기증인과 이식인의 모임인 새나회 서울지부 엄해숙 회장과 백창전 총무(왼쪽). 산행과 봉사를 습관처럼 실천하는 여성 콤비다.
‘내 신장 기증할 테니 동생 살려 달라’
인천에서 온 장점예씨는 어렵게 신장기증을 했다. 그녀가 신장을 기증한 1996년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응원을 해주기는커녕 냉랭한 시선이 많았다. 회사의 사장이 신장 기증 수술을 위한 휴가를 허락해 주지 않아, 어렵게 무급휴가를 받아 치렀다. 그러나 그 사장의 아내가 장기기증을 받아야 할 정도로 위중한 병에 걸렸다. 장기기증자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험한 사장은 장씨에게 “그땐 내가 잘못했다”며 후회스런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장점예씨는 형제만 무려 14명이었는데 가난했던 집안 환경 탓에 8명의 형제를 잃었고, 6명만이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남동생이 췌장암에 걸린 것.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동생을 살려 달라”고 절실히 기도했고, “내가 먼저 장기를 기증할 테니 살려 달라”고 빌며 신장을 기증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실천만이 동생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던 그는 주저 없이 본부를 통해 모르는 사람에게 기증했다. 절실한 마음에 하늘이 감응했는지 완치된 건 아니지만 남동생은 지금껏 살아 있다. 장씨의 딸도 “엄마처럼 살고 싶다”며 몇 년 전 타인을 위해 골수를 기증했다. 
산행에는 신장 이식을 받은 사람도 2명 참가했다. 신장 투석 환자는 한여름에도 물을 실컷 마시지 못하고, 인이나 칼륨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며, 투석 자체가 심장에 부담을 주어 각종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혈액투석을 위해 동정맥류 수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도 반팔 옷을 입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체력적, 시간적, 금전적 부담까지 포함하면, 신장 이식을 받지 못하고 혈액 투석으로 버텨야 하는 시간은 고통임이 분명하다. 
이미지 크게보기
헌혈·장기기증의 대부로 꼽히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박진탁 이사장. 83세의 고령에도 백록담에 올랐으며, 강한 카리스마와 추진력으로 재단을 이끌고 있다.
박순향씨는 신장 이식을 받기 전 13년간 혈액 투석을 받았다. 그녀의 모친이 장기기증운동본부가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곧장 달려가 이식 대기 신청을 하여, 맞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12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만큼 이식을 기다리는 대기 환자에 비해 생존시 기증자 혹은 뇌사 기증자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식 받고 나서 삶의 질이 바뀌었어요. 이식 받은 후에도 약을 잘 먹고 자기 관리에 신경 써야 하지만, 이식 전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예요.”
‘한라산 정상은 무리여서 사라오름까지만 간다’는 경주에서 온 박옥남(74세)씨는 1991년 모친이 암 선고 받은 지 6개월 만에 명을 달리했다. 또한 같은 동네에서 신장 질환을 앓던 여고생이 돈도 없고 대구의 투석 가능한 병원까지 다니는 것이 어려워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죽음은 박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본부 박진탁 이사장이 신장을 기증하고 기증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를 접하고, 곧장 본부에 신청해 얼굴도 모르는 30대 남성에게 기증했다. 1990년대만 해도 갈비뼈 몇 개를 잘라내고 신장 이식 수술을 했다. 고통 없는 간단한 수술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녀는 ‘사람을 살리려면 아이 낳는 정도의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고 마음먹었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그녀를 두고, 동네에서도 영웅 대접을 하는 사람과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사람’이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으로 갈렸다. 남편이 목사였지만 교회에서 사람들 앞에 나가 장기기증 관련된 간증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목회에 장기기증을 이용한다고 볼까봐 그랬다는 것. 이런 대가 없는 사랑을 실천한 그의 영향을 받아 충주 살던 여동생도 본부를 통해 1998년 신장을 기증했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사랑도 전염된다는 걸 보여 준 셈이다.
본부 설립자인 박진탁 목사의 영향을 받아, 장기기증을 한 현직 목사도 100여 명에 이른다. 서울 노원구에서 작은 교회의 목회를 하고 있다는 표세철 목사는 신장과 간을 모두 기증했다. 그는 29세인 1991년 신장을, 2002년에는 간을 기증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헌혈만 582회를 한 그는, 박진탁 목사의 장기기증 기사를 보고 ‘이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들어 본부를 통해 신장을 기증했다. 
