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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해외 트레킹ㅣ캐나다 로키] 히치하이킹으로 캐나다 로키의 감동을!

글·사진 민미정 백패킹 여행가
  • 입력 2020.02.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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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백패커의 캐나다 로키 호수 투어

하얀 설산과 어우러진 겨울의 모레인 호수는 찬바람을 피하려는 듯 하얀 은반 아래 숨어 유일한 방문객인 나를 수줍게 맞아주었다.
하얀 설산과 어우러진 겨울의 모레인 호수는 찬바람을 피하려는 듯 하얀 은반 아래 숨어 유일한 방문객인 나를 수줍게 맞아주었다.

캐나다 서부의 로키산맥Rocky moutains은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빙하와 만년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광대한 산맥과 시시각각 영롱하게 빛나는 호수, 회색곰과 엘크가 노니는 광활한 자연을 품고 있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밴프Banff와 재스퍼Jasper 등 4개의 국립공원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캐나다로키의 감동을 전하고 있다.

로키산맥을 따라 곧게 뻗은 잿빛 아스팔트도로 위를 여유롭게 가로질러 걷는 엘크를 만나고, 높고 파란 하늘이 흘러내려 하얀 설산에 희석되어 고인 듯한 에메랄드빛 호숫가를 걷는 로망은 북미로 향하는 발길을 설레게 만들었다.

캐나다 캘거리 공항을 나서자 싸늘한 기온이 감돌았다. 옷깃을 꽁꽁 여민 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배낭을 멘 채 거리로 나왔다. 도시의 외곽으로 이동해 길가에 배낭을 내려놓고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Banff밴프’를 적었다. 예상과 달리 겨울의 밴프로 향하는 차량은 뜸했고, 그마저도 그냥 지나쳐 갈 뿐이었다. 히치하이킹으로 캐나다 동부를 여행했던 자신감은 점점 사라졌다.

포기하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하려는 순간 빠르게 지나친 차 한 대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내가 배낭을 짊어지고 차로 다가가자 앳된 청년이 창문을 열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뒷좌석에 배낭을 던져 넣고 차에 올라탔다. 독일인 루카스Lucas는 미국 서부에서 대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캐나다를 횡단 중이라 했다. 그는 뒷좌석에 놓인 커다란 피자 한 조각을 건넸고, 추위와 허기에 지쳐 있던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웠다.

흐린 날씨 탓에 에메랄드빛 루이스호수를 볼 수 없었지만, 고즈넉하게 자리한 보트하우스와 페어뷰산이 호수 위로 반영된 모습은 신비감마저 감돌았다.
흐린 날씨 탓에 에메랄드빛 루이스호수를 볼 수 없었지만, 고즈넉하게 자리한 보트하우스와 페어뷰산이 호수 위로 반영된 모습은 신비감마저 감돌았다.

밴프에 가까워질수록 설경이 짙어졌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경이로운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서로의 여정에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밴프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외곽에 위치한 캠핑장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1년 넘게 매일 사용한 낡을 대로 낡은 야영 장비로 버틴 하룻밤은 남미의 설산에서 자는 것 못지않게 1분1초가 싸늘했다.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짐을 꾸렸다. 차량을 얻어 타려면 서둘러 중심가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제는 히치하이킹 명당자리를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눈 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화이트보드에 ‘LOUISE루이스’를 적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세계 10대 절경 중 하나인 루이스호수Lake Louise였다. 빙하가 녹아내려 해발 1,732m에 위치한 루이스호수는 색깔 그대로 이름을 따서 에메랄드그린 호수로 불렀으나, 1884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딸 루이스 공주를 기리기 위해 루이스호수로 명명되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준 페이토호수. 세상의 끝이 존재한다면 이 호수 너머로 이어진 로키산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준 페이토호수. 세상의 끝이 존재한다면 이 호수 너머로 이어진 로키산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곰 발자국 마주치자 겁이 덜컥

