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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나홀로 세계일주] 알프스 트레일 GR5,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 그 길을 빛내는 건 사람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 입력 2020.12.1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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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농레방에서 샤모니까지

루갈 드 쇼팔랑 지트에서 바라보는 레 크호세. 전형적인 알프스마을의 모습이다.
루갈 드 쇼팔랑 지트에서 바라보는 레 크호세. 전형적인 알프스마을의 모습이다.

랑도네Randonnée는 프랑스어로 긴 산책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운동을 말한다. 도시 외곽의 숲과 언덕, 국공립공원을 5~6시간 걷는 단거리 코스부터 알프스산맥을 도보로 걷는 장거리코스까지 다양하다. 코스는 10일 이상 소요되는 장거리 코스(GR)와 하루 만에 마칠 수 있는 비교적 짧은 산책 코스(PR)로 구분된다. GR 가운데 유명한 코스는 중세의 수도자들이 걸었던 길을 답사하는 ‘생장 코스’, 몽블랑 주위를 도는 ‘투르 드 몽블랑TMB’, 네덜란드 남부에서 시작해 프랑스 남부까지 알프스산맥 전체를 여행할 수 있는 ‘GR5’ 등이 있다

GR5Grande Randonnée 5의 전체 길이는 2,400km.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스위스의 제네바호수에서 프랑스 남부의 니스까지 약 660km이다. 매년 1만 명 가까운 트레커들이 이 길을 걷기 위해 길 위에 선다. 2,400~2,700m 높이의 산을 하루에 1~2개씩은 넘어야 해서 충분한 체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GR5 루트 중에서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 남쪽에서부터 프랑스 샤모니까지 1주일간 백패킹으로 걸었다.

첫날 밤 텐트를 친 목장 언덕. 굴업도의 ‘개머리언덕’과 흡사한 이곳은 레만호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스팟이었다.
첫날 밤 텐트를 친 목장 언덕. 굴업도의 ‘개머리언덕’과 흡사한 이곳은 레만호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스팟이었다.

토농레방 ~ 샬레 드 비스(36.6km) : 폭풍우에도 곯아떨어지다 

첫째 날, 토농레방Thonon les Bains에서 힘들게 GR5 트레일로 들어섰다. 마을을 지나다가 작은 산을 넘고 다시 마을로 목장으로 GR5 트레일이 이어졌다. 작은 산이라 해도 우리의 산과는 크기나 경사도가 너무 달라서 박배낭을 메고 오르고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출발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종일 내리는 비 덕택에 피로는 더욱 가중되었다.

오르내림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 계속된 오름길은 끝이 없고 목장만 계속 나타났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은 걷지 못하겠다고 느낄 때, 한 목장의 수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목장 주인은 이미 퇴근한 듯 소들만이 목장을 지켰다. 소가 없는 곳에 텐트를 치고 나니 기다리기나 한 듯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마지막 오르막을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저녁식사조차 번거로워서 바게트 빵으로 요기만 했다. 산 아래에는 레만호가 있지만 구름에 싸여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텐트에 몸을 누이니 어찌나 피곤했던지 엄청난 폭풍우에 텐트가 날아갈 정도였는데도 단잠에 빠져들었다. 

둘째 날, 새벽에 빗방울이 조금 떨어져 걱정을 했는데 아침에는 눈부신 햇살이 조금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이곳은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굴업도의 ‘개머리언덕’과 흡사했다. 멀리 레만호가 보였다. 1,500m가 넘는 산언덕에 자리 잡은 목장은 그림 같았다. 어제 죽을 만큼 힘들었던 고통은 이미 사라졌다. 

처음부터 계속 오름질. 어제보다 더욱 어려운 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힘은 들었지만 능선 전체에 핀 형형색색 야생화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때는 박배낭을 메고 있었다는 것도 잊었다. 다시 오르내림이 반복되었지만 광활한 초록의 능선이 펼쳐지는 알프스는 나를 행복하게 했다. 힘들어지는 만큼 알프스의 산은 더욱 장엄하고 황홀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바윗길도 한없이 걸었다. 대청봉의 귀떼기청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길을 올라 이쯤이면 끝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바위가 가득한 너덜길의 연속이었다.

