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알피니스트, 아직 살아 있다<10>ㅣ최석문] 막강한 거벽 파괴력의 부드러운 돌격대장

입력 2020.03.12 17:36

한국 최초 황금피켈상 수상한 개척등반의 고수, 김창호 대장의 프로젝트 이어갈 것

최석문(48·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은 뼛속까지 알피니스트다. 20년 넘게 알파인 등반을 해왔고, 그중 일부는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한 성과였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아무도 오르지 않은 벽과 산을 개척하는 데 집중했다. 난이도 높은 고산 거벽 신 루트를 오른다고 했을 때, 고인이 된 김창호 대장은 함께 오를 파트너로 늘 최석문을 입에 올렸다. 암빙벽은 물론 고산 알파인 등반에서도 최고 실력을 갖춘 돌격대장이다.
최석문은 한국 최초로 황금피켈상을 받았다. 2017년 유럽 황금피켈상 심사위원들은 김창호·최석문·박정용이 알파인 스타일로 오른 네팔 아샤푸르나(7,145m)·강가푸르나(7,455m) 남벽 신 루트 개척 등반을 한국인이 이룩한 알파인 스타일 등반 업적이라 평가했다. 고인이 된 김창호 대장과 최석문은 한국 산악계를 이끌었던 최강의 자일파트너였다.
청춘이던 2001년 ‘멀티4 원정’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였다. 3개월간 파키스탄에서 6,000m급 4개 봉을 오르고 시카리(5,928m) 북동벽에 신 루트를 냈다. 이때 시카리 완등 후 악천후로 하강이 어렵게 되자 침낭이 없던 이들은 설동을 파서 꼭 끌어안고 잠을 잤다. 죽음의 비박을 견뎌낸 두 사람은 이후 세계에서 손꼽히는 험산을 함께 올랐다. 2007년 남미 파이네 중앙봉을 한국 최초로 오른 것도 최석문·김창호 조합이었다. 5.11c급의 고난도 루트를 속공등반으로 10시간 만에 올라 완벽한 호흡을 과시했다.
여세를 몰아 2008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등봉이던 바투라2봉(7,762m)을 함께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바투라 2봉은 설벽, 암벽, 빙벽으로 이뤄져 있으며 등반 난이도가 무척 높아 시모네 모로를 위시한 각국의 유능한 산악인들이 도전했으나 줄줄이 실패한 바 있다. 이들은 이틀간 비박을 감행하며 정상에 올라, 산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최강의 알파인 조합임을 증명한 것이다.
김창호 대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석문에 대해 “벽 앞에 대면했을 때 등반의 파괴력은 가장 강하다”며 “다양한 기술을 안정적으로 쓰며 밀고 올라가는 힘은 정말 대단하다”고 평한바 있다. 물론 여기서 벽은 세계 최고 수준의 난이도 높은 거벽을 말한다.
큰일을 낼 것 같았던 이들은 2016년 아샤푸르나, 강가푸르나 등반으로 한국 최초 황금피켈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최석문에겐 가장 힘겨웠던 순간이었다. 아샤푸르나 신 루트 개척을 마치고 하산 중 장염에 걸린 것. 5일 동안 설사로  체력과 컨디션이 바닥에 이른 상황에서 고난이도 등반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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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의 힘을 짜내어 강가푸르나(7,455m) 정상을 향해 오르는 최석문. 앞은 박정용 대원이며 고 김창호 대장이 찍었다. 이 등반으로 한국 최초의 황금피켈상을 받았다.
고소로 6,000m에서 걷는 것도 어려운데 난벽을 기술과 체력, 정신력으로 정면 돌파해 정상에 섰다. BC를 출발해서 돌아오는 데 7일이 걸렸으며, 그중 어떤 날은 겨우 엉덩이만 걸칠 수 있는 낭떠러지 벽에 기대어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새웠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개의 7,000m대 봉우리 신 루트 등반을 해낸 초인들에게 황금피켈상 특별상이 주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등반 성과로 보면 현역 최고 알피니스트라고 해도 좋을 최석문이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덜 알려졌다. 김창호 대장 뒤에 가려진 면도 있지만, 그가 워낙 겸손하고 부드러운 성품인 탓도 있다.
“등반은 산만 오르는 게 아니에요. 사람 관계에서 오는 갈등도 원정등반의 한 요소예요. 행정적인 것, 생계를 멈추고 시간을 내야 하는 것들도 넓은 의미에서 다 등반이에요. 이런 것을 조화롭게 풀어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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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등봉이던 바투라2봉 (7,762m)을 등정하고 내려오는 최석문 대원. 고인이 된 김창호 대장이 찍었다.
