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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산과 문화인류학 <12>ㅣ프리루프트슬리브] 노르웨이서 ‘캠핑’을 ‘공교육’으로 가르치는 까닭은?

글 오영훈 기획위원
  • 입력 2020.03.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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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3명 중 1명 매일 자연 즐겨…난센 자연주의, 네스 심층생태학에 철학적 기반

노르웨이 북단 로포텐군도의 오페르쇠이캄멘 등산. 사진 알렉스 코누.
노르웨이 북단 로포텐군도의 오페르쇠이캄멘 등산. 사진 알렉스 코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꼽을 때면 늘 수위권에 오르는 나라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위치한 노르웨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탄탄한 정유업, 전자기술 산업을 기반으로 한 부유한 경제와 고용안정, 높은 시민의식, 적은 노동시간, 양질의 교육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노르웨이 국민 3명 중 1명은 매일 산책이나 등산, 캠핑 등 자연에서 하는 활동을 즐긴다고 한다. 어떻게 노르웨이는 이처럼 자연 친화적인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을까? 

사실 서양 근대사에서 자연과 개발은 늘 대립적인 관계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은 근대 서양인들의 경험에 의거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키웠다. 이는 18~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반면 개발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낭만주의 사조도 탄생했다. 

노르웨이는 이러한 두 철학적 사조를 100여 년에 걸쳐 조화시켰다. 이 조화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프리루프트슬리브friluftsliv’다. 이 단어는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851년에 쓴 ‘고도에서Paa Vidderne’라는 시에서 처음 사용됐다. 

프리드요프 난센. 노르웨이의 국민 영웅이다. 사진 헨리 반 데르 웨이드.
프리드요프 난센. 노르웨이의 국민 영웅이다. 사진 헨리 반 데르 웨이드.

‘좋아, 그럼 와봐! / 바람과 폭풍을 뚫고 / 출렁이는 고산 꽃들 사이로! / 교회 길을 따라와도 좋지, 원한다면. / 나는 아냐, 자유롭거든! / 고요한 산골 구석에 / 내가 사냥해 놓은 놈들 충분하고 / 난로, 탁자 / 그리고 생각을 돕는 프리루프트슬리브가 있는 이곳.’

프리루프트슬리브는 ‘자유fri-공기lufts-삶liv’이란 단어를 차례대로 이어붙인 신조어다. 폭넓게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가벼운 산책부터 스키, 야영, 등산처럼 산과 숲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지내는 야외 활동을 일컫는다. 지금은 북유럽 국가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다. 물론, 노르웨이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

산악인이자 철학자인 아르네 네스는 자신의 생태철학을 스스로 실천하며 말년에 산속 오두막에서 홀로 지냈다. 사진 영화 크로싱 더 스톤스 캡처.
산악인이자 철학자인 아르네 네스는 자신의 생태철학을 스스로 실천하며 말년에 산속 오두막에서 홀로 지냈다. 사진 영화 크로싱 더 스톤스 캡처.

전투적, 개인주의적 자연주의 철학 발달

프리루프트슬리브는 노르웨이의 국민 영웅인 극지 탐험가 프리드요프 난센(1861~1930)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난센은 최초로 그린란드를 횡단하고 북극점 탐사에 나선 인물로, 자연주의 철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난민 구제 사업을 벌여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난센의 자연주의 철학 특징은 단순성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홀로 인성을 계발해야 한다든지 여름철 내내 낚싯바늘과 성냥만으로 혼자 생존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단순하다. 

사뭇 전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난센의 자연주의는 당시 노르웨이의 국가주의, 낭만주의와 어울려 큰 호응을 얻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에 각각 400여 년, 100여 년 지배를 받는 동안 노르웨이에는 딱히 부자라 할 만한 이가 없었고, 국민들 대부분이 땅에서 나는 소출로 연명했다. 

노르웨이 유치원생들이 프리루프트슬리브를 배우고 있다. 사진 모보티.
노르웨이 유치원생들이 프리루프트슬리브를 배우고 있다. 사진 모보티.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자신의 땅에서 뿌리를 찾는 고독한 청년’으로 표상되는 난센의 철학은 새로운 근대국가 체제에 이상적인 개인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노르웨이여행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평야가 많은 덴마크나 스웨덴과는 달리 노르웨이에는 산과 피오르드가 많아 험한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성향이 강했다. 유독 개인주의가 심한 전통 탓에 오늘날에도 대인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더욱 자연으로 향한다는 분석도 있다.

