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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11월의 섬 낭도] 싸목싸목 젖어드는 낭만에 대하여

글 신준범 차장대우 사진 주민욱 기자
  • 입력 2020.11.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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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륙교 놓인 여수의 오지 섬…산행과 둘레길 결합한 11km 당일 코스

조각 같은 바위가 해안선을 이룬 낭도의 해변. 우측 멀리 낭도등대가 보인다. 좌측의 닿을 듯 가까운 섬이 사도.
조각 같은 바위가 해안선을 이룬 낭도의 해변. 우측 멀리 낭도등대가 보인다. 좌측의 닿을 듯 가까운 섬이 사도.

섬은 날 때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에서 망망대해의 거리를 두고도 씩씩하게 잘 살아낸다. 고독을 숙명으로 여기는 섬은 거리두기 시대의 모범인지도 모른다. 조금 고독해지는 곳으로 망명이 필요한 시절이다.

먼 섬으로의 망명은 시작부터 좌초되었다. 쾌속선이 고장나 당분간 이곳 선착장엔 배가 정박하지 않는다며 부두 관계자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일러 주었다. 다른 선착장으로 가면 오후 배로 들어갈 순 있지만, 내일 파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어 하루 이틀 못 나올 수 있다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친절히 해주었다. 먼 섬은 먼 섬으로 남겨두고 가까운 섬으로 발길을 돌렸다.

접근성 좋고 자연미도 살아 있는 섬, 낭도였다. BAC 섬&산 100에 이름 올리고 있으면서, 올해 연륙교가 놓여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섬이 가까이 있었다. 15년 동안 예산 6,684억 원을 들여 만든 다리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개통식도 열지 못한 비운의 다리를 건너 낭도를 만난다.

편안한 오솔길이 여유롭게 이어지는 상산 능선길.
편안한 오솔길이 여유롭게 이어지는 상산 능선길.

고흥 영남면과 여수 화양면 사이 4개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너 여우 품에 들었다. 섬의 모양이 여우를 닮았다 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여우 호狐가 아닌 이리 낭狼자를 쓴다. 낭도는 연륙교가 놓인 4개의 섬 중 가장 크다. 면적이 5㎢, 해안선이 20㎞, 200여 가구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여산과 규포 2개 마을이 있으며 대형주차장이 있는 여산마을이 섬의 중심이다. 여산麗山은 ‘이곳 산이 아름답다’하여 유래한다.

골목 곳곳엔 ‘낭만낭도’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관광 명섬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코로나19로 인해 일단 멈춘 듯 보인다. 만든 지 오래되지 않은 대형주차장이 텅텅 비었다. 덕분에 맑은 하늘과 코발트빛으로 펼쳐진 바다를 독차지한다. 코로나로 경제는 한껏 움츠러들었지만 지구는 정화의 시간을 번 듯하다. 지평선 끝의 윤곽이 드러나는 깨끗한 날이 늘었다.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손창건씨와 청주에서 온 최희원씨가 등산화 끈을 질끈 묶는다. BAC 인증지점은 섬 최고봉인 상산(279m) 정상이다.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올랐다가 해안으로 내려와 둘레길을 따라 여산마을로 돌아오는, 꽉 찬 당일 낭도 여행이다. ‘싸목싸목 걷는 섬 낭만낭도’ 안내판을 따라 골목으로 접어든다. ‘싸목싸목’은 ‘천천히’의 전라도 방언이다.

BAC 인증지점인 상산 정상에 오른 손창건·최희원씨. 싱그런 미소만큼 하늘이 맑다.
BAC 인증지점인 상산 정상에 오른 손창건·최희원씨. 싱그런 미소만큼 하늘이 맑다.

이내 임도를 따라 능선에 올라서니 아무렇지 않게 남해안 비경이 툭 터진다. 코스모스 마중하는 시멘트길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 여유로운 오솔길이 상산 등걸 따라 이어진다.

악착같이 세력을 넓히는 초록이 아닌, 듬성듬성 여유로운 초록이다. 적당히 거리를 띄운 나무 사이로 햇살이 충분히 바닥에 스며들어 초본류가 무성하게 부풀어 올랐다. 한 걸음 느리게 걸어야 어울릴 것 같은, 싸목싸목 걷고 싶은 숲길이다.

바위 사이를 점프하듯 건너고 있다. 둘레길은 해안선 안으로 이어져 있으며, 썰물일 때만 해안 바윗길을 지날 수 있다. 해안 바윗길은 별도의 정비된 길이 없어 주의해야 한다.
바위 사이를 점프하듯 건너고 있다. 둘레길은 해안선 안으로 이어져 있으며, 썰물일 때만 해안 바윗길을 지날 수 있다. 해안 바윗길은 별도의 정비된 길이 없어 주의해야 한다.