차를 얻어 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캘거리에서 만나 함께 차를 렌트해 여행 중이라는 오스트리안 필립Philipp과 스위스인 플로리안Florian은 나를 레이크 루이스 마을로 데려다 주었다. 근처 호스텔에 짐을 풀고 관광안내센터로 가자 입구에는 루이스호수 근처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호수까지 먼 거리가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호수로 향했다. 한적한 차도를 걷다 보니 오솔길로 이어지는 샛길이 나왔다. 차도가 지루했던 터라 샛길로 들어섰다. 100m를 걸어 들어가니, 조용한 숲 사이로 난 하얀 눈길 위로 조그맣고 귀여운 동물 발자국이 나타났다. 작은 곰의 발자국 같았다. 발자국을 따라 걷는데, 갑자기 끼어든 커다란 곰 발자국을 발견했다. 순간 실종자 전단지가 떠올라 그대로 뒤돌아 뛰쳐나왔다. 곰을 쫓는 베어 스프레이를 준비하지 않은 게 후회됐다.

하는 수 없이 차도를 따라 걸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루이스호수로 다가갔지만, 하늘이 잔뜩 찌푸린 탓에 에메랄드빛 호수는 볼 수 없었다. 호수 주위로 빼곡히 들어선 침엽수들 너머로 만년설에 뒤덮인 거대한 바위산이 호수 안을 들여다보려는 듯 우뚝 솟아 있었다. 맑고 투명한 수면 위로 호기심 많은 설산이 투영되어 또 다른 세상과 맞닿은 듯했다. 구름이 걷히고 호수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길 기다렸지만, 고독감만 더해갈 뿐이었다. 빛을 잃은 루이스호수를 뒤로하고, 모레인호수Lake Moraine로 향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동물의 발자국을 쉽게 볼 수 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동물의 발자국을 쉽게 볼 수 있다.

루이스호수에서 15㎞ 정도 떨어진 모레인호수는 주변의 주요 산악 트레킹 코스의 시발점으로, 시즌에는 많은 트레커들이 이곳을 찾는다. 모레인호수로 가는 도로는 차단되어 차량을 막고 있었다. 앞 선 이의 하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옆으로 무성한 침엽수들이 밀당이라도 하듯 시야를 가렸다 열었다 반복하며 변화무쌍한 로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3시간을 걸어 모레인호수에 도착했다. 거대한 병풍처럼 10개의 연봉이 켜켜이 늘어서 모레인호수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 위로 구름을 밀어내려는 듯 강렬한 태양 빛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거칠고 장대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호수를 보호라도 하려는 듯 꽁꽁 얼어붙은 수면 위로 숨길 수 없는 매력적인 에메랄드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로망을 품었던 사진 속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었다. 이 멋진 곳에서 별로 가득한 하늘을 보며 하룻밤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 회색곰 발자국이 떠올라 이내 생각을 접었다. 아름다운 에메랄드 호수는 동물들에게 양보하고, 눈에 담은 풍경에 만족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재스퍼에서 밴프까지 나를 태워 준 낚시 여행 중인 니코. 4개 호수에서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이곳 호수들은 아름답지만 낚시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재스퍼에서 밴프까지 나를 태워 준 낚시 여행 중인 니코. 4개 호수에서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이곳 호수들은 아름답지만 낚시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음날 숙소를 나와 재스퍼 타운Jasper Town으로 향하는 길목에 섰다. 운 좋게도 배낭을 내려놓고, 화이트보드를 들자마자 멈춰선 차를 얻어 탔다. 눈이 아름다운 독일인 마리사Marisa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여행 중이라는 그녀는 혼자라서 외로웠다며 재스퍼까지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추운 날씨에 지나는 차도 뜸했기에 기꺼이 수락했다. 그녀는 내가 원하는 곳에 차를 세워 주고, 내가 원하는 포즈로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어색해 하긴 했지만 사진 찍히기를 좋아했고,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기에 우리는 좋은 동행이 되었다.

아이스필즈 파크웨이Icefields Parkway를 달리며 도로 위나 작은 호수 등 예정에 없던 곳에서 몇 번이고 차를 세웠다. 마침내 여행 리스트에 있던 페이토호수Peyto Lake에 도착했다. 유명 관광지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주차장은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숲으로 드나들고 있었다.

