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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Pitch by Pitch] Peak 39의 추억, 아찔했던 히든 크레바스… ‘눈삽밥’ 먹으며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다

글·사진 대학산악연맹 김동익(목포해양대 산악부15)
  • 입력 2020.12.3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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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폴 지대에서 평평한 지형으로 올라섰다.
아이스폴 지대에서 평평한 지형으로 올라섰다.
‘Pitch by Pitch’는 한 피치 한 피치 앳된 오름짓을 이어가는 대학산악부원들의 진솔하고 톡톡 튀는 목소리를 담은 연재다. 이번 호에서는 2019년 한국식 팀워크등반의 모범으로 불리는 알피니스트 조벽래와 함께 파키스탄의 미등봉 Peak39(6,120m) 초등에 나섰던 대학산악부원 김동익 회원의 등반기를 다룬다. 이 등반은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이뤄졌다._편집자
출발 전 포터들과 함께 짐을 부리고 있다.
출발 전 포터들과 함께 짐을 부리고 있다.

Peak 39 원정대 출발!

Peak 39. 따로 산에 이름이 없어 숫자로 불리는 6,120m의 설산이다. 이 산은 파키스탄 후세Hushe마을에서 북서쪽, 탈레Thally마을의 북동쪽 방향에 있으며 기록상 미등봉이다. 김홍빈 대장님의 가셔브룸1 원정에 동행했던 나는 계속 파키스탄에 머물면서 원정을 제안한 조벽래 선배(동아대88)와 김태완 선배(동아대91)를 기다렸다.

전화로 선배들과 소통하며 필요한 장비를 미리 준비해 놓고, 바야흐로 D-day가 돼 선배들과 함께 지프를 타고 등반 거점인 탈레마을로 출발했다. 직전 원정에 함께했던 쿡 이삭과 보조 아리프도 동행했다.

마을로 올라가는 길은 험난하다. 깎아지른 절벽에 도로가 있어 위험하지만 운전기사는 아주 능숙하게 지나간다. 깊은 협곡의 교량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지프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데다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았다. 그 밑으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빙하수가 마치 굶주린 호랑이가 나를 향해 발길질하듯이 세차게 흐른다. 

베이스캠프 전경.
베이스캠프 전경.

4시간 정도 걸려 탈레(2,900m)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서부터 걸어 올라가야 할 줄 알았는데 도로가 생각보다 더 깊게 나있어서 500m 정도 더 들어간다. 내일 하루면 베이스캠프 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식은 오래 걸려서 파키스탄식으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선배들에게 가셔브룸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다 일찍 잠들었다.

오전 5시, 시끌벅적한 소리에 일어나 텐트에서 나오니 마을 사람들이 우리 텐트 주변에 둘러 앉아 있다. 바로 포터들이다. 대원은 3명에 불과하지만, 짐은 거의 10명이 나눠 들어야 할 만큼 많기에 포터를 고용해서 짐을 수송해야 한다.

포터와 계약을 한 후 아침을 준비한다. 그런데 물이 너무 더러워 흰 쌀밥이 흑미밥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배가 고프다 보니 ‘설마 죽기야 하겠어?’란 심정으로 꾸역꾸역 먹었다. 

끝 모를 어둠을 품고 있는 크레바스.
끝 모를 어둠을 품고 있는 크레바스.

이제 짐을 싸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나는 이미 가셔브룸 원정으로 고소적응이 되어 있어서 국내 산행하듯이 성큼성큼 걷는다. 선배 두 분은 많이 힘들어하는 눈치다. 내가 컨디션이 좋은 걸 안 선배들은 먼저 올라가서 베이스캠프로 삼을 만한 자리를 찾아보라고 한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니 왼쪽에 우뚝 솟은 절벽을 끼고 평평한 지대가 나온다. 벽쪽으로 붙으면 낙석 위험이 있으므로 물이 흐르는 앞쪽에 캠프를 설치한다. 1시간이 조금 넘어서 조벽래 선배와 김태완 선배가 도착했다. 대충 정리하고 따스한 태양빛으로 일광욕을 한다. 산, 그것도 고산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차 한 잔 마시는 모습이 왠지 여름 바닷가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가장 먼 곳인 바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것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텐트에 들어가 짐 정리를 한다. 내일은 최대한 짐을 메고 올라가서 전진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뒤 다시 베이스캠프로 복귀할 예정이다. 베이스캠프 이후부터는 대원 3명이 모든 짐을 직접 들고 가야 한다. 가셔브룸 원정이 첫 원정이었기에 베이스캠프에만 머물던 나에게 드디어 그 다음을 향해 갈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떨리고 겁이 나기도 했지만, 경험이 많은 두 선배와 함께하니 든든했다.

