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치유 걷기 르포] 소방관은 불 탄 숲을 끄고, 숲은 소방관의 불 탄 ‘마음’을 끈다

입력 2020.11.13 09:49

‘우울증 고위험직’ 소방관, 대관령옛길 걸으며 힐링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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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효 소방관이 금강소나무 아래에서 솔방울차를 즐기고 있다.
숲은 힐링과 치유의 장소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전쟁터다. 그들이 산을 찾을 때면 숲은 푸른색이 아닌 시뻘건색으로 변해 있고, 향긋한 피톤치드 향기 대신 매캐한 타는 냄새와 그을음으로 가득 찬다. 강원 지역 산불발생 시 초기 대응을 위해 신속 출동하는 강원소방본부 직할구조대 환동해특수재난대응단 소속 소방관들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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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산 곳곳에는 좋은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릉시내 일원과 동해바다.
소방관들은 대표적인 우울증 고위험직종이다. 소방청이 발표한 <2019년 전국 소방공무원 마음건강 전수조사>에 따르면 소방공무원 5만 명 중 4,400여 명이 최근 1년간 극단적 선택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로 전 사회에 우울감이 깊어가고 있는 ‘코로나 블루’ 시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불철주야 근무하고 있는 소방관들의 힐링이 절실하다.
환동해특수재난대응단 소속 소방관 김재효, 이상호, 이광빈씨와 함께 대관령 치유의숲을 찾았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산불발생 초기 신속 출동해 대형화재로 번지는 산불을 사전차단하고, 태풍, 집중호우 등 자연재난에 대응하며 환동해권역에 소재해 있는 산업시설을 보호하는 것이다. 산림치유지도사인 대관령 치유의숲 김진숙 센터장과 대관령숲 안내센터 차미숙 팀장이 이들의 힐링을 도왔고, 대관령 치유의숲 지역상생협의회 남흥기 회장도 뜻을 같이 모았다.
“보통 산림 치유를 받으려는 분들은 치유의숲 센터로 곧장 오셔서 센터 내 산책로를 이용하는데요, 소방관분들이라면 체력이 괜찮으니 대관령옛길 따라서 제왕산帝王山을 오른 뒤 치유의숲으로 오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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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고속도로와 소나무 고사목, 동해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제왕산의 뷰포인트.
강릉 시내와 동해바다 조망 압권
차미숙 팀장의 제안에 따라 치유의숲이 아닌 대관령숲 안내센터를 들머리로 잡았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영동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향해 오른다. 차 팀장은 “이 기념탑은 1975년에 설치됐다. 탑까지 오르는 계단은 총 108개인데 아마 불교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등산로는 기념탑 오른쪽에 있다. 기념탑의 해발고도는 865m, 올라야 하는 제왕산의 해발고도는 841m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려가야’ 하는 산행인 셈이다.
“제왕산은 겨울에 눈 산행을 즐기기 위해 많이 찾는 산입니다. 등산객 대부분이 여기서 제왕산을 지난 뒤, 대관령 옛주막 터 방면으로 내려서죠. 보통 치유의숲 내 등산로가 표기돼 있는 지도가 많지 않아서 치유의숲도 같이 돌아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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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치유의숲 금강소나무숲은 걷기만 해도 힐링되는 좋은 숲길이다.
남흥기 회장의 설명을 들으며 가을에 접어들고 있는 알록달록한 숲길에 들어선다. 숲길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어 평지에 가깝다. 울창한 참나무 숲과 낙엽송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20여분쯤 길을 잇자 나무데크로 된 전망대가 나온다. 동쪽으로는 강릉 시내와 그 너머 경포대와 독립문같이 솟은 스카이베이 경포, 그리고 쪽빛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남북으로 길고 힘차게 뻗은 백두대간이 유유히 흘러간다. 북쪽으로는 선자령 정상부의 들판 일부가 흘긋 엿보이고, 남쪽에는 능경봉이 우뚝 솟았다. 차 팀장은 “제왕산은 대관령 동쪽 난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능선 상의 조망이 무척 시원하다”고 설명했다.
잠시 이어지던 숲길은 곧장 임도를 만난다. 제왕산 중턱을 굽이도는 임도로, 매년 추석 명절 기간에만 성묘객을 위해 개방되며 평소에는 차량으로 출입할 수 없다. 임도 오른편에는 울창한 잣나무 숲이 솟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잣나무 밑에서 휴식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곳에선 조심해야 해요. 잣나무 밑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는 작은 동물들을 노리는 뱀들이 많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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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살아서도 수려한 멋을 뽐내고 있는 소나무가 제왕산 정상부에 들어서 있다.
아름다운 소나무 고사목도 볼거리
산책하듯 임도를 마저 따라가다가 제왕산 이정표가 선 갈림길에서 남동쪽으로 가라앉는 임도를 버리고 능선을 향해 오른다. 지금껏 너무 평탄한 길을 걸은 탓인지 살짝 빠듯하지만 큰 어려움은 없다. 가끔 전망이 열릴 때면 대관령부터 동해바다가 한눈에 훤히 들어온다. 능선 중간중간 멋들어진 소나무 고사목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이 펼쳐진다.
“제왕산 능선에선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이 제대로 보여요. 옛날에 한 선비가 곶감 한 접(100개)을 들고 대관령을 넘으며 한 굽이를 돌 때마다 곶감 하나씩을 먹었다고 해요. 굽이굽이 돌며 대관령을 다 넘고 나자 딱 곶감 하나만 남아서 대관령에 아흔아홉 굽이란 말이 붙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보면 39개밖에 되지 않아요.”
