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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경상도의 숨은 명산] 강원도 향로봉과 同名異山…숲길 지나면 쪽빛 한려수도

글·사진 황계복 부산산악연맹 자문위원
  • 입력 2020.12.2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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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향로봉 578m

고성 좌이산이 드넓은 자란만을 굽어보고, 바닷길에 뿌려진 섬들은 보석처럼 빛난다.
고성 좌이산이 드넓은 자란만을 굽어보고, 바닷길에 뿌려진 섬들은 보석처럼 빛난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드는 길목이라 단풍도 저물어 시들어버린 이파리로 떨어진다. 한여름 잡목과 덤불로 우거졌던 산길이 이때쯤이면 희미하나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더불어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가려졌던 조망이 트이고 등산화에 밟히는 낙엽 소리 또한 정겨운 하모니로 다가온다. 한 해의 끝자락에 남녘 바닷가에 자리한 향로봉香爐峰(578m)을 새로운 코스로 올랐다.

이 향로봉은 여러모로 비운의 산이다. 먼저 남한지역 백두대간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 향로봉(1,296m)의 유명세에 밀린다는 점이다. 흔히 동명의 산을 구분하기 위해 앞에 지역명을 붙이는데 향로봉은 강원도 고성군과 같은 경남 고성군에 위치해 있어 더욱 헷갈린다.

두 번째는 이 향로봉이란 이름도 출처를 알 수 없이 개명당한 것이란 점이다. 향로봉은 본래 와룡산臥龍山의 상봉이었다. 그러니까 예로부터 이 지역에 와룡산은 둘이었다. 지금 향로봉이라 불리는 고성의 와룡산과 상사바위로 유명한 사천시(옛 삼천포)에 있는 와룡산(801.4m)이 그것이다.

403m봉 남서면의 바위지대가 벌바위다. 산행은 벌바위 앞 도로에서 곧바로 산비탈로 오른다.
403m봉 남서면의 바위지대가 벌바위다. 산행은 벌바위 앞 도로에서 곧바로 산비탈로 오른다.

고성문화원에서 발행한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에 따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에 향로봉의 지명은 ‘용이 굽이쳐 누운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와룡산이라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8년(대정 7년 3월 30일) 발행한 지도에 운흥사 아래 와룡마을의 지명은 그대로 두고 와룡산만 향로봉으로 표기해 지금까지 불려오고 있다고 한다.

향로봉은 이웃 사천 와룡산의 유명세에 눌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하다. 그렇지만 땀 흘리며 정상에 올랐을 때 펼쳐지는 풍경, 그 자체만으로도 결코 사천 와룡산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손에 잡힐 듯이 펼쳐지는 한려수도의 쪽빛 물결에 가슴이 뻥 뚫리고, 해안선을 끼고 솟은 산과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만들어내는 풍광에 피로가 사라진다. 낮지만 옹골찬 매력에 마음이 끌리는 산이다.

향로봉 산행은 대다수 운흥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새로운 코스로 산행을 했다. 경남 사천시와 고성군의 경계지점인 계양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벌바위~향로봉~신선대~낙서암~천진암~운흥사를 걷는 약 8㎞ 거리다. 전체 산행 거리는 약간 짧다. 그렇지만 산행 초입에서부터 임도까지의 능선 구간은 산길이 묵어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느렸다.

435m봉 직전 바위지대에 닿으면 서쪽으로 사천 와룡산 민재봉과 기차바위 능선이 조망된다.
435m봉 직전 바위지대에 닿으면 서쪽으로 사천 와룡산 민재봉과 기차바위 능선이 조망된다.

가파른 비탈에 산길도 희미

산행은 버스정류장에서 차도를 따라 사촌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도로변에서 보이는 403m봉 남서면의 바위지대가 벌바위다. 하이면 지명유래에는 ‘내원마을 입구 100m 지점에 있는 큰 바위로 옛날 이 바위에 벌이 많이 번식했다고 하여 벌바위(범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동명을 봉원리蜂院里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고 했다. 벌바위 앞 도로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로 꺾어 들자마자 곧바로 산비탈로 오른다. 초입에는 색이 바랜 리본 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지만 산길은 뚜렷하지가 않다.