아이스폴에서 내려다본 전경.
아이스폴에서 내려다본 전경.

목숨을 위협하는 ‘히든 크레바스’에 빠지다

등반 첫날 왼쪽 절벽을 끼고 50m 정도 되는 언덕을 올라간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너무 가파르다. 로프를 꺼내 크고 안정적인 바위에 고정시키고 하강을 한다. 로프가 너무 얇아 끊어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이후로 완만한 빙퇴석 지대를 여러 차례 넘다 보니 점심쯤 해발 4,400m 지점에 도착했다. 물이 흐르는 곳 근처에서 한참 돌을 골라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후 전진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짐을 정리한다.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빨라 베이스캠프로 복귀하는 계획을 취소하고, 잠시 쉬다가 조금 더 가보기로 했다. 최대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짐을 가지고 아이스폴 지대 밑으로 향한다. 초반 돌길을 걷다가 눈이 나온다. 성큼성큼 왼발을 내딛는 순간 ‘억’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발이 푹 꺼진다. 숨겨진 크레바스(빙하의 표면에 쪼개진 틈)에 빠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크레바스 폭이 좁아서 왼발만 빠졌다. 조금만 더 넓었으면 바닥도 안 보이는 밑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다. 크레바스가 있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사고를 당하니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누가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느낌이다. 

아이스폴에서 등반 중인 조벽래 선배.
아이스폴에서 등반 중인 조벽래 선배.

이후로 발걸음이 매우 조심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뒤 이번엔 빙하가 흐르는 좁은 계곡을 뛰어넘다가 실수로 오른발이 물에 빠진다. 재수가 없는 날인가보다. 이윽고 아이스폴이 잘 보이는 곳에 도착한다. 아이스폴을 바로 앞에서 보니 그 웅장함과 신비로움이 나를 유혹한다. 그 위쪽에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는 올라봐야 알 것이다. 짐을 데포(임시 보관)하고 다시 전진 베이스캠프로 내려간다. 전진 베이스캠프에서 아이스폴 지대를 보며 가장 쉬운 루트를 구상해 본다. 마치 게임에서 강력한 보스가 있는 던전에 들어가기 직전 작전을 짜는 듯하다.

다음날, 어제 많은 짐을 올려놨기 때문에 가볍게 출발한다. 데포 지점에 도착해서 장비를 챙겨 아이스폴 지대를 올라간다. 드디어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설사면을 어느 정도 오르니 급경사면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등반을 해야 한다. 

“동익이, 선등 한번 서봐라.”

조벽래 선배가 말씀하신다. 동계 등산학교에서 피켈로 설벽을 오르는 방법을 딱 한 번 배웠는데 그때는 ‘내가 이런 걸 써먹을 일이 있겠나’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지금 그 방법을 써먹을 때가 온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피켈을 찍고 고정된 피켈을 잡고 당기면서 몸을 일으킨다. 처음 배웠을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올라간다. 70m 정도 올라오니 조금 안전한 장소가 나온다. 이제 후등자 확보를 본다. 왼쪽으로 가보니 거대한 크레바스가 가로막고 있어서 오른쪽 수직으로 솟은 얼음기둥 사이로 올라간다. 조벽래 선배가 다 올라가시더니 한탄을 하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올라가서 보니 엄청 큰 얼음벽이 우리 앞을 떡 하니 막고 있다. 

일단 안자일렌(등반자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로프를 연결해 묶고 오르는 방법)을 하고 조금 앞으로 가본다. 선배는 한참 고민하다 앞의 크레바스 쪽으로 하강을 한다. 어떻게든 뚫어 보려는 것 같다. 더 전진하기에는 시간이 늦어져 등반할 루트만 확인하고는 하산한다. 전진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되어간다. 힘겨운 등반과 긴장으로 피로가 배가 되었다.

