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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피플] “그림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린 작품들입니다”

글 서현우 기자 사진 김영자 제공
  • 입력 2020.09.0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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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를 그리다’ 개인전 개최한 산악인 화가 김영자

“보통 화가들은 피사체를 멀리 두고 그림을 그립니다. 하지만 제 그림은 반대예요. 그림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린 그림들입니다. 경이로우면서도 혹독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운 히말라야 고산등반의 경험, 그 분투의 시간을 직접 녹여 냈기 때문입니다.”

화가로 변신한 여성산악인 김영자씨가 남양주아트센터에서 지난 8월 13일부터 19일까지 두 번째 개인전 ‘기억의 저편! 안나푸르나를 그리다’를 개최했다. 김씨는 한국 여성 최초로 안나푸르나(8,091m)를 등정한 산악인이다. 그는 1984년 12월 7일 캠프4를 떠나 10시간여 사투 끝에 정상을 밟았지만, 정상 등정 사진을 촬영한 셰르파가 하산 중 폭풍설에 휘말려 추락사해 국제 산악계로부터 등정 성공에 대해 공인을 받지 못했다.

1982년 1차 안나푸르나 원정 때 후배 1명과 셰르파 2명이 눈사태로 목숨을 잃고, 1984년에는 2명의 셰르파가 또 목숨을 잃은 상황에 대한 죄책감과 회의감으로 인해 그는 결국 산을 떠났다. 같은 산악인이었던 남편과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한 생활을 보낸 것도 잠시,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2003년에는 파킨슨병에 걸리고 말았다. 지금은 기적적으로 병세가 호전됐지만 여전히 17년째 병마와 싸우고 있는 상황이다.

험난한 삶의 질곡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어린 시절의 꿈을 좇기로 결심했다. 2013년부터 유화를 배우기 시작한 김씨는 5년 만에 동호회 그룹전을 세 번 치르고 전국 공모전에 3회 입상하는 등 현재 착실하게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어요. 당시에는 기법이나 표현이 다소 서툴렀던 점이 있어서 아쉬움이 남았었어요.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200점가량의 그림을 더 그리면서 작품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번에 출품한 작품은 이 중 선별한 57점입니다. 30여 점은 안나푸르나 등반 당시 고생을 거듭했던 캠프2~캠프4 구간의 기억들을 그렸고, 나머지 작품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과 인천 십정동 마을처럼 재개발에 밀려 사라진 마을들을 그렸어요. 기존의 유화 작품과 더불어 먹물과 아크릴을 사용한 작품들도 새롭게 전시했어요.”

그의 작품은 여느 산악사진, 산악그림과는 다른 결을 가진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얼마나 자연이 아름답고 장엄한지를 보여 주는 데 치중하는 반면 그는 하얀 설산의 이면에 감춰진 공포와 상처, 죽음을 끄집어내 캔버스 전면에 배치했다.

“35년이 지났지만 히말라야 원정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끊임없는 분투와 참혹한 사고들. 고산등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할 이야기들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령 일부 작품의 하단에는 잠들어 있는 고래들을 그렸는데 이는 죽은 산악인들의 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등반 도중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의 이루지 못한 명예와 상처로 얼룩진 검푸르고 시퍼런 설산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오시는 분들 모두 이런 포인트를 감안해서 작품을 감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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