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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Pitch by Pitch] ‘태국 끄라비 등반’, 모기와 소매치기 원숭이… 태국 바위는 만만치 않았다

글·사진 대학산악연맹 남윤수(서울대농대산악부 17) 부회장
  • 입력 2020.11.2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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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사이 플레이보이’ 루트를 시도하고 있는 필자. 떠오르는 태양에 소시지처럼 구워지고 있다.
‘톤사이 플레이보이’ 루트를 시도하고 있는 필자. 떠오르는 태양에 소시지처럼 구워지고 있다.

‘Pitch by Pitch’는 한 피치 한 피치 앳된 오름짓을 이어가는 대학산악부원들의 진솔하고 톡톡 튀는 목소리를 담은 연재다. 이번 호에서는 대학산악연맹 남윤수 부회장과 이주용, 권혁균 회원의 좌충우돌 태국 끄라비 암벽등반기를 다룬다. 이 등반은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이뤄졌다._편집자

2019년 가을. 찬바람이 살살 불어와 손가락 마디가 시큰거릴 무렵이 되자 우리들은 해외등반을 추진해 보기로 했다. 시간과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따뜻한 남녘, 태국 끄라비로 향했다. 처음에는 주용이 형(국민대 14), 혁균이 형(가천대 14), 종찬이 형(연세대 14),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가려고 했으나 아쉽게도 종찬이 형은 사고로 인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프라낭 비치에서 몸을 풀 겸 직벽을 오르고 있는 필자. 바위가 한국과 달리 미끄러워 완등하진 못했다.
프라낭 비치에서 몸을 풀 겸 직벽을 오르고 있는 필자. 바위가 한국과 달리 미끄러워 완등하진 못했다.

day 1~3  | 태국에서 홀로 ‘비박훈련’

시간적 여유가 조금 더 있어 이틀 먼저 끄라비로 향했다. 원래 종찬이 형과 같이 갈 계획이었지만 급작스레 하차하는 바람에 나 홀로 가게 됐다. 서울의 날씨는 한겨울이지만 끄라비는 언제나 영상 30℃를 웃돌기에 여름옷을 준비해 가야 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추가 수하물 신청을 하지 않았기에 반팔 티셔츠 여러 겹을 껴입고 겉옷 하나로 추위를 견디며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탔다. 전날 설렌 마음에 잠을 설친 탓에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다. 

어느덧 흔들리던 기체가 방콕 돈므앙 공항에 내려앉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다가오는 후끈한 공기에 태국임을 실감했다. 끄라비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혹시 나처럼 등반 온 사람이 있나 살펴보지만 모두 휴양객 행색이다.

끄라비는 비행기로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돈을 아끼고자 숙소를 따로 잡지 않고 공항에서 비박할 요량으로 잘 만한 장소를 물색해 보려는데 이게 웬걸, 끄라비 공항은 우리나라의 버스터미널 정도의 작은 규모라 누워 잘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후회하기엔 늦었기에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의자 두 개를 붙여서 잠을 청했다. 등이 배기고 빈틈투성이인 내 다리에서 한국산 적혈구로 만찬을 벌이는 모기 덕에 깊게 잠들진 못했다. 그래도 더 극한의 환경에서 잠들었을 선배 알피니스트들을 생각하며 잠자기 훈련을 이어나갔다.

형들을 기다리는 동안 태국의 거리 관광도 해봤지만 머리에 등반 생각이 가득 차 있었던 탓에 재미도 감흥도 없다. 한 번 붙어볼 만한 바위나 올라볼 만한 산이 주변에 있는지 찾아보지만 길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내 파파야 주스를 훔친 원숭이가 유유자적 남은 파파야를 음미하고 있다.
내 파파야 주스를 훔친 원숭이가 유유자적 남은 파파야를 음미하고 있다.

day 4 | 담배를 문 맨발의 클라이머 ‘미’