주왕산이 낳은 천부적인 등반가
최석문은 산의 DNA를 타고 난 사람이다. 명산의 고장 청송 출신이며, 심지어 주왕산 기슭인 하의리가 고향이다. “어릴 적부터 눈 뜨면 보이는 것이 주왕산 기암이었다”고 한다. 산에 빠진 계기는 지리산 설경에 취하면서부터다. 군 입대를 앞두고 홀로 나선 여행길에 오른 지리산에서 상고대에 매료돼 산에 빠져들었다. 이후 군복무 중에도 휴가만 나오면 고향집 대신 산을 찾을 만큼 열성 산꾼의 길로 접어들었다.
등반의 길로 들어선 건, 1997년 월간<山>에서 본 개미산악회 회원 모집 광고를 보고 입회하면서다. 이후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냈다. 몇 달도 되지 않아 서울 근교는 물론 설악산 일원의 어지간한 루트는 모두 선등을 서고, 이듬해 알프스 3대 북벽을 완등했다. 한국 산악사를 통틀어 흔치 않을 폭발적인 급성장이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무섭게 험산을 돌파하던 그의 기세가 누그러진 건 결혼 덕분이다.
그의 아내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알파인 등반가란 평을 받는 이명희(48·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다. 국내 최강의 클라이머 부부인 셈이다. 이들의 연은 2001년 파키스탄 원정에서 깊어졌다. 빙하 낭떠러지로 미끄러지던 이명희를 최석문이 잡은 것. 이때 이명희의 아이스엑스가 떨어지면서 최석문의 얼굴을 찍었고 부상을 입은 두 사람은 결국 하산해야 했다. 얼굴에 흉터 생겼으니 “책임 져라”는 최석문의 반 농담에 이명희가 “내가 데리고 살게”라고 화답하면서 결혼하게 되었다는 산악계에서 유명한 러브스토리가 전한다.
결혼도 알파인 스타일이었다. 원정을 다녀온 지 3개월 만에 결혼해 다음해 아들 보건(올해 고교 3학년)군을 낳았다. 보통의 산악인 부부는 여기서 원정 등반을 접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달랐다. 부모로서 양육을 책임지기 위해 매년 번갈아 원정을 가기로 한 것. 행여 부부가 함께 원정 갔다가 사고를 당하면 졸지에 아들이 고아가 되는 걸 방지하고자 짜낸 대안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국내외에서 각자 굵직한 등반을 계속 해왔다.
최석문은 등반에 대한 의식이 확고하다. “모험 없는 등반은 스포츠”라는 것. 자연 암벽이라 해도 추락 시 다치지 않기 위해 볼트를 박은 곳은 ‘스포츠클라이밍 루트’라는 것. 고정 확보물을 최소화하면서 추락의 위험을 어느 정도 감내하는 것이 전통적인 등반 즉 ‘트레드 클라이밍Trad Climbing’이라고 말한다. 이런 모험적이고 클린 클라이밍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3년째 제천 저승봉에서 지인들과 함께 ‘트레드 클라이밍 페스티벌’을 열었다.
“좋은 자연암장이 있어도 쓰레기 문제나, 대소변 처리, 주차 문제, 바위 훼손 같은 걸로 지역민과 트러블이 생기면서 폐쇄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문제를 막고 개선해보자는 차원에서 시작된 페스티벌이에요.”
그는 크랙Crack을 좋아한다. 바위가 갈라진 틈인 크랙을 이용해 등반하면 볼트를 박는 인위적 훼손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개척한 제천 저승봉도 크랙 루트가 많다.
“스포츠 루트는 동작이 정형화되어 있지만 크랙은 다양한 변형이 가능해요. 확보물을 회수해서 하강했을 때 자연 그대로의 깨끗한 벽만 남는 것도 좋고요. 그렇다고 스포츠 루트를 비판적으로만 보는 건 아니에요. 저도 스포츠 루트를 즐길 때는 즐겨요. 다양한 등반을 좋아해요. 새로운 걸 하면 새로운 깊이와 재미를 느낄 수 있거든요. 다만 인위적인 것은 줄여가는 게 중요해요.”
그에 걸맞게 한국에서 가장 어렵다는 도봉산 강적크랙(5.13a)을 올랐다. 2㎝가 채 되지 않는 핑거크랙의 연속이며, 미세하고 미끄러운 돌기라 엄지발톱으로 버텨야하는 등 발놀림도 난해하다. ‘짧은 지옥’이라 불리는 최악의 크랙을 피부가 벗겨져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최석문이 완등했다. 고산등반가는 암벽등반에 약하다는 선입견이 있으나 그는 선운산 겨울람보(5.13d)를 완등했으며, 5.14급 해외등반 투어를 갈 정도로 벽에 있어서는 높낮이를 가리지 않는 실력파다.
