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IKING | 두타산] 정상을 포기하자 꿀맛 같은 휴식이 찾아왔다

  • 글·사진 김강은 벽화가
    입력 2020.10.14 07:49

    친구들과 오른 두타산 무릉계곡… 느린 붓질 같은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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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타산의 수려한 산세를 그림으로 담았다.
    2020년은 지루하지만, 계절은 짧게 느껴진다. 마음 놓고 누린 적이 없어서일까.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 채 지나가버리는 계절의 변화가 새삼스럽다. 지난여름은 돌이켜보면 긴 장마와 여러 번의 태풍,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한 축축한 기억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에겐 ‘산’이 있다는 것. 인적 드문 자연 속으로의 산책은 바이러스로부터 벗어나 유일하게 숨통을 트일 시간이 되어주니까 말이다. 이전만큼 자주 찾지 못하지만, 몇 안 되는 달콤한 추억을 꺼내어 살살 녹여 먹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짧지만 강렬했던 여름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어둠 속에서 반짝였던 한 줄기 빛을, 짙푸른 녹음과 뜨거움으로 꽉 찬 두타산을 만났던 그 날을.
    공들인 결정보다 우연한 선택이 성공적일 때가 있다. 두타산은 다른 산행 계획이 비 소식 때문에 무산되면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평일 아침, 절친한 두 친구와 함께 이른 기차를 타고 동해역에 닿았다. 동해역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파란 간판을 보니 대학시절 ‘내일로’를 타고 떠나온 꼬꼬마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일로’는 여름에 한해 판매하는 20대를 위한 무궁화호 자유이용권이다. 하지만 무궁화호가 아닌 KTX 고속열차를 타고 왔다는 사실은 세월의 속도를 느끼게 한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사춘기 소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두타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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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함께 바위 위에 올라 신선이 된 듯 황홀한 경치를 즐겼다.
    현실판 무릉도원, 두타산 무릉계곡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무릉계곡 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계곡 따라 이어지는 산행은 무척이나 여름스럽다. 긴 장마로 불어난 계곡 물소리는 더없이 풍성했다. 너른 무릉반석을 만나자 하마터면 오늘 산행은 없었던 걸로 하고 물놀이를 할 뻔 했다. 신선이 거니는 세계로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하여 무릉도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무릉계곡은 최적의 여름 물놀이 장소였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았고, 현재는 명승지이자 유명 관광지이다.
    매미는 목이 쉬어라 울어댔고 향긋한 숲의 냄새가 무뎌졌던 세포들을 깨운다. 삼화사, 호암소, 관음폭포를 지나 산성갈림길에서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재잘대던 친구들의 입에서 말소리 대신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스틱에 몸을 반 이상을 싣고선, “스틱 없었다면 어쩔 뻔 했냐”는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커다란 바위가 우리의 시야를 점령했다.
    바위에 올라선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순간 풍경에 놀라 “얘들아 이리 와봐! 이건 정말 미쳤어!”하고 외쳤다. 너른 암반과 사방에 펼쳐진 병풍 같은 기암들, 꽉 찬 짙은 녹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폭포 소리, 하얀 바위 틈에서 자란 소나무가 만들어낸 서늘한 그늘. 자연 만이 줄 수 있는 꿈같은 선물이었다.


    정상을 포기하자 꿀맛 같은 휴식
    이 풍경을 그냥 지나친다면 마음이 가난한 산꾼이다. 우리는 배낭을 풀고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고민이 시작됐다.  6시간을 내리 걸어 정상을 찍고 내려올 것인가? 정상은 가지 않더라도 여기서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낼 것인가?  우리 셋은 말없이 눈빛 교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정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 여기서 우리의 여름휴가를 보내자!”고 입을 맞췄다. 산행 시작 1시간 만에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에 한 번 웃었고, 아무도 없는 산으로 여름휴가를 온 것에 두 번 웃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못 말리는 여자들이다.
    배낭을 잠시 내려두고 두타산성을 따라 가볍게 올랐다.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 뒤로 거대한 절벽에서 비단처럼 떨어지는 십이폭포가 나타났다. 가히 설악산 못지않은 대자연의 스케일이었다. 거북이 등을 타고 고운 폭포의 미스트(피부 수분 공급을 위해 뿌리는 화장수)를 맞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다. 
    우리는 각각 마음에 드는 바위를 골라 돌침대 삼아 기대었다. 한 친구는 책을 펼쳐 들었고, 다른 친구는 여행 영상을 만들었다. 나는 팔레트를 열었다.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어 더 꼼꼼히 두타산의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더 느리게 초록의 붓질을 했다. 이 순간은 세상과 잠시 담을 쌓은 나만의 시간,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나만의 화실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산을 찾는 이유는 정상 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품에 잠시 머물며 그 에너지를 얻어가고자 하는 것임을. 그리고 다시 한 번 체감했다. 곱씹어보는 풍경과 느린 붓질, 명상의 시간, 돌침대 위에서의 달콤한 낮잠. 멈춰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정상에 올라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듯, 우리는 이미 행복이라는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닐까? 달콤한 에너지를 가득 채웠으니, 남은 계절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곧 더 좋은 계절이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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