드디어 혁균이 형과 주용이 형이 아오낭에 입성했다. 형들과 함께 배를 타고 끄라비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해변 경관 곳곳에 멋진 암벽들이 숨어 있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등반 장비를 챙겨 바위로 향했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라일레이의 ‘1, 2, 3 wall’ 암장에서 첫 등반을 펼칠 작정이었다. 루트 초입에 도착하니 주변에 등반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지 가이드들이 휴양객들을 대상으로 암벽 등반 체험을 시켜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쭈뼛거리며 루트를 찾는데 어떤 곳이 우리가 오르려는 루트인지 헷갈린다. 일견 쉬워 보이는 루트에 일단 몸을 붙여본다. 의욕은 넘쳤는데 몸은 겁을 먹었는지 제대로 안 움직인다. 2~3차례 등반을 하고 나니 몸도 풀리고 겁도 봄눈처럼 녹아 내렸다. 이제 다른 루트에 눈을 돌린다. 한국에서 미리 봤을 때 재밌겠다고 생각한 ‘무에타이(5.11a)’라는 루트다.

호기롭게 먼저 도전한다. 한국에선 시도해 본 적 없는 형태의 등반 라인인데다가 바위의 질감도 익숙하지 않다. 한참을 낑낑대다가 결국 포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다. 다음으로 붙은 혁균이 형과 주용이 형은 멋진 무브를 선보이며 한 번에 완등에 성공한다.

우리의 모습이 인상 깊었는지 현지 가이드가 와서 인사를 건네고 옆에 있는 루트도 재미있다며 올라보라고 권한다. 그의 이름은 ‘미’. 입에 담배를 물고 맨발로 암벽을 오르내리는 실력자였다. 한국에서 그랬다면 형님들에게 호되게 야단 맞을 태도지만, 풍겨 나오는 여유와 강인함이 무척 인상 깊었다.

그의 추천에 따라 ‘치킨헤드(5.11c)’라는 루트를 시도해 본다. 역시 만만한 루트가 아니어서 첫 볼트를 넘지 못했다. 미가 와서 줄을 걸어 주고 나서야 후등으로 재밌게 등반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선등을 서서 고정로프를 걸어 주고 있는 미.
선등을 서서 고정로프를 걸어 주고 있는 미.

day 5  | 휴양지 전문 소매치기 검거! 

끄라비의 아침은 의외로 한산했다. 마주치는 사람은 모두 등반객. 우리는 오늘도 미를 만날 수 있을까 이야기하며 프라낭 비치의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측은 쉬운 직벽이지만 왼쪽으로 갈수록 기울기가 심해지는 곳이다. 몸풀이로 쉬운 직벽에 붙었는데 나는 곧바로 실패하고 말았다. 미끄러운 석회암이라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해 힘이 쭉쭉 빠졌다. 정말로 까슬까슬한 한국의 화강암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오 무렵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바위로 가자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어딘가로 바쁘게 가고 있는 미다. 그는 또 다시 재밌는 루트를 추천해 주고는 할 일이 많은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게 끄라비에서 마지막으로 본 미였다.

미가 추천한 루트는 역시 어렵고 재밌었다. 몇 번 고배를 마신 뒤 형들의 루트 공략을 지켜보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내 몫의 파파야 주스가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이 잘못 가져갔나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놀랍게도 범인은 한 마리의 원숭이였다. 원숭이가  주스를 마시는 모습이 신기하고 귀엽기도 했지만 타는 목마름 때문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등반만큼 놀고 쉬는 것도 열심히 했다. 왼쪽부터 권혁균, 이주용, 남윤수.
등반만큼 놀고 쉬는 것도 열심히 했다. 왼쪽부터 권혁균, 이주용, 남윤수.

day 6~8 | ‘그라취’와 또 다른 매력의 ‘치어 업’

6일차는 원래 휴식하는 날이었지만 가만히 있기엔 아쉬워서 다시 프라낭 해변 깊숙이 위치한 동굴로 갔다. 동작도 까다롭고 홀드도 좋지 않아 혁균이 형이 애를 먹는다. 나는 회복에 전념할 생각으로 구경만 했다.

7일차에는 한국에서부터 손꼽아 기다려온 ‘기본 루프Gibbon roof(5.12a)’ 루트에 도전했다. 이름 그대로 지붕 같은 바위로, 최대 각도는 160°에 달한다. 석회암답게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정말 재밌는 바위였다. 숙소 룸메이트였던 외국인 대니와 혼자 체코에서 등반하러 왔다는 쿠바까지 현지에서 합세해 다같이 등반을 했다. 한국에서 듣던 형님들의 구수한 ‘그라취(그렇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외국인들의 생소한 응원 소리에도 제법 힘이 났다.