느리게 걸어도 전망대는 금방이다. 앙증맞은 풍경을 보고서야 데크를 세울 만한 곳임을 실감한다. 6개의 미니 섬이 끊어질 듯 이어진 사도沙島가 물감으로 그린 것 마냥 빛깔 고운 바다 위에 솟았다. 무뚝뚝한 이름과 달리 귀여움이 출중하여 BAC 섬산 100에도 이름 올렸다. 

6개의 섬이 이어진 사도를 배경으로 낭도 해안 둘레길이 이어진다.
6개의 섬이 이어진 사도를 배경으로 낭도 해안 둘레길이 이어진다.

500년 수령의 장비 같은 소나무


정상을 향해 열 올리던 다리 근육을 멈춰 세운 건, 장판교의 장비 같은 거대 소나무다. 박력 넘치는 수형으로 외길 등산로를 막고 섰다. 500년 넘는 세월 동안 낭도를 지켜온 소나무는 섬을 대표하는 명물 중 하나가 되었다. 곁에는 벤치를 마련해 나무를 천천히 감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수풀 사이로 보이는 미니 열도는 덤이다.

갈림길을 무시하고 직진해 고도를 높이자 마침내 돌무더기가 있는 정상. 둘러싼 나무가 높아 높을 상上을 쓰는 산 이름만큼 시원하진 않지만 둔병도와 조발도, 여수 내륙이 처음으로 드러난다. 낭도산, 상신봉으로도 불린다. 정상 표지석이 인증지점이며, 칡넝쿨로 뒤덮인 바위더미는 봉화대로 추정된다.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곳이며, 인근 섬들의 대장 섬인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산인 것.

해안 둘레길로 내려갈 차례다. 왔던 길을 조금 거슬러 역기미로 내려선다. 성격 급한 능선이 곤두박질치듯 가파르게 고도를 내리고, 흙부스러기에 미끄러질새라 신중을 기해 느리게 내려선다. 비로소 평평한 역기미삼거리에 닿자 힘주어 버틴 발바닥의 뜨거움이 느껴진다. 뙤약볕은 아직 위세 등등해 한 사발 땀을 통행세로 걷어간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 간식을 삼키자 비로소 눈의 초점이 맞는 듯 먼 섬이 또렷이 보인다.

홀로 도도하게 솟은 낭도등대.
홀로 도도하게 솟은 낭도등대.

여름으로 돌아간 듯 작열하는 태양이 따갑게 낭도 곳곳을 내리쬔다. 꽉 조인 허리띠를 푼 듯 걸음에 나사가 풀린다. 해안 사면을 따라 이어진 둘레길이 뭍에서 온 사내의 마음을 풀어헤친다. 문득 푸근한 주름의 할매가 나타나 100년 전통의 낭도막걸리를 권해 줄 것만 같다. 이웃한 새끼섬 사도에 젖샘이란 샘터가 있는데 여기서 난 물로 빚은 막걸리다. 옛날 산모가 정성을 다해 빌면 젖이 많이 났다고 하며, 이 샘물로 씻으면 젖이 샘처럼 솟았다고도 전한다.

해안 숲길이 지루할 쯤 속내를 읽은 낭도가 장사금해변을 깜짝 선물로 내어준다. 능선에서 보았던 비밀스런 해변이 바로 여기다. 모래가 길게 비단처럼 펼쳐져 있다 하여 장사금이라 불리는데, 이름과 달리 작은 해변이지만 고도의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어 흡인력 있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주변에는 건물은 물론이고, 흔한 미역 줄기, 해양 부스러기조차 없는 고운 모래로 은밀히 미모를 드러낸다. 한 연인이 해변을 독차지해 걷는 모습이 무척 낭만적이다. ‘낭만낭도’라는 별명은 장사금해변에서 시작된 게 분명하다.

이정표를 따라 해변을 나오자 찻길 건너편의 붉은 컨테이너 매점이 눈에 띈다. 출출하던 차 우리는 모든 메뉴를 다 주문해 배를 채웠다. 찐빵, 고기만두, 김치만두, 매실음료, 아이스커피까지 메뉴가 단출해 무리는 아니었다. 도로 끝에 이르자 추도와 사도가 드러나는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화장실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차박하기 좋은 장소로 제격이다.

여산마을에서 상산 능선으로 이어진 마을 임도.
여산마을에서 상산 능선으로 이어진 마을 임도.

용 같은 파도가 드나드는 쌍용굴

산길로 들어서자 웬 고양이가 우리를 따라왔다. 경계심 없이 다리에 꼬리를 감으며 애정을 표현했다. 쓰다듬어 달라고 벌러덩 배를 보이며 드러눕는 것이 사랑스러웠으나, 행여 난폭한 사람에게도 경계 없이 다가갈까 걱정되었다. 한동안 앞장서며 길 안내하던 녀석은 간식을 줘도 먹지 않고 도도하게 굴더니 숲으로 사라졌다.

