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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쫄븐갑마장길] 두 개의 오름, 숲길, 역사 이야기가 함께하는 걷고 싶은 길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 입력 2020.09.0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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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시리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싶다면 강추!

큰사슴이오름을 배경으로 황금빛의 억새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다.
큰사슴이오름을 배경으로 황금빛의 억새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다.

한라산 동남쪽 중산간, 광활한 초지 위에 위치한 가시리加時里. 시간을 더한다는 뜻만큼이나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곳이다.

가시리에는 조선시대 때 왕에게 진상하는 최고의 말을 사육하는 국영목장인 갑마장이 있었다. 갑마甲馬는 최고 등급의 말이다, 갑마들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 갑마장이고, 이 말들이 다니던 길이 갑마장길이었다. 갑마장길은 가시리 방문자센터에서 시작해 당목천,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행기머체, 소꼽지당, 안좌동입구에서 방문자센터로 돌아오는 약 20km에 달하는 8개의 오름을 지나는 코스인데, 그중에서 걷기 좋은 코스만을 뽑아서 만든 길이 ‘쫄븐갑마장길’이다. ‘쫄븐’은 ‘짧은’의 제주도 방언이다.

쫄븐갑마장길은 행기머체에서 출발해 가시천, 따라비오름, 잣성, 큰사슴이오름, 유채꽃프라자, 꽃머체에서 행기머체로 돌아오는 약 10km의 여정이고 3시간 정도면 넉넉하게 걸을 수 있다.

곶자왈, 잣성과 함께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까지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져서 지루할 틈도 없지만 역사 이야기가 있는 길이라 더 정겹다.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억새물결이 그 길을 더욱 환상적인 풍경으로 만든다.

따라비오름의 능선길에 서면 제주의 너른 들판과 그 들판 사이로 솟은 오름, 그리고 바다까지 그림같이 어우러진 풍광이 펼쳐진다.
따라비오름의 능선길에 서면 제주의 너른 들판과 그 들판 사이로 솟은 오름, 그리고 바다까지 그림같이 어우러진 풍광이 펼쳐진다.

숲으로 싸인 가시천

쫄븐갑마장길은 조랑말체험공원에서 시작한다. 조랑말체험공원에 들어서면 행기머체에 눈길이 멈춰진다. 커다란 돌무더기위로 나무가 자라고 있다. 돌 위에서 자라는 나무?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이것이 ‘행기머체’이다. ‘머체’는 지하에 형성된 용암돔이 오랜 세월동안 흐르면서 지상으로 나온 것인데 우리나라 최대의 지하 용암돔이다. 바위 위에 행기물이 있었기 때문에 ‘행기머체’란 이름이 붙여졌다. ‘행기’는 물을 담는 놋그릇, ‘머체’는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제주가 화산섬임을 보여 주는 흔적이기도하다. 제주의 곶자왈에서도 이런 머체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척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생명력이 놀랍다.

행기머체를 지나면 가시천을 끼고 걷는 길이다. 계곡과 숲이 함께한다. 마른 천인 가시천 바닥에 깔려 있는 돌에는 이끼가 가득하다. 나무 사이로 들어선 햇살이 이끼 옷을 입은 돌을 비추니 그 빛 또한 예사롭지 않다. 숲에서 퍼져 나오는 그윽한 숲의 향기가 내 몸을 감싼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시간이다. 자연 속에 있음이 감사하다.

가시천을 건너서면 길이 조금 넓어지고 따라비오름이 또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비오름으로 오르기 전 식전행사처럼 삼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피톤치드를 맡으며 쭉쭉 뻗은 나무 사이를 걷는다. 내 발은 기다렸다는 듯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목장과 목장의 경계를 구분 짓고 말들을 가둬두기 위해 세운 잣성길은 쉼이 있는 산책길이다.
목장과 목장의 경계를 구분 짓고 말들을 가둬두기 위해 세운 잣성길은 쉼이 있는 산책길이다.

쫄븐갑마장길의 백미, 따라비오름

오름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다. 나무계단과 흙길이 이어지지만 그리 힘들지 않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억새들이 출렁거리는 오름의 능선이 누워 있는 여인의 옆모습과 흡사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넘실거리는 억새의 파도가 오름을 뒤덮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따라비오름은 커다란 분화구가 작은 세 개의 분화구를 품고 있다. 3개의 분화구와 6개의 봉우리는 완만한 능선으로 둘러싸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 모습이 다른 오름과는 완연히 다르다. 처음 따라비오름에 올라왔을 때의 놀라움과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오름에서는 환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산책로만 있지만 따라비오름에는 남쪽, 서쪽, 북쪽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산책로가 있다. 각 길마다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제주의 바람으로 태어난 풍력발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유채꽃프라자로 향하고 있다.
제주의 바람으로 태어난 풍력발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유채꽃프라자로 향하고 있다.

