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알피니스트, 아직 살아 있다ㅣ<12> 이영준] 우리 산악문화 기록하고 정의하는 산악저널리스트

입력 2020.05.19 17:50

두 번의 촐라체 원정이 인생의 방향 바꿔…“포스트 알피니즘 고민해야”

프로필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나타난 이영준(43)은 머리카락을 하나도 남김없이 밀어 버린 상태였다. 두 달 전 청송에서 만났을 때와 너무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싶어서 가볍게 이유를 물었다.
“머리가 하도 빠져서요. 별거 없습니다. 외관을 꾸미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편한 게 좋지요. 3년 전에 처음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런 하찮은 것에 왜 지금까지 신경을 쓰고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 그는 산악뉴스를 다루는 ‘마운틴저널’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전에도 산악잡지에서 12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등반가보다는 기록자의 입장에서 산악계와 더 길게 인연을 맺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산동네 입문부터 지금까지 그의 산악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 ‘알피니스트’의 길을 고스란히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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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돌로미테 치마 그란데 정상에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6세 때부터 산에 따라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중학교 때부터 등산과 암벽등반을 하셨지만 고등학교 때 오봉에서 하강사고로 전문등반은 그만 두셨습니다. 하지만 캠핑과 야외활동을 좋아하셔서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많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산에 갈 만한 나이가 되자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주말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연신내에 살았는데, 바로 보이는 산이 북한산인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돌산’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금의 독바위역 인근까지 가서 향로봉 부근을 오른 게 스스로 한 첫 산행이었습니다.”
그는 북한산을 오르며 백운대에서 보이는 인수봉 클라이머들이 궁금해졌다. 좀더 어려운 코스도 가보고 싶어 암릉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등반을 배울 선배가 없어 손경석의 <등산기술백과>를 읽고 등반장비와 기술을 스스로 익혔다. 빨랫줄을 이용해 백운대 난간에서 듈퍼식 하강도 해보고, 암벽화도 구입해 짧은 슬랩에서 등반하는 흉내도 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소아당뇨가 생겨 체력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신문배달을 통해 체력도 기르고 용돈벌이도 했는데요, 때문에 산에 가는 것이 차츰 스스로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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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암에서.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전문등반에 빠져
그가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한 건 서울공업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등산잡지에서 본 ‘로우 알파마요65’라는 대형 배낭을 사러 종로5가 장비점에 갔다가 점원에게 “암벽등반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봤던 게 계기가 됐다. 그 점원이 블루마운틴산악회 김성진 선배였고 “이번 주말에 구곡폭포로 오라”고 해 처음으로 전문등반을 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때가 3.1절 연휴로 그해 시즌 마지막 빙벽등반이었습니다. 물론 구곡폭포를 3분의 1쯤 올라가고 펌핑이 나서 내려왔지만 등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3학년 봄부터 거의 매주말 등반을 하러 갔습니다. 블루마운틴산악회는 당시 주로 선인봉에 다녔는데요, 때문에 선인파 산악회나 클라이머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때 최승철, 김형진도 알게 되었고, 의정부로 이사를 가며 도봉산과 더욱 가까워져 산에 가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시험기간에도 학교가 일찍 끝나면 책을 들고 산에 가서 공부를 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당시엔 평일에 산에 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산은 독서실보다도 훨씬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운동신경이 둔하고 체력도 약해 등반을 썩 잘하지는 못했다고 자평했다. 구곡폭포나 박쥐길, 표범길을 겨우 선등할 정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선배들의 권유로 최승철, 김형진 두 사람이 만든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에 들어가, 1998년 봄에 2기로 ER을 수료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대상지와 등반세계를 접하는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해 가을 그들이 탈레이사가르에서 사고를 당하며 한동안 큰 충격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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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네팔 가우리상카르 서벽 등반 중.
“한동안 산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곳이 한국산악회였습니다. 더욱 큰 산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에 가려고 돈을 모았고, 자문을 구하러 당시 역삼동 산악회관을 찾아가 허긍열 형을 만났습니다. 허긍열 형은 히말라야에 가기 전에 먼저 알프스에서 경험을 쌓으라 했고, 그래서 2001년 여름 샤모니로 떠났습니다. 처음 접한 고소는 힘들었습니다. 4,000m도 안 되는 산에서 너무나 무기력한 자신을 보았습니다. 큰 벽 큰 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직 훈련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돌아와 한국산악회 산악기술위원회에 입회했습니다.”
이듬해인 2002년 한국산악회는 강성우 대장을 중심으로 촐라체 북벽 등반대를 꾸리고 있었다. 이영준은 그 팀에 합류하기 위해 매주 인수봉을 올랐다. 1년간 마땅한 직업 없이 우이동을 기웃거리며, 산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줄을 묶고 술을 마셨다. 그때의 경험과 인맥이 지금까지 그를 산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비록 정상에 서지는 못했지만,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 도전했던 촐라체 북벽 원정 과정은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처음 만난 히말라야에서 느꼈던 신비와 공포, 힘듦 등이 이후 살아가며 만난 여러 난관들 앞에서 ‘촐라체 북벽보다는 쉬운 일인데’라는 생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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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촐라체 북벽 등반을 마치고 종글라에서 북벽을 배경으로 왼쪽 두 번째 앉은 이. 당시 6,100m까지 진출했다.
자신의 한계 인식하고 기록하는 역할에 충실 