의외의 이력은 UIAA 공인 국제 루트세터이며, 청송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 경기벽을 10년간 설계해 왔다는 것. 경기가 열리기 최소 일주일 전부터 와서 문제를 고민하고 벽에 매달려 힘겨운 작업을 해야 하고 큰 보수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루트 세팅은 재미있다”며 “선수 기량을 선별하는 것도 있지만, 선수와 관중을 연결하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선수들이 문제를 풀어내고 관중들이 환호할 때 즐거운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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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국 오리건주 트라우트 크릭(5.11+)을 등반하는 최석문.
자기 한계 넘어서면 등산인도 알피니스트
“산 높이와 기록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산의 아름다움을 못 보게 돼요. 그런 것보다 산에 가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해요. 동기부여가 중요해요. 항상 내 마음이 끌리는 아름다운 벽을 오르고 싶어요. 등반이 어렵더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명확한 선이 보이는 곳이 좋아요. 그렇다고 등정주의를 폄하할 생각은 없어요. 앞으로도 그런 등반은 계속되겠지만 저는 그쪽에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에요.”
차세대 김창호로 그의 이름이 오르기도 하지만, 그에겐 김창호 같은 자일파트너가 없다. 그는 “등반이 다 그렇지만, 특히 알파인 등반은 파트너가 제일 중요하다”며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가 없다”고 말한다.
“요즘은 알파인 등반하는 산악인이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에요. 과거에 비해 사회적으로 많이 변했어요. 이젠 20대 때부터 사회적 기반을 닦아놓지 않으면 뒤처지니까. 그런 면이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 그런 후배가 나타날 것이라 보고, 그때가 되면 다시 가야죠.”
믿음직한 알파인 파트너가 생겼을 때 그가 갈 곳은, 김창호 대장의 다음 프로젝트다. 김창호 대장이 다음 등반지로 찾아 놓은 6,000m대 미등봉이다.
“아직 언뜻언뜻 창호 형 생각이 나요. 장비를 꺼내다가도 형이랑 있었던 일이 생각나고…. 형이 가지고 있던 등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조차도 잘 모르니까요. 그런 사람이 과연 다시 나올까 싶어요. 그런 등반력을 가진 사람은 나올 수 있겠지만 그렇게 탐험하고 연구하는 이런 사람은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요.”
최석문은 누구나 알피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도전을 이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피니스트라고 믿는다.
“흰 산을 오르는 사람만 알피니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등반정신을 가지고 자연 속에서 도전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피니스트가 아닐까요.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 말이죠.”
어떤 이들은 “산악계에 알피니스트가 없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최석문의 생각은 다르다. “워킹산행을 하는 사람도 도전을 통해 자기 한계를 넘어선다면 알피니스트”라고 말한다. 
소속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등반 활동
1998년 몽블랑(4,807m) 등정, 아이거(3,970m) 북벽 등정, 마터호른(4,478m) 북벽 등정, 그랑드조라스(4,208m) 북벽 등정
1999년  인도 탈레이사가르(6,904m) 등반
2001년 파키스탄 카체블랑사(5,560m) 주봉·북봉 세계 최초 등정, 혼보르(5,500m) 신 루트 등반, 레이디핑거(6,060m) 등반, 시카리(5,928m) 신 루트 등정
2003년 청송 달기우폭 카르마karma 개척등반(M8, WI5+) 
2007년 파타고니아 파이네 중앙봉 한국 초등(VI, 5.11C, A1)
2008년 파키스탄 바투라2봉(7,762m) 세계 최초 등정
2009년 캐나다 안드로메다(3,450m, strain V5.9 A2 AI4) 등정, 터미네이터 월(WI7, M7+, R, 165m) 완등
2010년 미국 문라이트 버트레스 등반(V 5.12d or 5.9  C1), 요세미티 노즈 16시간40분 완등
2011년 노르웨이 빙벽등반 투어, 마운트 헌터(4,441m) 북벽 등정(AK6 5.8 A2 M5 AI6)
2012년 마운트 헌터 북벽 변형 신 루트 등정(ED+ 5.9 M7+ A2+ M5 AI6 R)
2014년 제천 저승봉 개척
2016년 북한산 고래의 꿈(5.12b/c) 개척, 아샤푸르나(7,145m) 신 루트 개척, 강가푸르나(7,455m) 남벽 신 루트 개척 등정
2017년 파타고니아 세로토레(3,210m) 등반
2019년 장군봉 히말라야 방랑자 개척 보수
수상 경력 
2010년 한국산악회 제1회 김정태상 수상
2012년 대한민국 산악상 개척상 수상
2017년 대한민국 산악상 고산등반상 수상
2017년 프랑스 황금피켈상 특별상 수상
자격
UIAA 국제루트 세터, 대산련 공인 루트세터 1급, 생활체육1급(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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