8일차에는 톤사이 비치 쪽 암장에 도전했다. 이곳은 오후에 해가 뜨면 너무 뜨거워서 등반이 힘들다기에 아침 일찍 도착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등반가들이 꽤 많았다. 한국에서 검색해 본 ‘미녀와 야수’ 루트로 가니 위험하다는 이유로 루트가 폐쇄돼 있었다. 

아쉬움을 삼키며 형들이 붙어 있는 ‘톤사이 플레이보이(5.12a)’ 루트로 구경을 갔다. 

이곳 암장은 대체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탓인지 곳곳에서 멋있고 손에 땀을 쥐는 무브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나도 동작을 비슷하게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국 완등하진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으나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시작해 대롱대롱 매달려 소시지 마냥 구워지는 꼴이 돼 결국 포기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끄라비를 떠나는 날 당일, 아쉬움에 다시 한 번 바위 쪽을 돌아보는 필자.
끄라비를 떠나는 날 당일, 아쉬움에 다시 한 번 바위 쪽을 돌아보는 필자.

day 9~12 | 드디어 올랐다! 톤사이 플레이보이!

잠시 등반을 쉬고 휴양할 요량으로 피피섬으로 갔다. 물놀이도 하고 사진도 찍는데 어제 두고 온 톤사이 플레이보이 루트가 눈에 아른거려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형들과 둘러 앉아 맛있는 음식에 술을 기울이며 바위이야기를 나눈다. 그러자 한 외국인 무리가 다가와 말을 건다. 태국의 등반가들이다. 우리는 끄라비의 바위를 부러워하고 그들은 우리의 설산과 스키를 부러워한다. 김자인 선수와 찍은 사진을 보여 주니 몹시 부러워한다. 역시 세계적 스타다.

하룻밤 자고 다시 톤사이 비치로 향한다. 하루 쉬었더니 힘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아 실패를 성공으로 되갚아줄 자신이 생겼다. 이른 아침이라 사위는 고요하고 오직 잔잔한 파도 소리와 거세지는 내 숨소리만 들린다. 한 동작 한 동작 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크럭스(특정 등반 루트 상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다. 최대한 발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집중하지만 코어근력이 부족해 몸이 뒤로 붕 날았다. 다행히 전완근으로 홀드를 꽉 쥐고 버텨 추락하지 않고 돌파할 수 있었다. 

라일레이 해변의 야경과 권혁균.
라일레이 해변의 야경과 권혁균.

완등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벌써 마음이 들뜨고 가슴이 벌렁거린다. 형들이 끝까지 집중하라고 소리치자 이내 정신을 다잡는다. 다시 한 동작씩 취해 올라 마침내 마지막 퀵드로에 줄을 건다. 완등이다.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도 못 했던 루트를 완등한 것이다. 하강하며 바라본 바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완등의 쾌감에 젖어 다른 이들의 등반을 지켜본다. 어디선가 반가운 한국말이 들려 진원지를 찾아가본다. 우리보다 어린 클라이밍 선수들이 등반하는 모습이 보이고 관계자인 듯한 일행도 보여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할 난이도의 루트를 몸 풀이 삼아 오르고 있는 선수들을 보니 그저 감탄만 나왔다. 이때 만난 친구들 중 한 명이 이학진. 이 친구는 그 며칠 뒤인 2월 2일에 세계 최연소인 만 12세의 나이로 난이도 5.14c 루트 그리드를 완등하는 기록을 세운다. 어린 선수들의 끝없는 노력과 열정을 보며 나태한 내 자신을 많이 반성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톤사이의 또 다른 인기 루트인 ‘라이온 킹(5.11d)’도 올라보고, 이름 모름 외국인들과 어울려 한 모래사장에서 볼더링도 같이 즐겼다. 우리나라에도 좋은 등반지가 많지만 해외 등반지는 고유의 이국적 특징이 있어 매력적이다. 하루 빨리 코로나19 사태가 끝나 다시 세계 곳곳의 바위에 내 열정을 불사를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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