따라비오름의 곁에는 아들 오름인 ‘새끼오름’, 며느리를 뜻하는 ‘모지오름’, 손자를 뜻하는 ‘장자오름’ 등이 모여 있다. 한 가족의 모습이다. 따라비오름이 가장이다. ‘따라비’는 ‘땅의 할애비’라는 뜻의 ‘따애비’에서 유래했다.

정상에 오르니 오름 전체를 뒤덮고 있는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판을 벌이고 있다.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 사이에 펼쳐진 초원지대에는 날개를 펼치고 돌아가는 10여 개의 풍력발전기 모습이 이국적이다, 곳곳에 솟아오른 오름들 그리고 저 멀리 제주의 바다까지 모두 한 평면에 펼쳐진다. 따라비가 오름의 여왕임을 실감한다. 오름에서 내려다보는 제주는 실로 장엄하다.

분화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붉은 화산송이의 돌탑이 있다. 누군가의 소원이 모여서 만들어진 돌탑에 슬그머니 돌을 하나 올려본다. 돌탑에 얹어진 소원이 제주의 바람에 실려 간다. 그 바람이 나의 소원도 이루어 주었으면. 분화구에서 다시 봉우리로 오르다가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본다. 방금 전에 만나고 온 길이건만 다시 다녀와야 할 것만 같다.

유채꽃프라자로 이어지는 큰사슴이오름 하산길의 풍경.
유채꽃프라자로 이어지는 큰사슴이오름 하산길의 풍경.

잣성길 지나 큰사슴이오름으로

따라비오름에서 내려오니 다시 삼나무 숲이 반겨준다. 그 곁에는 잣성길이 함께한다. 목장과 목장의 경계를 구분 짓고, 말들을 가둬두기 위해 세운 돌담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다. 조선시대엔 잣성의 길이가 한라산 허리를 두 번 돌아갈 만큼 길었었다고 하니 갑마장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잣성길이 끝날 즈음 억새평원이 펼쳐진다. 사유지라 사람이 들어가지 않아 더 거친 모습으로 그들끼리 어우러져 바람에 출렁이는 거친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대록산으로도 부르는 큰사슴이오름에서는 화산활동으로 쏟아진 용암들이 중턱에서 멈춰 굳어졌기 때문에 화산 평탄면의 원지형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이 다른 오름에 비해서 조금 가파르다. 큰사슴이오름이 있으니 작은사슴이오름도 곁에 있다.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 오래전에는 사슴이 살았다고 한다.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따라비오름의 능선.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따라비오름의 능선.

정상엔 억새가 별로 없지만 가시리 풍력발전기의 하얀 날개의 몸짓, 시원스럽게 펼쳐진 갑마장의 초원, 정상 아래로 펼쳐진 억새밭이 아쉬움을 보상해 준다. 하산 길로 접어드니 그곳엔 억새의 향연이 벌어진다. 햇살에 은빛 금빛으로 반짝이는 억새바다를 사진으로 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억새와 함께 노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다.

유채꽃 프라자를 지나서 꽃머체까지 가는 길은 다시 숲길이다. 가시천도 다시 만난다, 햇살이 가리워진 그늘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한여름에 걸어도 좋은 길이다.

머체 위에 자리한 나무에 꽃이 아름답게 핀다고 해서 ‘꽃머체’라고 부른다. 하천을 접하고 있어 일부 훼손되었다. 크기는 다르지만 행기머체와 같은 트립토돔이다. 머체 위에 살고 있는 나무는 제주를 상징하는 구실잣밤나무와 제주참꽃나무이다. 돌 위에서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꽃이 핀다. 신비스러운 자연에 숙연해진다.

힐링과 치유의 편백 숲길.
힐링과 치유의 편백 숲길.

꽃머체를 지나면 출발지인 조랑말체험공원으로 들어서고 쫄븐갑마장길이 마무리된다.

길을 걷다 보면 그 길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는 때가 있다. 그 풍경을 두고 서둘러 나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때이다. 아쉬워서 왔던 길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쫄븐갑마장길이 그러했다.

두 개의 오름, 숲길, 여러 역사 이야기가 있는 길은 홀로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기도 좋고, 같이 걸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기에도 참 좋은 길이다. 자연이 만들어준 치유의 숲에서 위로 받고, 출렁이는 억새를 보며 삶의 환희를 느끼고, 돌덩어리 위에서 자라는 나무를 보며 생명의 위대함을 느끼며 걷는 아름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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