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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스틱 대통령' 윤치술의 힐링&걷기 <25>] 그리움의 힘

글·사진 윤치술 한국트레킹학교장
  • 입력 2020.03.13 16:48
  • 수정 2020.03.2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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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진 기저귀고무줄 같은 겨울이었다. 가난도 비단 가난이라고 했거늘 길눈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숫눈의 설렘 하나 만들어 주지 않은 채 비실거리다가 ‘태산명동서일필’이 되어버렸다. 내 이리도 못난 동장군冬將軍을 여태 본 적 없기에 은근 부아가 치민다. 꽁무니 뺀 겨울을 구시렁구시렁 씹으며 찾은 남녘의 산 된비알 바위틈의 취산꽃차례 노란 돌양지꽃이 위로가 된다. 먼데 아스라한 마루금 위로 어설픈 아지랑이가 얼핏 어른하고 창가 책상머리 턱 받침에 어리마리 퍼지는 졸음처럼 스르르 봄이 왔다. 설국雪國에 대한 아쉬움은 어차피 뭉그러졌고, 바투 온 춘산월春山月에 대한 그리움도 컸기에 더 이상 겨울을 지청구 않기로 했다.

오래 전 봄날, 가로진 키슬링 배낭kissling rucksack에 부대끼며 산길을 오르다 해찰하듯 잣나무 그늘에 퍼질렀다. 그때 저 아래에서 파뿌리처럼 하얗게 센 머리의 여린 몸집 할머니가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온다. 밭장다리 하얀 고무신에 가풀막진 언덕을 사부작사부작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왈츠’로 오른다. 도대체 달나라 걸음인지 나풀나풀한 그 몸짓에 짐짓 놀라 물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수제비뜰 때 수제비돌 튕기듯 잽싼 답, “보고 싶은 부처님 뵈러 가는데 이까짓 건 이여반장易如反掌이지.” 그 말씀 가끔 되새겨보면 할머니의 힘motive은 절실히 만나고 싶은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는 생각이 확실하다.

800km ‘카미노 데 산티아고’ 길 역시 수호성인守護聖人 야고보를 그리는 순례巡禮길이다. 설악아씨 문승영이 “가슴 벅차고 가슴 졸이며 걸었다”는 1,700km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킹GHT(히말라야 횡단 트레일), 여성 최초로 1984년 겨울 76일간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 너머 삼재령까지의 백두대간 888km를 단독종주한 남난희가 두 발에만 의지했다면 힘자랑에 불과하고, 훈장 같은 성취감의 중독이라면 먹이를 찾아 헤매는 동물의 몸짓이었으리라.

그들은 해와 달, 별 아래에서 그리움으로 두른 망토mantea 같은 오버재킷 지퍼를 여미고 눈비바람 안고 걸으며 가없는 질문에서 작은 답이라도 구하려 했음이리라. 그렇다. 튼실한 그리움으로 무장한 걸음에서 영혼은 위로받고 경험칙과 논리칙을 넘어서는 큰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이다.

오늘도 흩어진 나를 추슬러 배낭에 담고 산山에 든다. 풀린 날인 듯싶어 쉴 참으로 그늘에 들면 잔망스러운 골바람에 아직은 몸도 마음도 차다. 물 한 모금 마시려고 설핏한 햇살이나마 오글거리는 양달에 앉아 젖은 등짝을 봄볕에 문대면 희망 같은 간지럼이 돋고, 얼음장 치받으며 두둥둥 북소리 내는 봄물의 맷돌 흐름에서 씩씩하게 행진march하는 3월march을 본다.

‘들어간다’의 입춘入春이 아니고 ‘당차게 일어선다’는 입춘立春은 옛사람들이 그냥 글귀를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을 얻는다고 했다. 봄은 삭풍에 시린 언 땅의 지난至難을 딛고 따스운 그리움의 힘으로 불끈 일어섰으려니, 그리하여 그리움의 힘은 한 모라기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우리의 삶 을 다잡아 주리니.

윤치술 약력
소속 한국트레킹학교/마더스틱아카데미교장/건누리병원고문/레키 테크니컬어드바이저
경력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외래교수/고려대학교 라이시움 초빙강사/ 사)대한산악연맹 찾아가는 트레킹스쿨 교장/사)국민생활체육회 한국트레킹학교 교장/월간 산 대한민국 등산학교 명강사 1호 선정
윤치술 교장은 ‘강연으로 만나는 산’이라는 주제로 산을 풀어낸다. 독특하고 유익한 명강의로 정평이 나 있으며 등산, 트레킹, 걷기의 독보적인 강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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