둘레길은 다시 바닷가로 길을 잡았다. 풀이 높은 희미한 길을 헤치고 지나자 공룡 발자국이 있을 것 같은 침식해안이 드러났다. 자유형으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을 듯 사도가 지척이었다. 배로 5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암벽등반하듯 양손을 쓰며 2~3m의 낮은 바위를 넘어서자 흰 남포등대가 공룡처럼 서 있었다.

귀여운 고양이가 나타나 길 안내를 해주었다.
귀여운 고양이가 나타나 길 안내를 해주었다.

마침 썰물이라 어렵지 않게 해안바윗길을 따라 등대에 닿았고, 야생의 태양이 다 꿰뚫어버릴 듯한 강렬한 기세로 남은 말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저토록 직선적으로 뜨겁게 소멸할 수 있다니, 저토록 멋들어지게 작별을 고할 수 있다니, 부러웠다.

다시 둘레길을 따라 들자, 신선대였다. 조심스레 주상절리를 지나 쌍용굴을 볼 수 있었다. 해안 절벽에 난 두 개의 굴로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친 용의 몸사위처럼 거칠게 파도가 튀어 오르는 것이,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둘레길을 너무 쉽게 생각했을까. 촬영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서일까. 낭도방파제에 닿으니 사진 찍기 어려울 정도로 어둑하다. 낭도의 어둠은 성미가 급해 순식간에 소란스러운 것들 다 삼켜버리고, 우리만 덩그러니 남겨두었다. 지배적인 고요로움에 압도당했으나 순수한 저녁 기류가 두렵지 않아, 어둠 속을 걷는 것도 낭만이 있었다. 싸목싸목 조금 외롭지만 자유로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해넘이 명소인 낭도방파제.
해넘이 명소인 낭도방파제.

섬 가이드

상산 산행과 둘레길 걷기를 결합해 당일에 둘러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여산마을 선착장 앞에 대형주차장이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가 인기 있다. 여산마을 ‘낭만낭도 게스트하우스’ 앞 골목에서 이정표를 따르면 능선길로 이어진다.

직진해서 3.3㎞ 가면 정상이다. 규포마을로 하산하는 코스도 있으나 온 길을 300m 되돌아가 역기미삼거리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때 갈림길에서 희미한 오른쪽 길로 들면 안 된다. 표지기가 달린 왼쪽 길로 가야 역기미삼거리에 닿는다. 삼거리에서 완쪽으로 가면 규포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여산마을이다.

장사금해변의 산타바오거리에서 남은 시간과 체력을 감안해 해안 둘레길을 계속 갈지, 도로 따라 여산마을 주차장으로 갈지 선택해야 한다. 산타바오거리에 만두와 찐빵을 파는 컨테이너 매점이 있다. 산타바오거리에서 둘레길을 따라 여산마을로 가려면 4.5㎞를 더 걸어야 한다. 도로 따라 질러가면 1.3㎞ 거리다. 상산 산행과 둘레길 걷기를 겸한 코스는 총 11㎞이며 4~5시간 걸린다.

주민들의 얼굴을 그려 넣은 그림이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더하는 여산마을.
주민들의 얼굴을 그려 넣은 그림이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더하는 여산마을.
여산마을은 한갓진 시골 어촌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여산마을은 한갓진 시골 어촌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교통

여수시내에서 29번 버스를 타면 조발도, 둔병도를 지나 낭도에 닿는다. 적금도를 지나 고흥군 우금마을에서 회차해 다시 여수로 되돌아간다. 하루 2회(08:50, 12:15) 운행. 자가용으로 올 경우 내비게이션에 낭도선착장 혹은 화정면사무소 낭도출장사무소를 찾아서 오면 여산마을 대형주차장에 닿는다. 주차료는 무료.

숙식(지역번호 061)

낭도의 아침(010-6421-8817)은 낭도 유일의 펜션이다. 언덕에 있어 바다 경치가 좋고 낙조가 일품이다. 여산마을에는 낭도휴게소민박 (665-2726), 낭도여산민박(665-0850)이 있다. 식사도 가능하다. 여산마을에서 운영하는 낭만낭도 게스트하우스(010-9401-8929)와 폐교 운동장을 활용한 바다가 보이는 낭도오토캠핑장이 있다. 캠핑장은 밴드 ‘낭도캠핑장’에서 예약가능하다.

여산마을의 도가식당(665-8080)은 서대회무침 (3만 원)과 해초비빔밥(8,000원), 부추도토리묵 (1만 원)이 별미다. 여기에 낭도젖샘막걸리를 곁들이면 낭도의 낭만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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