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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환경-자연 영화③ | 다크 워터스] ‘댁의 프라이팬 안녕하십니까?’ 코팅제 유해성 10년간 추적한 변호사

글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 입력 2020.10.0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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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기업 듀폰에 맞선 법정 투쟁 다룬 실화

동양의 고전으로 꼽히는 <논어>는 주지하다시피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유교 경전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가 펼친 사상이 제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듯, 공자의 사상은 그 제자들의 노력으로 책으로 묶여 2,500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통상 위魏나라 하안何晏의 주석서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고 본다. 책 이름에 대해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은 “이 책은 공자의 문인에게서 나온 것이다. 먼저 자세히 따진 뒤에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야 기록했으므로 ‘논論’이라 하였다. ‘어語’란 논란에 대해 대답하고 설명한다는 말이다”라고 기술했다.

그러한 논어에 107회나 언급되고 있는 단어가 ‘군자君子’이다. 그 횟수만큼 공자가 중요하게 여긴, 공자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인간형이다. 사실상 논어는 이 군자에 대한 이해가 관건이라고 보면 된다. 



논어에서 군자에 대한 서술은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가령 “군자는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지만, 소인은 수준이 갈수록 떨어지는 사람이다”라면서 소인은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깊은 사고가 불가능한 사람라고 꼬집는다.


또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면서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가 군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거대 기업을 상대로 10년 넘게 혼자서 힘든 소송을 이끌어간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다크 워터스Dark Waters> (감독 토드 헤인즈, 2019)를 보다 보면, 공자가 이상적 인간 유형으로 제시한 ‘군자’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군자의 현대 영어 표현이 ‘noble man’ 내지 ‘man of virtue’일 텐데, 영화를 지켜보다 보면 주인공의 행보에 절로 박수를 보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998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대형 로펌 ‘태프트’에 낡은 행색의 남자가 찾아온다.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농부 ‘월버 테넌트’(빌 캠프)는 다짜고짜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을 만나게 해달라고 고집을 피운다.


회의 시간에 비서에 의해 불려나온 롭에게 월버는 “내가 키우던 소들이 원인 모를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면서 비디오테이프로 가득 찬 상자를 내밀며 “거대 기업 ‘듀폰’을 고발하고 싶다”고 말한다.


막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한 롭 빌럿은 “나는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변호사이니 지역 변호사를 찾아가라”고 퇴짜 놓지만, 월버는 롭의 할머니 소개로 왔다면서 “자료를 한번 훑어나 보라”며 자리를 뜬다.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에 찜찜했던 롭은 웨스트버지니아로 향해 듀폰이 사들였다는 매립지 부근을 살폈고, 계곡 바닥의 돌들이 하얗게 변색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현지인 월버는 “계곡 물이 모두 오염돼 있으며 이 물을 마신 우리 소 190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고 분노했다. 게다가 이 지역 아이들의 치아는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다수의 주민이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듀폰의 반응은 “축사 관리를 잘못한 개인의 책임이며, 가축의 떼죽음은 전염병 탓”이 전부였다. 분노한 롭 빌럿은 소속 로펌에 “듀폰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고, 반反기업적 소송에 우려를 표명한 대부분의 변호사와 달리 로펌 대표 톰 터프(팀 로빈스)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은 당연히 고발되어야 한다. 이러니 미국 국민들이 변호사를 혐오하는 것”이라면서 롭의 편에 선다.

롭은 포스트잇을 일일이 붙여가며 그 모든 자료를 정리, 분석했고 ‘PFOA’라는 정체불명의 화학성분이 수십 년 동안 듀폰사 제품에 사용돼 왔음을 알아낸다.
롭은 포스트잇을 일일이 붙여가며 그 모든 자료를 정리, 분석했고 ‘PFOA’라는 정체불명의 화학성분이 수십 년 동안 듀폰사 제품에 사용돼 왔음을 알아낸다.