알프스 트레일 GR5 등산지도
알프스 트레일 GR5 등산지도

샬레 드 비스 ~ 레 크호세(28.7km) : 길에서 만난 피에르

셋째 날,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비는 오지 않았는데 텐트엔 물이 줄줄 흘렀다. 수건으로 닦았지만 텐트에 스며든 습기는 완전하게 닦아지지 않았다. 젖은 텐트가 들어간 배낭은 더 무거울 수밖에. 물을 머금은 텐트를 짊어지고 어제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랐다. 다시 올라야 할 길을 내려오다니? 그 덕분에 어제 저녁엔 환상적인 석양과 멋진 저녁식사를 즐겼으니 감내해야 했다. 한  시간 반 가까이 오른 후 여름 햇살에 고슬고슬 텐트를 말렸다. 

푸른 초록의 대지는 꽃밭이었다. 온갖 야생화들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너무나 즐거웠다. 눈앞에는 산들이 겹겹이 이어졌다. 박배낭을 메고 함께 걸어가는 커플이 풍경 속으로 들어오니 한 장의 그림엽서기 되었다. 풍경에 취해 그만 박배낭을 멘 채 미끄러지고 말았다.

빨리 일어서기도 쉽지 않았지만 주저앉은 김에 잠시 쉬려고 그대로 땅에 앉았다. 그때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던 외국인이 황급하게 달려오더니 “아 유 오케이Are you OK?”를 연발했다. 괜찮다고 해도 일으켜 세워 주고 자기가 앉아 있던 벤치에 나를 앉으라고 했다. 내 배낭이 너무 큰데 자기 배낭도 가득차서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더 미안했다. 

Chapelle d’Abondance에서 식량을 보급했다. 2~3일분의 식량 덕에 배낭은 오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복숭아와 바나나까지 준비했다. 매일 건조식으로만 식사를 해서 과일이 너무 먹고 싶었다. 배낭은 무거워졌는데 발걸음은 리듬을 탔다.

한참동안 깔딱 길을 오르다 보니 GR5 트레일 표식이 눈에 띄지 않았다. 어두워지는데 계속 경사가 진 길이라 마땅하게 텐트를 칠 만한 곳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걸었던 길을 되돌아 나오는 것이었다. 다행히 많이 되돌지 않고 GR5트레일 표식을 찾았다. 

넷째 날, 레 크호트Les Crottes에서 내려가는 길은 여러 목장을 통과했다. 개인의 사유지임에도 트레커들에게 목장을 열어 주는 그들의 배려심에 놀랍고 감사했다. 

Chesery호수에 이르니 이곳은 트레일러닝뿐 아니라 MTB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장엄한 알프스를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었다. 건강한 삶의 모습이었다.  Chesery호수 둘레를 도는 루트뿐 아니라 알프스 스키장 옆으로 MTB로드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자전거 타는 이들의 로망이 왜 프랑스인지 이해가 되었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라이더들의 질주를 관람하고 있었다. 이들 곁에 앉았다. 동양인은 나홀로. 모두들 나를 바라보았고 쉴 새 없이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이곳에서 피에르를 만났다. 72세인 그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 니스까지 한 달 일정으로 걷는 중이었다.

레 크호세Les Crosets에서 루갈 드 쇼팔랑이란 지트Gite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지트는 프랑스 민박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농 현상으로 피폐화된 프랑스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가를 숙박업소로 개방하면서 시작되었다. 저녁은 치즈 퐁듀 샌드위치. 토핑으로 에그까지 엄청난 호사를 누렸다. 숙박비는 저녁과 아침식사 포함에 30유로. 지금 내가 먹은 샌드위치는 20유로. ‘그럼 당연히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도 먹어야지!’ 저녁식사를 마칠 무렵 피에르가 들어왔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샬레 드 비스에서 라 살레La salle로 향하는 언덕이 야생화로 가득하다.
샬레 드 비스에서 라 살레La salle로 향하는 언덕이 야생화로 가득하다.