노르웨이의 쟁쟁한 산악인들도 이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처음으로 셰르파족의 우수성을 서방세계에 알린 노르웨이 산악인 칼 빌헬름 루벤손C.W Rubenson은 1908년에 “모든 평범한 사람에게는 자연과 교감하려는 강한 충동이 있다. 뿌리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로 인해 도시인들은 바다로, 숲으로, 산으로 향한다”고 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종교성까지 엿보이는 대목이다.

노르웨이에서는 산딸기를 채취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사진 마티아스 프레드릭슨.
노르웨이에서는 산딸기를 채취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사진 마티아스 프레드릭슨.

1960년대 이후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더 진화한다. 각종 환경오염과 생태 위기가 현대인의 절박한 생존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르웨이 사상계를 이끈 이는 철학자 아르네 네스(1912~2009)다.

네스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 이론을 주창한 인물이다. 만물은 곧 나 자신과 다름없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 충실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그는 1950년에 노르웨이 히말라야 원정대를 최초로 꾸린 산악인이기도 하다. 당시 8,000m에 가까운 파키스탄 힌두쿠시산군 최고봉인 티리치 미르(7,708m)를 초등했다. 네스는 프리루프트슬리브야말로 원생 인류의 원초적인 삶의 방식이자 오늘날 서로에게 경쟁적이지 않고 사는 상생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수도 오슬로 인근 오슬로마르카에서 낚시하는 광경. 노르웨이에서 낚시도 일반적으로 허용된다. 사진 에밀 홀바
수도 오슬로 인근 오슬로마르카에서 낚시하는 광경. 노르웨이에서 낚시도 일반적으로 허용된다. 사진 에밀 홀바

2018년 네팔 구르자히말에서 유명을 달리한 김창호 대장은 아르네 네스의 심층생태학을 등반에 적용해 동료와 현지인, 과거의 인물들과 미래 세대까지 아우르는 ‘공존의 등반’을 추구한 바 있다.

네스의 자연주의적 삶은 전 지구적 환경문제를 염두에 두는 노르웨이인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특히 자연을 관광상품으로 대하는 미국식 소비주의 확산에 반발하며 노르웨이인들의 국민적 자존심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대체로 빽빽하지 않다. 수풀지대도 드물다. 수목한계선은 고작 해발 150m 정도다. 극지기후기 때문이다. 200m만 올라도 높은 산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최고봉은 2,469m의 갈회피겐이다. 수도 오슬로 주변에는 산들이 대개 야트막하다. 내륙에는 담수호도 많아 수영, 카약, 낚시 등을 쉽게 즐길 수 있다.

노르웨이에서 스키 시즌이면 소위 ‘스키 버스’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50km 정도를 버스로 이동한 뒤 스키로 돌아온다. 사진 니나 디드릭센.
노르웨이에서 스키 시즌이면 소위 ‘스키 버스’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50km 정도를 버스로 이동한 뒤 스키로 돌아온다. 사진 니나 디드릭센.

‘알레만스렛’으로 자연 무제한 이용 가능

노르웨이 자연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인에게 숲, 산, 호수가 공유지·사유지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열려 있다는 점이다. 국립공원은 물론 무료입장이다. 노르웨이 국민 대다수가 집 근처에 산책할 수 있는 숲이 있다. 야영도 공유지라면 어디나 가능하다. 사유지에서도 체류 기간 이틀 이하, 건물과 거리는 최소 200m 두기 등 간단한 규정만 지킨다면 야영할 수 있다.

무한대에 가까운 자연 접근권은 1957년 통과된 ‘알레만스렛allemansrett’이라는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 소위 ‘방랑의 자유’라 불리는 법으로 다른 북유럽 국가와 스위스 등지에서도 시행 중이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인근의 산지를 통틀어 ‘오슬로마르카’라 부른다. 제주도 면적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다. 1930년대 고급 별장을 지으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개발을 금지하는 법률이 처음 제정됐다. 4년에 한 번씩 경계를 다시 획정하는데 그럴 때마다 자연보호단체와 삼림업체 간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개발제한이 대규모로 풀리는 경우는 없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일은 없을 전망이다. 