산행 시작부터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제법 거칠다. 가파른 비탈에 제대로 된 산길마저 없다 보니 처음부터 진행이 힘들다. 능선에 올라서기 전 오른쪽으로 잠시 전망이 트인다. 조금 전 내렸던 버스정류장 너머로 지방도 1016호선이 뻗어간다. 와룡산 민재봉에서 동으로 흘러내린 산릉이 ‘구름이 날아간다’는 비운치를 건너 봉암산을 거쳐 향로봉으로 잇는다. 긴장된 발걸음은 빗돌 없는 묘지를 지나고부터 다소 가벼워진다. 산길은 묵었으나 경사는 한풀 꺾였다. 아무런 특징 없는 403m봉을 지난다.

향로봉 정상에 오르면 건너편 사천 와룡산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다.
향로봉 정상에 오르면 건너편 사천 와룡산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다.

잡목이 걸리적거리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능선 길을 더듬어 가기에 별 어려움은 없다. 주변 지형을 잘 살피며 능선을 놓치지 않는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수풀이 우거지는 계절에는 산행이 힘들 것 같다. 잔뜩 쌓인 낙엽을 헤치고 나아간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산릉이라 그런지 공기도, 바람도, 산길도 모두 맑고 깨끗해서 좋다.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한 굽이 치오르면 모처럼 주변 전망이 시원한 바위지대를 만난다. 서쪽으로 사천 와룡산 민재봉과 기차바위 능선이 뚜렷하고, 새섬바위는 숨은 듯 머리만 살짝 드러낸다.

곧장 닿은 435m봉에는 누가 걸어뒀는지 ‘율터봉’이라고 쓴 코팅지가 나무에 걸렸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산릉은 남쪽으로 휘돌아 나가다가 465m봉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모정봉이라고 쓴 코팅지가 걸렸다. 율터가 아니고 울티를 가리키는 모양인데 울티나 모정은 산 아래 마을의 지명이다.

이곳 고성군 하이면 봉원리의 지명 유래에 ‘외원마을은 옛날에 울티鬱峙라고 부르다가 큰재(한티大峙곡)로 개명했으며, 조선조 말엽에는 또 봉암峰岩이라 했다. 봉암은 벌바위의 한자 표기이며, 백마산白馬山 산록에 있는 큰 바위를 이른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백마산은 있지만 율터봉이나 모정봉은 검증되지 않은 왜곡된 지명이다.

운흥사로 내려서는 계곡은 곱게 물든 단풍으로 화려하다.
운흥사로 내려서는 계곡은 곱게 물든 단풍으로 화려하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낙남정맥 또렷해

466m봉에서 이어갈 능선은 왼쪽 90도 방향이다. 낙엽이 쌓인 가파른 내리막을 미끄러지듯 내닫는다. 420m봉 전 안부에서 우회해 내려서면 임도에 닿는다. 뜻밖에도 왼쪽 산 중턱에 자작나무가 숲을 이룬다. 하얀색을 띤 수피에 곧게 자란 자작나무숲은 눈 덮인 겨울 산이 오버랩되어 다가온다. 

산악기상관측장비 옆을 지나 임도를 버리고 정면 향로봉 북릉 길로 접어든다. 묘지를 지나 다시 만난 임도에선 절개지 축대를 밟고 오른다. 경사가 가파른 된비알이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능선을 뒤돌아본다. 출발했던 벌바위며 자작나무숲, 멀리 사천시가지도 보인다.