“2017년부터 시작한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활동이 거의 유일하게 산에 가는 일입니다. 가끔 예전과 같은 만년설산을 다시 오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만, 몇 차례 원정등반에서 저는 유명 등반가들과 같은 고산등반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알았습니다. 오히려 저의 역할은 인수봉과 같은 낮은 산에서 우리 산악인들이 남기고 간 무수한 발자취를 다시 조명하고 발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월간 마운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그는 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됐다. 또 세 차례 참가한 국제산악연맹 총회와 트렌토산악영화제, 밴프산악영화제 등에서 만난 세계 산악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 산악계가 문화적 측면에서 얼마나 취약하며 알피니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알피니즘은 당연히 행위가 우선되어야 하는 활동이며, 따라서 저는 현재 알피니스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다니구치 케이 평전 <태양의 한 조각>을 쓴 일본의 오이시 아키히로씨와 선인봉을 등반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한국에는 알피니스트가 몇 명이나 되나?”라고 묻기에 저는 “100명쯤은 되는 것 같다”고 무심코 말했는데, 그가 매우 놀라며 일본에는 10여 명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가까운 나라이지만 알피니즘과 알피니스트에 대한 개념과 기준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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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네팔 가우리상카르 서벽 등반 중.
이영준은 모든 사람이 알피니즘을 추구하고 알피니스트가 될 수는 없으며, 단지 ‘한국적 산악운동’의 한 부분으로 알피니즘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산악운동’은 좀더 다양한 갈래로 분화되고 발전되어야 하며, 그런 면에서 우리 산악문화를 정의하고, 창조하고, 공유하고 기록하는 것이 알피니즘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마운틴저널을 시작하면서부터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습니다. 2018년 아내 곽정혜와 함께 영국 산악인 스티븐 베너블스의 책을 번역하고 그를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우이동에서 산악영화 상영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산악문화의 중심지인 백운산장 보존을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최근에는 우이동 지역산악인들과 ‘우리우이협동조합’을 만드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우이’에서 구상하고 있는 사업들은 최종적으로 우이동이 세계적인 산악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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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 훈련 중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세상 변화에 맞춰 ‘포스트 알피니즘’ 고민해야”
그는 지금껏 한국에서는 알피니즘의 의미가 지나치게 과대포장된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제 세상은 너무나 많이, 그리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맞춰 우리의 시각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새로운 트렌드에 맞추어 포스트 알피니즘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늘 선배들에게 하는 말인 “산에 젊은 산악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없을 뿐이다”는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 것들처럼 알피니스트와 알피니스트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좀더 눈을 넓혀 새로운 시각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꼭 험하고 위험한 도전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20년간 우리 산악계를 휩쓴 ‘머메리즘’ 또는 ‘등로주의’라는 국적 없는 말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습니다. 고산과 거벽을 오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계단을 오르듯 한 단계씩 다시 작은 도전들을 이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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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설악산 봉화대 리지에서 김영미, 안치영과 함께.
또한 그는 사회의 갈등과 양극화 같이 산악계 또한 그러한 모습을 닮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혐오와 차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는 모습을 우리 산악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특히 정치, 환경, 젠더와 같은 문제에서 산악계는 분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초등을 세상에 처음 알린 영국 타임스 기자 제임스 모리스는 일약 대영제국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그가 46세 때 성전환을 해 존 모리스라는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영국의 산악문화가 우리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은 이런 데 있습니다. 그들은 오랜 문화적 전통 속에 관용을 찾았고 그것이 저마다 다름을 인정하는, 그리고 어떤 가치 판단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문화 수용의 기본자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예禮’라는 말은 볼 시示 변에 풍요로울 풍豊자를 씁니다. 상대를 바라보는 풍요로운 시선이 바로 예인 것입니다. 산악계는 늘 ‘예절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과연 상대에 대한 풍요로운 시선이었는지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영준 약력
1998. 3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수료
2001. 7~9  유럽 알프스 샤모니산군 등반 
2001~2011  한국산악회 산악기술위원
2002. 9~11  네팔 촐라체(6,440m) 북벽 등반
2003. 9~11  네팔 촐라체(6,440m) 북벽 신 루트 시도
2003~2004  한국산악회 산악연수원 강사 
2004. 6~9  유럽 알프스 샤모니산군 등반
2006. 5  중국 쓰촨성 반지설산(5,430m) 등반 
2006. 7  국제산악연맹UIAA 청소년위원회 지도자 연수
2006. 7  유럽 알프스 돌로미테산군 등반
2007. 7  국제산악연맹UIAA 청소년위원회 지도자 연수
2007. 7  유럽 피레네산군 등반
2008. 12~2009. 2  네팔 가우리상카르(7,144m) 서벽 신 루트 시도
2009~2011  한국산악회 해외산악위원장
2009~2011  국제산악연맹UIAA 총회 한국 대표 참가
2010. 8  유럽 알프스 오뜨루트(샤모니-체르마트) 등반
2011~2019  한국산악회 학술문헌위원회 이사
2016. 5  북미 데날리(6,190m) 등반
2017. 3~현재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2017. 3~현재  산림청 숲길등산지도사 강사
2017. 3  중국 청도 황산고 암벽 개척등반
2018.~현재  서울시산악연맹 산악조난구조대 대원
2018.~현재  국립공원공단 산악안전관리 자문위원
2019.~현재  대한산악연맹 경기력향상위원
2019. 8  대한산악연맹 2급 등산강사
 
사회경력
2004. 3.~2016.11  월간 마운틴 기자, 편집장, 편집인 역임
2017. 12.~현재  마운틴저널 발행인
수상경력
2009  한국잡지언론상 기자부문 수상
2011  부산시산악연맹 금정산악상 공로상
2016  사단법인 한국산악회 홍종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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