시장에서 1만 원에 구입한 등산화와 등산바지라며 웃는 표 목사는 아버지의 영향이컸다고 말한다. 시골 작은 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끼니를 거르지 않으면 감사한, 검소한 삶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는 “내게 건강한 몸이 있어 베푼 것뿐”이라 말한다. 582회의 헌혈 횟수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열혈 헌혈 전도사다. 2주에 한 번 헌혈하는 생활을 20년 넘게 해왔다. 그는 “헌혈하기 위해 건강 유지를 했고, 헌혈을 하니 새 피가 만들어져서 건강해졌다”고 헌혈의 장점을 얘기한다.   
  
“아버지는 간경화로 1980년대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2년 전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어요. 병은 유전이라 큰형은 간염으로 고생하고 있고, 둘째 형은 뇌졸중을 이어 받았어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제가 건강하니, 건강함을 나눠 주고 싶었어요.”
그는 열혈 장기 기증 권유자로 소문이 났다. 장례 소식이 들리면 유족들에게 “사후 3일 안에 시신 기증을 하면 의학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권유해 그를 ‘황당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표 목사가 신장과 간을 기증하고 600회 가까이 헌혈을 한 것을 아는 주변인들은 공익적인 권유로 받아들인다.  
1994년 한국종교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사이비 종교의 비리와 이단성을 파헤치던 탁명환씨가 이단 신도에게 피습을 받고 사망하자, 그는 탁씨가 생전 시신기증에 서명한 것을 떠올려 곧장 환자들이 새 각막을 얻는 데 기여했다.   
“밤 12시 뉴스를 보다가 피살 소식을 듣고, 시신이 있는 상계백병원으로 뛰어갔어요. 검찰이 안 된다고 손도 못 대게 막는 거예요. 그래서 각막은 검시와 상관없지 않느냐고 검사를 설득해서 서울과 대구에 거주하는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했어요. 검시 끝나고 시신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보내 기증했고요.”
진달래밭대피소가 시끌벅적하다. 광주의 나덕주(60세)씨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현란한 말솜씨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는 2006년 신장을 기증했으며, 1986년부터 지금까지 헌혈 횟수가 500여 회다. 과거 TV에 ‘O형 혈액형 구함’이란 자막이 뜨는 걸 보고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신장을 기증했을 때는 수술 후 이식 받은 사람이 인사를 오겠다고 했으나 거절했으며, 병원비가 많이 나오면 그에게 부담될까봐 수술 후 5일 만에 퇴원했다. 
그는 13년째 광주의 노인무료급식소에서 점심 배식 봉사를 하고 있으며, 빛고을문화예술봉사단을 만들어 전국각지로 국악·가요·민요 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의 절반 이상은 재능기부 공연이며, “두 딸 모두 시집 보내고 혼자이니 봉사를 직업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봉사의 공을 인정받아 2015년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의아하고 궁금했던 기증자들의 사연이 하나씩 풀려갈수록 정상이 가까워온다. 뭔가 뭉클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는 아직 살기 좋은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 크게보기
부부가 신장을 기증한 부산의 김영철·서유연씨. 2003년 기증한 아내를 따라 새나회 모임을 나가다가 2017년 남편도 기증했다.
주사 트라우마 극복하고 헌혈 730회, 신장·간 기증
헌혈 횟수로는 광주 손홍식(70세)씨가 갑이다. 총 730회로 2015년까지 우리나라 헌혈 횟수 1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34세인 1984년에 뒤늦게 헌혈을 시작했다며, 헌혈 지각을 했다고 안타까워한다. 전남대병원에서 헌혈하다가 신장 투석 환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1994년 신장을 기증했으며, 2002년에 간도 기증했다. 
“원래 저는 주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어릴 적 주사 바늘에 찔려 아팠던 기억이 있어서 죽으면 죽었지 병원 안 간다는 사람이었어요. 남을 돕는 일인데 싶어, 눈 딱 감고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어요.” 
통계청에서 평생 근무하고 퇴직한 그는, 당시에는 기증을 안 좋게 봐서 눈치 보며 헌혈을 하고 신장기증을 했다고 한다. 
