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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연재ㅣ옛문헌에 나오는 장흥 천관산] 천관산이 천풍·지제산으로 불린 이유는?

글 박정원 선임기자 사진 C영상미디어
  • 입력 2020.05.1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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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형상에 신기한 기운 서려 명명…1500년대 고지도에도 상세히 나와

장흥 천관산엔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마치 천자, 즉 황제의 면류관 같아 명명됐다고 전한다.
장흥 천관산엔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마치 천자, 즉 황제의 면류관 같아 명명됐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7권 전라도 장흥도호부편에 ‘천관산은 부의 남쪽 52리에 있다. 예전에는 천풍天風이라 불렸고 혹은 지제支堤라고 했다.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고 기록돼 있다.

장흥 천관산天冠山(723m)이 천풍산 혹은 지제산이라고 불렸고, 기이한 형상과 기운을 가진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천관산은 바로 앞 ‘5월의 명산’에서 설명했듯이 정상 부위 수많은 기암 봉우리들이 마치 천자天子, 즉 황제의 면류관 같아 명명됐다는 설이 대표적인 지명유래다. 지제산은 전형적인 불교식 지명. 불교의 천관보살이 머무는 곳이란 의미가 바로 지제이다. 또한 지제는 불탑을 나타내기 때문에 정상의 수많은 기암들이 불탑 형상을 하고 있어 명명됐다는 설도 있다. 천풍은 말 그대로 하늘 위에서 부는 바람이다. 산이 별로 높지는 않으나 바다에서 바라보는 정상은 더욱 높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천풍에 대한 설명은 같은 책 불우편 천관사에서 얼핏 소개된다.

‘천관산에 있는 천관사는 중僧 정명靜明의 기문에 천하를 통한 일기一氣가 쏟아져 내와 개천이 되고, 쌓여서는 산을 이루었다. 영嶺의 남쪽 바닷가에 임한 땅, 옛 오아현의 경계에 천관산이 있으니, 꼬리는 궁벽한 구석에 도사리고, 머리는 큰 바다에 잠겨 일어섰다 엎드렸다 하면서 구불구불 몇 주의 땅에 걸쳐 있으니 그 기운의 쌓임이 크기도 하다. 영통화상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북갑北岬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 가지고 있던 석장錫杖이 날아 산꼭대기를 지나 북갑에 이르러 꽂혔다. 꿈에 석 장을 세웠던 그곳에 숲을 베고 절을 지었으니 지금의 천관사가 바로 이것이다. 절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바위들이 더욱 기이한데 높이 우뚝 서있는 것이 당암幢巖이요, 튀어나와 외로이 걸려 있는 것이 고암鼓巖이다. 구부리고 공손히 절하며 명령을 듣고 있는 것 같은 것이 측립암側立巖이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울부짖는 것 같은 것이 사자암이다. 층층이 쌓아놓은 것이 마치 잔치 그릇에 음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것이 상적암과 하적암이요,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에 홀로 솟아 있는 것이 사나암이며, 우뚝하고 험한 것이 서로 끌어안아 이지러진 데를 보충하고 있는 것이 문수 보현암이다.

천관사에서 남쪽으로 500보를 가면 작은 암자가 낭떠러지 아래 외진 곳에 있는데, 그것을 구정암이라 부른다. 그 암자에서 낭떠러지를 따라 100여 보를 올라가면 돌 대臺가 펀펀한 것이 있으니 환희대라 한다. 그것은 올라가는 사람이 험한 길에 지친 몸을 여기에서 쉬게 되므로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라 한다. 대 앞 초목이 우거진 사이에 희미한 길이 있고, 길을 따라 올라가 산마루에 이르면 사방이 틔어 바라보인다. 구름과 놀이 곱고 초목들이 빛나며, 온 산봉우리는 푸른 소라를 벌려 놓은 듯, 시냇물은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것이 손바닥 위를 가리키듯 역력히 보인다. (중략) 이상하고 기괴한 것들이 많은데, 오뚝한 것, 숙인 것, 우묵한 것, 입을 벌린 것, 우뚝 일어선 것, 숨어 엎드린 것, 울툭불툭한 것 등이 천태만상 기괴하고 이상해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어찌 조물주가 여기에 정수를 모아 놓고 바다를 한계로 하고 넘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후략)’

<대동여지도></div>에 이미 천관산(원으로 표시)이란 지명이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나온다.
<대동여지도>에 이미 천관산(원으로 표시)이란 지명이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나온다.

기이한 형상의 암벽들이 볼거리

천풍과 천관, 지제에 대한 설명이 그대로 녹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렇게 상세히 설명돼 있을 정도면 장흥 천관산은 조선시대에 이미 명산의 반열에 올라 있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 기록은 어떨까. 한 번 살펴보자. 

<고려사지리지> 장흥부 연혁에 ‘장흥부는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오아烏兒로 고치고, 보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에 와서 정안현으로 고치고 영암의 관할에 소속했다. 인종 때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라 하여 지장흥부사로 승격시켰다. 원종 6년(1265)에 또 회주목으로 승격했다. 충선왕 2년(1310)에 다시 장흥부로 강등했다. 뒤에 왜구가 침략해 오자 임시로 내륙에 옮겨 터를 잡았다. 별호는 정주이고, 또 관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관산(옛 이름은 천풍)이 있다’고 나온다.