비디오 자료를 근거로 1970년대 이후 듀폰의 실험 자료들을 넘기라고 압박하자, 듀폰은 전혀 정리되지 않은, 사무실을 가득 채울 수백 박스 분량의 자료를 로펌으로 배달한다. ‘너 어디 한번 골탕 먹어 봐라’였다.


그러나 롭은 포스트잇을 일일이 붙여가며 그 모든 자료를 정리, 분석했고 ‘PFOA퍼플루오로옥타오익 애시드’라는 정체불명의 화학성분이 수십 년 동안 듀폰사 제품에 사용돼 왔음을 알아낸다. ‘C8’로 약칭되는 이 성분은 당시 미국 가정에서 하나쯤은 갖고 있었던, 듀폰의 히트 프라이팬 ‘테프론’에 다량 함유된 것은 물론, 음식 포장지, 유아용 매트, 종이컵 등 다양한 제품에 포함돼 있었다.


듀폰은 비공개 임상 실험을 통해 C8이 각종 질병과 암, 심지어 기형아 출산까지 초래하는 유해 성분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막대한 이익을 위해 이를 숨긴 채 제품을 제조, 판매해 왔고, 그 성분이 함유된 오수를 하천에 무단 방류해 온 것이다.


미국 환경보호국에 듀폰의 불법 자료를 전달한 롭은 ABC, CNN 등 유수의 언론 매체에 듀폰의 실체를 폭로하고, 이 소식은 세계로 확산된다. 이 대목에서 국내 MBC 9시 뉴스의 2006년 실제 방송 화면도 등장한다.


듀폰은 ‘정보 은폐’ 혐의로 환경보호국으로부터 192억 원의 벌금을 추징당하지만 이는 듀폰의 1년 수입에도 미치지 못한 액수였다. 더구나 듀폰은 이 벌금만으로 과거의 모든 악행을 상쇄하려는 시도를 정계와 과학계, 언론계 커넥션을 통해 노골화했다.


이에 롭은 월버가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 전부를 대상으로 한 임상 검사를 요청한다. 그 결과 6만9,000여 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혈액 샘플이 중립적인 과학 연구팀에 전달됐다.


엄청난 규모의 정밀 역학 조사인 만큼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자, 주민들의 원성은 높아가고, 의뢰인들이 떨어져 나간 롭과 그의 아내 ‘사라’(앤 해서웨이)의 고통도 극에 달한다.


혈액 샘플이 넘어간 후 7년이 지난 2015년 드디어 롭은 연구소로부터 “PFOA가 신장암, 고환암, 갑상선 질환, 궤양성 대장염 등 중증 질병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첫 문제 제기가 이뤄진 지 20년이 흐른 2017년 3,535건의 대규모 집단 소송의 결과로 총 8,000여 억 원의 보상금 배상 판결이 차례대로 내려졌다.


영화의 주연인 마크 러팔로는 2016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듀폰 최악의 악몽이 된 변호사The Lawyer Who Became DuPont’s Worst Nightmare’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고 직접 제작에 나서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열렬한 환경 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토드 헤인즈 감독에게 직접 쓴 각본을 보내기도 할 만큼 의욕적으로 영화 제작에 임했다.


벨벳 골드마인 Velvet Goldmine(1998), 캐롤(2015) 등 화제작을 만들어온 토드 헤인즈 감독은 최대한 감성적 터치를 자제한 건조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시종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극 흐름의 완급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러닝타임 127분을 늘어짐 없이 긴장감 있게 끌어가는 데 성공했다.

가습기 살균제 파동을 직접 겪었고,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누출 사고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우리로서는 코로나19 사태로 생활 안전의 중요성과 심각성에 대해 과거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는 즈음이다.


<다크 워터스>야말로 아주 잘 만든 환경영화이자, 공자의 ”군자는 의에 기뻐하고 소인은 이익에 기뻐한다“는 논어 말씀에 똑 떨어지는 한 인물이 벌이는 정의로운 행동이 얼마나 큰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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