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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셰르파 스토리] 에베레스트 최난의 벽 초등한 셰르파

글 서현우 기자 사진 네팔 히말 트렉
  • 입력 2020.07.2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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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르파 스토리ㅣ페르템바 셰르파]
루클라 공항 주방 보조에서 포터로 발탁…네팔 최고 영예 훈장 수상

1985년 에베레스트 등반 중인 페르템바와 크리스 보닝턴 경.
1985년 에베레스트 등반 중인 페르템바와 크리스 보닝턴 경.

영국의 국가대표급 고산등반가 16명, 33명의 고소 포터, 26명의 셰르파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모였다. 7년에 걸친 등반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모인 대규모 원정대였다. 혹한의 날씨와 폭풍설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한 끝에 총 4명의 대원이 정상에 오른다. 1975년 9월 24일.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효시로 꼽히는 크리스 보닝턴 경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의 순간이다.

정상에 오른 대원은 두걸 해스턴과 더그 스콧, 피터 보드맨 등 영국 산악인과 한 명의 셰르파였다. 이 셰르파의 이름은 페르템바Pertemba. 당시 원정대 셰르파들의 대장Sirdar이다. 귀환에 성공한 후 서구사회에서는 크리스 보닝턴과 영국 산악인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네팔에선 페르템바가 셰르파족을 대표하는 산악 영웅으로 등극하게 됐다.

페르템바 셰르파는 1948년 2월 15일 에베레스트 솔루쿰부 지역에 위치한 쿰중마을에서 태어났다. 페르템바의 아버지는 티베트와 네팔을 오가며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가족을 부양했다.

셰르파족 답게 페르템바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고소 적응 능력을 보여 줬다. 다섯 살 때 고쿄 밸리에 살고 있는 조부모와 함께 가축을 몰고 렌조 라 패스Renjo-La Pass(5,360m)에 오르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최난의 벽으로 꼽히는 남서벽. 사진 셔터스톡
에베레스트 최난의 벽으로 꼽히는 남서벽. 사진 셔터스톡

페르템바는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부족의 전통에 따라 자랐다. 12세가 되는 해인 1961년, 마침 페르템바의 고향 마을에 에베레스트 초등자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힐러리 쿰중 학교’를 설립해 줘 교육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페르템바는 “힐러리는 내 대부와 같은 존재”라며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영원히 문맹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페르템바가 17세가 되는 해 집안에서 더 이상 그의 학비를 대기 어려워질 만큼 경제적 상황이 나빠졌다. 페르템바는 루클라 공항의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주방 보조로 일해야만 했다.

등반을 시작하게 된 건 네팔 최초의 트레킹 에이전시 ‘마운틴 트래블’을 만든 지미 로버츠 대령과의 우연한 만남 덕분이다. 로버츠는 페르템바를 고용해 카트만두로 데려갔다. 그는 주방 보조부터 포터, 쿡 등 트레킹 포터로 일하면서 틈틈이 베테랑 셰르파와 유럽 등반가들과 함께 고산 등반 기술을 숙달할 수 있었다.

페르템바는 현재 사회 공헌 활동에 매진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페르템바는 현재 사회 공헌 활동에 매진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셰르파 전통 가옥 보존 캠페인 전개

페르템바는 1970년 영국 안나푸르나 원정대의 셰르파로 고용되며 처음으로 고산 등반을 시작했다. 아직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7,500m에 위치한 4캠프까지만 진출했다. 1971년에는 에베레스트, 1972년에는 안나푸르나에 각각 고용돼 등반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정상 공격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마지막 캠프까지만 진출하고 돌아서야 했다.

페르템바는 “고산 등반을 경험하기 전엔 쉬운 길, 편한 길이 당연히 더 좋았다”며 “그러나 경험이 축적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일반적인 길보다 더욱 도전적인 루트를 통해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페르템바의 아내(오른쪽)와 딸(중간). 페르템바는 1995년 마나슬루 등반 후 가족을 생각해 고산 등반을 그만뒀다.
페르템바의 아내(오른쪽)와 딸(중간). 페르템바는 1995년 마나슬루 등반 후 가족을 생각해 고산 등반을 그만뒀다.

운명의 1975년, 페르템바는 보닝턴 경의 에베레스트 원정대 셰르파 우두머리로 고용됐다. 등반 직전에는 보닝턴 경의 배려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지에서 몇 달간 합숙 훈련도 받을 수 있었다.

페르템바는 산소 장비가 얼음으로 막히고 등반 파트너의 아이젠이 벗겨지는 등 고난 끝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페르템바는 등정 후 기상 악화로 인해 제6캠프에 무려 30시간이나 갇혀 지내면서 손가락과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지는 증상을 겪은 끝에 간신히 하산할 수 있었다.

페르템바와 영국의 찰스 왕세자. 페르템바는 1984년 찰스 왕세자를 이끌고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진행했다.
페르템바와 영국의 찰스 왕세자. 페르템바는 1984년 찰스 왕세자를 이끌고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진행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 이후 페르템바는 독보적인 등반 커리어를 쌓아 나가게 된다. 1979년, 1985년 에베레스트, 1988년 가우리상카르, 1995년 마나슬루 등 다양한 원정에 참여해 성공적으로 정상을 밟았다. 1984년 페르템바는 직접 ‘네팔 히말 트렉’이란 트레킹 회사를 차려 17년 간 운영했다. 그는 네팔 산악계에 대한 공헌으로 네팔 국왕에게 네팔 최고 영예의 훈장인 ‘고르카 닥시나 바우Gorkha Dakshina Bahu’를 수여받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등반에서 멀어진 페르템바는 현재 현대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셰르파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는 가장 먼저 조상 대대로 살았던 자신의 집을 ‘셰르파 유산 가옥’으로 보존하고자 셰르파 헤리티지에 기증했다.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에베레스트 마을들이 급격히 현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셰르파족들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전개하는 캠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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