차 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잠시 땀을 식히고 이내 제왕산 정상에 올랐다. 이상호 소방관은 바람 부는 방향으로 가지가 길게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에 잠시 안겨 휴식을 취한다. 이씨는 “가만히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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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산 숲길은 전반적으로 평탄해 걷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제왕산은 이름으로 연상할 수 있듯이 왕과 관련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요. 태조 이성계에 의해 폐위된 고려 32대 우왕(1365~1389)이 강릉에 유배된 뒤 두 달 만에 살해됐는데 강릉에 있을 적에 이 산에 산성을 쌓고 살았다고 해서 왕산이라 불렸다가 후에 제왕산으로 바뀌게 됐다고 합니다.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유배 중인 왕이 단 두 달 만에 산성을 쌓기는 불가능했을 테니 산성은 우왕 유배 전부터 있었고, 우왕의 고사는 사후에 붙여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산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가끔 등산로 근처에서 토기나 기와 파편을 볼 수 있답니다.”
높고 공활한 가을 하늘과 푸른 동해바다가 연출하는 그러데이션을 즐기며 동쪽 능선을 따라 내리막을 잇는다. 거대하고 울창한 금강소나무숲이 산비탈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내리막의 경사가 제법 급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임도를 가로질러 건넌 뒤, 또 한참을 하산하면 갈림길인 안부가 나온다. 왼쪽 계곡을 따라 내려서면 대관령 옛주막 터로 하산하는 일반 등산로이며, 그대로 직진하면 치유의숲 산책로로 접어들 수 있다. 갈림길에는 ‘치유의숲 31번 포인트’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어 이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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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센터장의 지도에 따라 바디스캔 명상을 체험하고 있다.
솔방울차 마시며 금강소나무숲서 가진 치유의 시간
“치유의숲 내에는 치유마루길, 물소리숲길, 연결숲길, 소나무숲길, 솔향기 터 등 많은 산책로와 산림욕장이 조성돼 있어요. 센터 내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으면 따로 입장료가 없어 자유롭게 거닐 수 있습니다.”
치유의숲 산책로로 접어들자 곧장 수피가 붉고 곧게 자란 훤칠한 소나무들이 마중 나온다. 1920년대 씨앗을 뿌려 조성한 임령 100년 이상의 금강소나무들이다. 김진숙 센터장은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엔 이 숲에서 숲태교, 쏠쏘올 테라피, 숲치유명상, 바디스캔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했다”며 “지금은 비대면 셀프 산림치유 키트를 만들어서 방문객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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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선 산림치유지도사가 아로마테라피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아로마테라피 진행 순서 ① 아로마오일을 손등에 충분히 바른다. ② 손목 주변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준다. ③ 손등의 뼈와 뼈 사이 부분을 지압해 주고, 손가락 관절 사이와 손톱 옆을 지그시 눌러 준다. ④ 손바닥과 손날도 전체적으로 꼼꼼히 마사지해 준다.
키트에는 총 3가지 물품이 담겨 있다. 솔방울차와 야생화 색칠, 아로마테라피다. 솔방울차는 대관령 치유의숲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으로, 고유의 노하우로 여러 번 솔방울을 볶아내 독소 성분을 빼내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솔방울차는 잇몸질환, 구취제거, 치주질환에 도움을 주고 항염 작용을 해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고, 피도 맑게 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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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으로 돌아가 즐겁게 색칠공부를 하는 소방관들.
“솔방울을 우려내 마신다니 생각도 못 했습니다. 사실 화재 현장에서는 솔방울이 그렇게 미울 수 없습니다. 올해 발생했던 고성 산불 현장에서도 불붙은 솔방울의 불티가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는 통에 진압에 무척 애를 먹었거든요. ‘이승에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주택 방어를 위해 벌인 사투, 포탄과 탄약으로 가득 찬 군부대 탄약고를 지키기 위해 지새웠던 밤까지 몸도 고되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꼭 소방관들은 불이 나야만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시에도 다양한 업무를 봐야 하죠. 다른 직장인들과 똑같이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그동안 이를 제대로 풀지 못했는데 근무지 바로 옆에 이렇게 좋은 숲이 있는지, 또 등산이 이렇게 즐거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소방관들의 고충을 하나, 둘씩 들으며 솔방울차를 음미하고, 아로마테라피도 체험해 본다. 산림치유의 마지막 시간은 바디스캔 명상. 금강소나무 밑에 편하게 누운 채 김진숙 센터장의 지도에 따라 명상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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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들이 색칠한 야생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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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치유의숲에서 대여할 수 있는 비대면 셀프 산림치유 키트.
“먼저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 다음은 코끝과 볼을 스치는 바람, 코로 들어오는 숲의 향기도 느껴보세요. 자 심호흡을 한 번 깊고 크게 해볼게요. 숨을 빼고- 또 깊게 들이쉬고-. 코로 들어가는 들숨과 날숨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보세요. 이제 신경을 온 몸 구석구석으로 돌려볼게요. 내 몸에 아픈 곳이 어딘지, 편안한 곳은 어딘지 하나씩 찾아보세요. 아픈 곳까지 맑은 공기가 전달되도록 힘껏 숨을 들이 마셔보세요.”
향긋한 숲의 향기가 화마와 싸우다 다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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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치유의숲에서 판매하는 ‘솔찬 도시락’으로 식사를 마쳤다. 대관령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지역주민이 직접 만든 도시락이다. 사전 예약 필수. 현재는 치유의숲 센터에서만 수령할 수 있게 돼 있지만 향후에는 비대면 셀프 산림치유 키트와 더불어 대관령마을 휴게소 인근에 위치한 대관령숲 안내센터에서 수령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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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과 맞서 싸우고 있는 강원소방본부 직할구조대 환동해특수재난대응단 소속 소방관들. 사진 김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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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치유의숲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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