캠프에서 삽에 눈을 끓이고 있는 김태완 선배.
캠프에서 삽에 눈을 끓이고 있는 김태완 선배.

‘눈삽밥’을 아시나요?

다음날 아침을 먹고 올라와서 보니 전날 수직으로 솟아 우리를 가로막던 얼음기둥이 무너져 있다. 밑에는 얼음 파편이 수없이 깔렸고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쓸고 내려갔다. 장애물이 사라져서 기쁜 것도 잠시, 아뿔싸! 하강하면서 박아놨던 피켈과 주마, 하강기 등 대부분 장비가 같이 쓸려 내려갔다.

그렇다고 여기서 등반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남은 장비로 등반을 시작한다. 초반 살짝 오버행을 띤 벽을 조벽래 선배가 선등으로 오르고 그 뒤로 나와 김태완 선배는 주마를 이용해 넘어간다. 20m 정도의 거대한 얼음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를 여러 차례 넘고 난 뒤에야 우리는 드디어 넓게 펼쳐진 평평한 지대에 올라선다. 

아직 캠프1 지점까지는 더 가야 한다. 주변은 분지 지형에 중심부에는 깊은 크레바스가 많아 셋이서 오른쪽 사면을 따라 안자일렌을 하고 천천히 전진한다. 5,000m 지점. 산소는 저지대에 비해 약 50%밖에 안 돼서 약간의 경사도 열 걸음이면 숨이 턱 막혀서 잠시 쉬고 다시 열 걸음 가다 쉬기를 반복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작 2km도 안 되는 거리를 우리는 3시간 동안 진이 다 빠지도록 걸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캠프1 지점에 도착했다. 텐트를 치기 위해 눈을 다진다. 걷기도 힘든데 삽질은 말할 것도 없다. 5~6번 삽질하고 교대하기를 40분이나 반복한 후 드디어 텐트를 친다. 텐트만 설치하고 다시 하산할 계획이었지만, 내려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늦고 체력도 빠져 무리라고 판단했다. 등반 장비만 챙긴 탓에 비박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매트리스 대신 배낭과 자일을 바닥에 깔고 다리는 쭉 펴지 못하고 쭈그려 앉는다. 버너는 있지만 코펠이 없어 눈삽에 눈을 올려놓고 끓인다. 눈삽에 200ml 정도 되는 물을 반복해 끓여서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전투식량을 먹는다. 끓는 물을 붓고 5분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다. 다 쓴 전투식량 봉지는 그릇으로 쓰고 봉지에서 나온 플라스틱 숟가락, 포크 하나를 셋이서 번갈아 쓴다.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열악하다.

조벽래 선배는 이렇게 된 이상 전진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지 말고 몇 시간 뒤 새벽 3시에 정상을 향해 올라가자고 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다시 내려가는 것도 일이라 그 시간과 체력으로 올라가면 정상에 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지막, 국기를 들고 사진 한방.
마지막, 국기를 들고 사진 한방.

오름짓은 과연 인간의 본능

눕지도 못하고 쪼그려 앉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 새벽 2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헤드 랜턴 불빛에 의지한 채 200m 높이의 급경사면을 안자일렌으로 오른다. 1시간 30분 만에 플라토(고원) 지대로 올라선다. 정면으로 우리가 올라야 할 벽과 정상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목표했던 정상이 눈앞에 나타나서, 정상을 향해 오르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 깨어난 것일까. 손이 근질근질하다 못해 손끝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저 수백m의 벽을 어떻게 오를까 생각하려는 찰나 ‘우리의 장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떡할지 고민하다 결국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정상이 보이는데! 방금 나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는데! 너무 허탈하다. 

김태완 선배는 “아쉬울 때 하산해야 한다. 욕심내서 무리하다 정말 큰 사고가 생길 수 있다. 산은 그대로 있으니까 다음에 또 오면 된다”고 말을 건넨다.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후배의 마음을 위로해 주려는 선배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올라갈 땐 그렇게 힘들고 오래 걸렸던 길들이 내려갈 땐 헛웃음이 나올 만큼 순식간이다. 비록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베이스캠프에 있던 이삭은 우리를 위해 진수성찬을 마련해 줬다. 살아 돌아왔기에 등정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잠시 미룬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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