향로봉이 가까워지면서 암릉을 만나고 뒤이어 전망 좋은 너럭바위에 선다. 멀리 사천시 너머로 뻗어가는 낙남정맥을 비롯해 물결처럼 일렁이는 산릉 사이에 고성 거류산, 철마산, 통영 벽방산, 미륵산이 제모습을 드러낸다. 가깝게는 향로봉에서 백암산으로 뻗어가는 남릉과 수태산, 무이산으로 이어지는 동릉이 또렷하다. 그 사이에 고성 와룡산 용龍의 왼쪽 귀에 해당한다는 좌이산이 드넓은 자란만을 굽어본다. 통영에서 고성, 삼천포를 잇는 바닷길에 뿌려진 섬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참 넉넉한 풍경이 한 장의 도화지에 가득한 느낌이다.

하산길의 신선대는 기암과 어우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진 자태를 뽐낸다.
하산길의 신선대는 기암과 어우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진 자태를 뽐낸다.

너럭바위를 벗어나 수태산 갈림길을 지나 향로봉 정상에 오른다. 헬기장이었던 널찍한 터에 정상석과 삼각점(사천 303, 2002 재설), 이정표가 있고 가장자리에는 정자형 쉼터도 보인다. 무엇보다도 한려수도를 내려다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삼천포항 너머로 창선·삼천포대교 건너 남해의 금산, 망운산도 볼 수 있다. 건너편 사천 와룡산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다. 하산은 운흥사 방향이다.

정상석 옆으로 내려서면 하이면 애향회 기금으로 손수 제작했다는 애향교를 건넌다. 산길은 비로봉을 넘어 능선 안부에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튼다. 산비탈의 너덜겅을 지나 절벽 아래 바윗길로 이어가면 신선대에 닿는다. 주변의 기암과 어우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진 자태를 뽐낸다. 절벽 아래로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천진암이 단풍 숲에 묻혔다. 산길은 암벽을 낀 돌계단을 지나고 너덜겅을 벗어나면 어느새 낙서암과 천진암을 차례로 만난다. 운흥사로 내려서는 계곡은 곱게 물든 단풍으로 화려하다.

산행길잡이

계양마을 버스정류장~벌바위~403m봉~435m봉~465m봉~임도(산악기상관측장비)~ 향로봉 정상~신선대~낙서암~천진암~운흥사~운흥사 버스정류장 <5시간 30분 소요>

교통

향로봉은 행정구역상 고성군이지만 대중교통편은 사천시에서 접근하는 게 수월하다. 삼천포 시외버스터미널(1688-3006) 후문 쪽 ‘스마일마트’ 시내버스정류장에서 30번 시내버스(삼포교통·055-832-1992)를 타고 계양마을 버스정류장에 내린다. 산행 날머리인 운흥사에서 삼천포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시내버스 30번이 운행하는데, 시내버스가 하루 2회(9:20, 13:14)뿐이므로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운흥사에서 삼천포 시외버스터미널이 멀지 않아 택시를 부르는 것도 방법이다.

숙식(지역번호 055)

삼천포 중앙시장 인근 10,000원의 행복(833-8308)은 1만 원으로 푸짐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메뉴는 열무보리밥, 전복장어탕, 갈치조림 3가지로 예약 필수. 삼천포 용궁수산시장 인근의 원조양지해물탕(832-1149)은 해물탕 전문 음식점. 대방동 대방초등학교 인근의 박서방식당(833-8199)은 삼천포 백반정식 한 가지만 하는 가성비 만점의 식당이다. 삼천포의 동서금동 일대에 숙박할 만한 모텔이 많다.

볼거리

운흥사雲興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본거지가 돼 사명대사가 이끈 승병 6,000여 명이 왜적과 싸웠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의 전투를 위한 작전 회의 때문에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런 까닭으로 운흥사는 왜군에 의해 불탔으나, 1651년(효종2)에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매년 음력 3월 3일이면 국난극복을 위해 왜적과 싸우다가 숨진 호국영령들을 위한 영산재가 열리고 있다. 보물 제1317호 ‘운흥사 괘불탱’은 조선 영조 6년(1730) 승려 화가 의겸이 그린 것으로 국보급 탱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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