오슬로마르카의 80%가 사유지인데, 2,000명에 달하는 토지 소유주들 대다수가 오히려 스스로 숲 개발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덕분에 오슬로 시민 75%가 월 1회 이상 오슬로마르카의 숲을 이용한다고 한다. 

스키가 노르웨이의 국민 스포츠가 된 데에도 프리루프트슬리브가 일정 부분 기여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스키를 즐긴다. 별도 스키장이 있지만 대부분 마을마다 뒷산에 스키 등산로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오슬로마르카에서 부녀가 함께 7km 거리를 스키로 완주하고 있다. 사진 다그사비센.
오슬로마르카에서 부녀가 함께 7km 거리를 스키로 완주하고 있다. 사진 다그사비센.

대중교통 체계도 촘촘히 잘 구축돼 있다. 저렴하고 효율적이다. 스키 시즌에는 ‘스키버스’가 운영된다. 유명 스키등산로 입구까지 스키버스로 이동한 뒤 스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숲 어귀에는 대개 저렴한 호스텔이 있다. 호스텔은 노르웨이 전역에 600여 곳이 있다. 점원들은 대개 프리루프트슬리브에 관련된 현장지식을 지녀 귀중한 조언도 쉽게 얻을 수 있다.

프리루프트슬리브가 이토록 잘 정착된 데에는 노르웨이 평균 노동 시간이 세계 최저 수준인 것도 한 몫 했다. 2018년 기준 노르웨이 근로자는 연평균 1,416시간을 일했다. 독일과 덴마크에 이은 수치다. 20세기 초 노르웨이에서 노동운동이 퍼질 때 근로시간 감축을 위한 투쟁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연 친화적인 삶의 보장이었다. 자본주의의 폐해에 맞서 사회를 치유하는 방법을 자연에서 찾은 셈이다.

공교육에도 적극 반영됐다. 스웨덴여행회에서 처음으로 민속학교Folkhogskola를 만들어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야외활동 교육을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북유럽 국가에서 야외활동은 모든 교사가 필수적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영역이다. 지역 전문가, 자원봉사자가 함께 참가해 진행하는 수많은 연계 프로그램이 있다. 물론 공교육이므로 전부 무상이다. 최근 노르웨이여행회는 자체 소유 산장을 학생에게 개방하고 교육시설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요툰하이멘국립공원 등산. 사진 킴킴
요툰하이멘국립공원 등산. 사진 킴킴

최근엔 스포츠화되고 있다는 우려 제기

프리루프트슬리브는 혼자나 가족, 친구 등 소규모로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름엔 도보 산책, 겨울엔 스키 등산이 가장 대중적이다. 1~3월 스키 시즌이 가장 붐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프리루프트슬리브는 여러 가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먼저 ‘자연 속의 삶’이었던 프리루프트슬리브가 스포츠의 일종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부 젊은 층이 운동과 성취, 타인과 어울리는 재미를 자연 속에서 추구하기 시작하자 ‘자연을 집처럼 편안하게 여기고 머문다’는 프리루프트슬리브의 핵심에서 멀어진 행위라는 비판이 생겼다. 단순 생계유지를 위한 사냥이나 낚시, 조류관찰, 경치감상, 과학탐구, 사진 촬영, 종교적 수행 등도 마찬가지 이유로 비판받는다. 

노르웨이 청소년들은 프리루프트슬리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연구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다만 남녀차이가 있어 소년들은 자연을 좀더 친숙하게 느끼는 반면, 소녀들에게는 그리 인기가 많지 않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현 청소년 세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해 볼 때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자연을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 세대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쓰레기 되가져오기, 나뭇가지 꺾지 않기, 배낭 챙겨가기 등의 운동도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됐다.

프리루프트슬리브는 노르웨이 특유의 사회민주주의적인 국가관이 배태된 전통이다. 개발과 자연, 경쟁과 은둔 간에 조화를 추구하며 인성을 계발하려는 이들의 노력을 우리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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