산길을 걸어 위쪽 전망대Upper Viewpoint까지 올랐다. 마리사와 나는 탄성을 질렀다. 끝없이 이어진 하얀 로키산맥 사이로 진한 유화물감을 짜낸 듯 비현실적인 에메랄드빛 호수와 그 위로 산맥을 추격하듯 길게 펼쳐진 구름이 장관이었다. 이런 순간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는 1년 넘게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차로 달리다 보면 종종 멈추고 싶은 어마어마한 풍경을 마주친다. 이런 광대한 풍경 앞에선 두 팔을 벌려 경이로운 대자연을 품어보게 된다.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차로 달리다 보면 종종 멈추고 싶은 어마어마한 풍경을 마주친다. 이런 광대한 풍경 앞에선 두 팔을 벌려 경이로운 대자연을 품어보게 된다.

히치하이킹이 이어준 인연들 

남미의 설산 안데스에도 같은 색깔의 호수가 있었다. 안데스는 첨예한 고봉들의 거친 매력이 도드라진 반면, 로키는 절벽 같은 병풍산과 어우러진 호수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눈을 깜빡이며 몇 번이고 되새겼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 호수야말로 로키의 보석이었다. 풍경에 취해 있던 나는 마리사가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재스퍼에 도착하자 마리사는 자기가 예약해 둔 숙소에 함께 머물며 여행하자고 했지만, 나는 트레킹을 하고 싶어 아쉽지만 그녀와 헤어졌다. 음식을 살 겸 가게에 들러 캠핑장이나 텐트 칠 만한 공원을 물어보니, 겨울엔 가끔씩 먹을 것을 찾으러 내려오는 곰이 있어 위험하다며 말렸다. 여름엔 이용객이 많아 캠핑장 주위에 곰의 접근을 막는 전기방어막을 켜놓지만, 겨울에는 운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히치하이킹 하기 좋은 마을 끝에 숙소를 잡았다.

멀린호수Maligne lake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호스텔을 나왔다. 도로 옆을 걸으며 다가오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몇 대의 차량을 보내고 나서 얻어 탄 차에는 한국에 관심이 많은 싱가포르인 클라라벨Clarabelle과 세 친구들이 있었다.

루이스호수에서 카누를 타는 이를 바라보고 있자 카누 주인은 재미를 느껴 보라며 맛보기로 태워 주었다.
루이스호수에서 카누를 타는 이를 바라보고 있자 카누 주인은 재미를 느껴 보라며 맛보기로 태워 주었다.

멀린호수에서 그들과 헤어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 위에 발을 딛는 건 겨울 첫눈을 맞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다. 뽀득뽀득 건조한 눈을 밟으며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랐다. 산을 반쯤 올랐을 때,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설렘은 곧 불안함으로 바뀌었고, 폰을 꺼내 멀린 산 정상의 위치를 확인했다.

정상 쪽으로 방향을 잡고 발을 디딜 수 있는 눈 위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바람에 내 발자국이 사라지지만 않으면 하산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방향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때쯤 위에서부터 이어진 스키 자국을 발견했다.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이다. 스키 자국은 정상으로 인도했고, 길고 긴 멀린호수와 나란히 하고 있는 하얀 연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스키를 타고 이 멋진 풍경을 보며 호수까지 단숨에 내려갈 수 있는 스키어들이 부러웠지만, 씩씩한 두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발자국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하산했다.

물이 만든 작품인 멀린 캐년은 소용돌이치는 물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침식되어 일부 지점은 폭 2m, 깊이 50m의 거대한 협곡이 형성되어 있다.
물이 만든 작품인 멀린 캐년은 소용돌이치는 물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침식되어 일부 지점은 폭 2m, 깊이 50m의 거대한 협곡이 형성되어 있다.

호수를 반쯤 돌아본 후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땐, 아무도 없었고,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길에서 차를 잡을 생각으로 도로로 나와 재스퍼를 향해 걸었다. 예상대로 지나가던 차가 멈춰 섰고, 등반을 좋아하는 로버트Robert가 반겨주었다. 나의 남미 등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그는  나중에 남미에 갈 때 조언해 달라며 연락처를 주었다. 그리곤 등반하러 재스퍼에 온다면 꼭 연락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계획 없이 움직이는 여행은 언제나 생각지 못한 기회와 인연이 생겨 더욱 설레고 즐겁다. 여행 중 만난 캐나다 친구의 조언대로 히치하이킹으로 동부에 이어 서부 여행을 안전하게 마쳤고, 이런 행운과 인연은 나의 세계여행 캐나다 편을 한층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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