레 크호세~앙텐느호수(42.2km) : 파티에 초대받다

다섯째 날, 아침식사는 피에르와 함께했다. GR5뿐 아니라 몽블랑 트레일까지 설명해 주시느라 아침식사 시간이 한 시간도 넘었다. 홀로 백패킹으로 걷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콜 드 쿠Col de Cou(1,920m)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었다. 이제 몸이 적응이 되었는지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마음의 여유도 생기니 함께 길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서고 인사를 나누었다. 

오전 10시 50분 드디어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 넘기를 고무줄놀이 하듯 자유롭게 알프스를 즐기는 이들이 부럽다. 해발고도가 2,000m가 넘는 곳에서 1,350m까지는 단숨에 내려왔다. 피에르가 늦게 걸어 주시니 나도 한결 편하게 걸었다. 여러 번 쉬고 걸으니 힘든 것도 한결 덜했다. 이렇게 쉬고 걸어도 기껏해야 1시간 정도나 차이 날 텐데. ‘천천히 즐기며 걷기’의 참 의미를 오늘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석양이 지면 병풍처럼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인 테트 아 란느가 황금색으로 물들어간다.
석양이 지면 병풍처럼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인 테트 아 란느가 황금색으로 물들어간다.

1,350m에서 300m 정도 올라오니 글라시에Golese산장. 이곳에서 피에르와 헤어졌다. 그는 빙하를 거쳐서 다시 GR5로 복귀한다고 했다. 이틀간 참 많은 것을 알려 주고 동행해 준 피에르와 헤어지는 건 아쉬웠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스키도시인 사모엥Samoens을 향해 걸었다. 

잠시 쉬고 있는데 오전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던 파리에서 온 아눅과 디디에를 만났다. 글라시에에서 사모엥까지 내려오는 길은 편하긴 하지만 살짝 지루했다. 걷는 내내 디디에의 유머 덕분에 즐거웠다. 사모엥에 도착해서 그들은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로, 나는 텐트를 칠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헤어졌다. 길을 걷는 것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다.

Chesery호수에서 만난 피에르. 72세의 나이에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도 니스까지 한 달  일정으로 GR5를 걷는 중이었다. 그는 묵묵히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트레일을 즐겼다.
Chesery호수에서 만난 피에르. 72세의 나이에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도 니스까지 한 달 일정으로 GR5를 걷는 중이었다. 그는 묵묵히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트레일을 즐겼다.

시내에서 벗어난 고르지 데 틴느Gorges de Tines 근처의 넓고 평평한 잔디밭은 텐트 치기엔 정말 좋은 장소였다. 앞에는 강물까지 흘렀다. 그곳엔 이미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는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텐트를 치고 있는데 그 가족이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다.

프랑스 티브에 근무한다는 로랑씨 가족. 오늘이 프랑스 홀리데이라 야외로 피크닉 왔다고 했다. 2남 4녀 대가족. 6명의 아이들이 잔디에서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행복했다. 온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소시지빵, 비프 바비큐, 과일까지 완벽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배드민턴도 치며 잠시 즐겁게 놀았다. 오늘도 길 위의 인연들이 내게 준 친절과 배려에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1주일 동안 110km 이상을 걸어서 도착한 콜 뒤 브레방에서 마주한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 그 경이로운 모습 앞에 서니 감동과 감격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1주일 동안 110km 이상을 걸어서 도착한 콜 뒤 브레방에서 마주한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 그 경이로운 모습 앞에 서니 감동과 감격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여섯째 날, 퐁 드 살레Pond de sales부터 다시 급경사.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다가 아눅과 디디에를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는데 산장 근처에서 텐트를 말리다가 또 만났다. 디디에가 정수용 알약을 주면서 정수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산장으로 가고 나는 숙영지를 찾아 걸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오르는 길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적막했다. 2,000m가 넘는 곳인데 산을 넘으니 앙텐느Anterne호수가 나를 반겨 주었다. 장엄한 위용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배낭을 메고 홀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보고 경계해야 하는데 반가웠다. 

호숫가에 적당히 간격을 두고 텐트를 쳤다. 석양이 지며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인 테트 아 란느Tête à l’Âne가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황금빛을 받은 호수는 낮처럼 밝았다. 뜻밖의 선물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도 이런 광경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산에 방목하고 있는 양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호수 주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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