<고려사>권27에도 천관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원종 15년(1274)에 신유 대장군 나유羅裕를 원에 파견해 중서성에 상서하기를, “금년 정월 3일에 조정의 지시를 받고 대선大船 300척을 건조하도록 즉시 조치를 취했으며, 추밀원부사 허공을 전주도의 변산으로, 좌복야 홍녹주를 나주도의 천관산으로 보내 목재를 준비시켰습니다. 또 시중 김방경을 도독사로 임명해 그 휘하의 관원과 장병들은 모두 정예들로 뽑았으며, 필요한 인부와 공장, 물품을 전국 각지에 사람을 파견해 공급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재촉했습니다. 정월 15일에 한 곳에 모아서 16일에 공사를 시작했고, 5월 그믐에 완전히 끝내서 배는 대선과 소선 합계 900척 건조를 완료했으며, 사용할 물품도 모두 원만하게 구비했습니다. 유능한 3품관들에게 업무를 분담시켜 뱃머리를 돌려서 이미 금주金州를 향해 출발시켰으니, 여러 재상들은 황제에게 잘 보고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고려는 지방 호족 세력이 번성했던 시기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지방 호족의 세력이 독자적으로 지역을 통치했던 지방자치, 지방분권 성격이 매우 강했다. 그렇다고 중앙집권세력은 지방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지방의 반란과 불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왕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지역 호족세력의 딸들과 결혼관계를 통해 유대를 강화하거나 통치하는 방법을 택했다.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라는 대목에서 지방 호족세력의 딸이 왕족과 결혼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중의 하나인 장흥도 나름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했을 것이며, 그 장흥의 진산이 바로 천관산이었던 것이다.

16세기 말, 즉 1500년대 후반에 제작된 <팔도총도></div> 동람도에도 천관산(원으로 표시)이 확실하게 표시돼 있다.
16세기 말, 즉 1500년대 후반에 제작된 <팔도총도> 동람도에도 천관산(원으로 표시)이 확실하게 표시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제 명산으로 꼽혀

<고려사지리지>에 천관산의 옛 지명이 천풍이라고 기록돼 있으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어디에도 천관산이나 천풍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옛 지명 천풍까지 거론된 사실로 봐서는 삼국시대나 삼한시대에 이 지역의 호족세력이 제법 강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전면에 나설 만한 사건이나 세력은 없었던 듯하다.

조선시대 <세종지리지>에도 <고려사지리지>에 나오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 일부 추가하고 있을 뿐이다.

‘진산은 부의 북쪽에 있는 수인修因이다. 천관산은 부의 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천풍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보성에 이르기 33리, 서쪽으로 강진에 이르기 6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34리, 북쪽으로 능성에 이르기 40리이다.’

<세종실록> 46권 세종 11년(1429)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를 따를 것을 건의하다’는 부분에 장흥 천관산과 전국의 명산들이 등장한다. 명산만 뽑으면 다음과 같다.

해풍 백마산, 가평 화악산, 강화 마리산, 임강 용호산, 진천 태령산, 산양 희양산, 문경 관혜산, 가은加恩 재목산梓木山, 장흥 천관산, 영암 월출산, 광주 무등산, 제주 한라산, 원주 거슬갑산, 홍천 팔봉산, 서흥 나장산·백서산, 해주 지성산, 수안 요동산, 곡산谷山 신류산·무산·증격산·남산·미륵산, 상원 관음산, 영흥 백두산 등 전국 25개 산이 해당한다.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전하는 <산경표></div>에는 천관산이 일명 천풍이라 불렸고 지제산이라고도 했다고 나온다.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전하는 <산경표>에는 천관산이 일명 천풍이라 불렸고 지제산이라고도 했다고 나온다.

<현종실록> 20권 현종 13년(1672)에는 ‘전라도 장흥의 대장봉이 움직이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눈에 띈다.

‘전라도 장흥의 천관산 대장봉이 갑자기 움직여,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서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서기도 했는데, 이렇게 100여 차례나 반복했다. 대개 그 산에 세 개의 석봉이 솔밭처럼 서 있는데, 이른바 대장봉은 그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목격했다. 도신이 이 사실을 보고했다. 허적이 아뢰기를 “매우 괴이하고 허망한 듯합니다. 수십 장이나 되는 석봉이 어떻게 좌우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것이 기울어질 때 풀과 나무, 그리고 돌들이 반드시 모두 부서졌을 텐데, 그 고을의 수령은 현지를 직접 살펴보지 않았고, 감사는 갑자기 아뢰었으니 소루함이 심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만약 큰 변괴로 여기셔서 더욱 수성하신다면, 역시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천관산에 대한 역사서의 기록은 대체적으로 기이한 형상에 신기한 기운이 서려 명산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지낸 대상으로 꼽혔다.

역사서 외에도 다양한 기록이 전한다. 16세기, 즉 1500년대 후반에 발간된 고지도 <팔도총도> 동람도에 천관산을 뚜렷이 표시하고 있다. 이후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도 천관산을 빼놓지 않고 있다.

전국의 명산과 명당에 대한 조선 최대 지리서인 <택리지> 복거론 도읍과 은둔편에 ‘장흥 천관산은 바위의 형세가 기이하고 빼어나며, 자줏빛 구름과 흰 구름이 항상 산 위에 떠 있다’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산경표>에도 ‘천관산, 일명 천풍이며, 또 다른 이름은 지제산이다. 장흥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천관산의 봄은 4월 중순경 진달래로 만발한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로 불행히 아름다운 장관을 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가을에는 억새로 뒤덮여 운치를 더한다. 시원한 남도의 바람을 맞으며 붉게 물든 진달래 능선을 만끽할 날이 하루빨리 다시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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