콤비처럼 붙어 다니는 중년 여성은 구리와 안성에서 온 엄해숙·백창전씨다. 두 사람은 새나회 회장과 총무로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다. 새나회는 새생명나눔회의 약자로 본부를 통해 신장을 기증하고 이식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회원 간 교류와 장기 기증 활성화를 위한 홍보를 하며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고 있다. 기증 후에도 모임을 갖고 봉사와 홍보를 하는 까닭에 대해 묻자, “사람들이 착해서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고, 봉사 활동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착한 사람도 끼리끼리 모이는 셈이다. 
엄해숙씨는 신장을 기증 받은 이가 몇 년 후 ‘박사학위를 받았다’며 인사하러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수술 후 의사가 “신장이 깊숙이 있어 갈비뼈 3개를 잘라냈다”고 하자, “갈비탕 드시려고 그렇게 많이 잘랐냐”고 농담을 하자 의사가 껄껄 웃으며 병실 분위기가 유쾌해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각막을 기증했는데, 당시 새나회는 본부를 도와 명동성당 앞에서 각막기증 캠페인을 벌여 희망 등록을 많이 받았다. 또 수술비가 없는 기초수급자 환자를 위해 일일찻집을 열어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단순히 기증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기증 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기증자들이 나서서 돕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자란 그녀의 아들도 신장을 기증했다.  
새나회 총무를 맡아온 백창전씨는 주변 사람을 챙기는 오지랖 넓은 사람으로 통한다. 봉사에 뜻이 있었던 그는 어릴 적부터 ‘아이들 몇 명 입양해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그룹홈 원장을 맡고 있다. 그룹홈은 예전의 고아원이 개선된 형태이며 내 집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7명 정원으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백 원장은 “2009년 당시엔 착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넘칠 때라 기증을 할 수 있었다”며 “지금은 마음이 오염되었다”고 대단한 일 아니라는 듯 말한다. 새나회 회장과 총무 콤비인 두 사람은 매주말 전국 산을 누빈 등산마니아라며, 월간山 취재를 무척 반가워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백창전씨는 청소를 하다 의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고, 엄해숙씨는 허리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통제를 먹고 산행에 나서 백록담 분화구가 깨끗하게 보이는 정상에 올랐다. 
이미지 크게보기
그룹홈을 운영하며 성인으로 키워낸 아이만 67명에 이르는 최연화 원장(왼쪽). 2001년 기증한 익산의 최현옥씨(가운데)와 1999년 기증한 노금숙씨.
기증 문화 확산되도록 기증자들 나서
가장 늦게 정상에 오른 서울 신내동에서 온 이은우씨는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내로 인해 신장을 기증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내를 3년간 간병했으나 숨을 거뒀고, 의학 발전에 쓰인다는 생각에 순수한 마음으로 아내의 시신을 기증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와이프 시신을 기증할 수 있냐”며 그를 욕했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신장 기증을 택했다. 
경기도 안성에서 3곳의 그룹홈을 총괄하는 수산나의 집 원장을 맡고 있는 최연화씨는, 갑상선을 비롯해 종합병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몸이 아파 체중이 45㎏밖에 되지 않아 스스로 ‘곧 죽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신앙을 가지면서 ‘어린 딸이 스스로 머리 빗고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내가 살게 해주세요’라고 절실히 기도했다. 어느덧 딸이 성장하고, 건강도 되찾게 되어 ‘내가 살았으니 나도 타인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본부를 통해 신장을 기증했다. 
사회복지 일을 한 지 25년이 된 그는 아기 때부터 키운 아이들 67명을 성인으로 키워냈다. 그는 “(고아원 원장으로 배출한)첫 아들이 공무원이 되었다”며 연신 폰으로 풍경 사진을 찍어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지면이 부족해 다 소개할 수 없지만, 놀라울 정도로 선한 이들의 사연이 넘쳐 났다. 흉악한 범죄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세상 말세’라고 말하지만, 뉴스에 나오지 않는, 우리 사회가 밝게 유지되도록 지탱해 주는 숨어 있는 좋은 사람이 참 많다는 걸 실감한다.  
신장 기증자인 장점예씨는 잠들기 전 “하나님 제가 죽을 때 뇌사 상태로 죽을 수 있게 해주소서”라고 늘 기도한다. 그래야 장기를 기증해 한 사람이라도 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꾼들은 보통 얼마나 덕을 쌓았는가 하는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산의 날씨가 인과응보로 변한다고 믿는다. 여러 번 한라산을 왔지만 오늘처럼 시야가 깨끗하고 바람 한 점 없이 온화한 날씨는 처음이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한 사람들,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과 함께했기에 한라산이 준 선물이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