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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1월의 섬 덕적도] 자장가 같은 파도소리…엄마 품 같은 덕적도

글 신준범 차장대우 사진 주민욱 기자
  • 입력 2021.01.1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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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옹진군 42개 섬 덕적군도의 본섬, 비조봉 산행
BAC 섬&산100

비상하는 새처럼 시원하게 경치가 터지는 비조봉 바위능선. 꼬불꼬불한 덕적도 순환도로 건너 무인도인 흑도가 단정하게 앉아 있다.
비상하는 새처럼 시원하게 경치가 터지는 비조봉 바위능선. 꼬불꼬불한 덕적도 순환도로 건너 무인도인 흑도가 단정하게 앉아 있다.

바다만 보는데 위로가 되었다. 하염없이 해변을 어루만지는 여린 파도, 그 손길에 부드러워진 모래사장. ‘덕을 쌓는다’는 이름처럼 덕적德積은 선한 적요寂寥가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여백의 미美로 남은 물욕 없는 해변에 텐트 한 동 치고 가난한 식사를 할 적, 쏟아지는 별무리. 꾹꾹 눌러 왔던 뜨거운 감정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와 아득한 세상으로 풀려난다. 덕적도에선 바다만 보고 있어도 자유로워진다.

“우리 섬은 걸으면서 봐야 제대로 보여요. 비조봉 올랐다가 서포리해수욕장 둘러보고, 바갓수로봉까지 걸었다가, 소야도를 빼놓을 수 없지. 때뿌루해변 해안길도 좋아요.”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투명인간처럼 다니려 했으나, 섬 주민이 먼저 다가와 볼 만한 곳을 꼼꼼히 알려 주었다. 의외로 마주치는 주민마다 정이 있어 섬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덕적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해 있으며,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50여 ㎞ 떨어져 있다. 쾌속선으로 1시간 10분이 걸리니, 가까운 듯 먼 섬이다.

진1리 포구. 조수간만의 차가 커 바다는 금세 갯벌로 변하기도 한다.
진1리 포구. 조수간만의 차가 커 바다는 금세 갯벌로 변하기도 한다.

덕적도는 ‘큰물섬’이란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으로, 수심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란 뜻이다. 옛 문헌에는 덕물도德勿島, 득물도得物島, 인물도仁勿島, 수심도水深島 등으로 기록돼 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섬사람들이 어질고 덕이 많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인근 소야도, 백아도, 굴업도, 문갑도, 지도, 선미도, 울도 등의 대장 섬이며, 이밖에도 33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통틀어 덕적군도德積群島라 부른다. 면적 21㎢, 해안선 길이 38㎞로 여의도 넓이 7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덕적도는 역사가 깊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에 번갈아 점령당하기도 했다. 인천과 중국을 잇는 뱃길의 교두보였으며,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산둥반도에서 덕적도를 거쳐 왔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다. 백패킹 명소가 된 굴업도를 비롯해 문갑도나 백아도를 갈 때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고 간다.

조선 연산군 시절에는 사화를 피해 낙향하거나 귀향 온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서당을 열었다고 전하며, 이로 인해서인지 교육열이 높은 섬으로 유명해 ‘덕적도에 가서는 아는 체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덕적도와 다리가 연결된 부속 섬인 소야도 큰말(선촌항). 한적한 섬마을 특유의 낭만이 있다.
덕적도와 다리가 연결된 부속 섬인 소야도 큰말(선촌항). 한적한 섬마을 특유의 낭만이 있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덩그러니 남았다. 우르르 쏟아져 내린 여행객들은 굴업도행 배를 타러 가고, 덕적도를 찾은 이방인은 우리뿐이다.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손창건, 강태선나눔재단 변별, 블랙야크 청년셰르파 지형준씨가 동행했다. 식당에서 요기를 하고 주민들의 조언을 참고해 비조봉 입구에 들었다. 산길 입구에서 산불감시요원들에게 코스를 재확인하고 입산한다.

‘산불조심 경고문’을 자주 마주치는데, 2008년과 2016년 등산객 부주의로 산불이 난 적 있어 유독 예민하다. 망재에서 운주봉을 올랐다가 다시 망재로 돌아와 비조봉을 거쳐 서포리해수욕장으로 내려서는 3.7㎞ 코스다.

입산 의식처럼 대나무숲을 지나자 편안한 계곡을 따라 여유로운 산길이 반겨 준다. 너른 산길 주위로 소나무, 원두충나무, 신갈나무, 소사나무, 상수리나무까지 섬치곤 적지 않은 나무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간혹 울리는 새 소리 외에는 막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고요하다.

비조봉 정상 전망대인 비조정飛鳥亭.
비조봉 정상 전망대인 비조정飛鳥亭.

‘구름을 불러 모은다’는 뜻의 운주봉雲奏峰에 올라서자, 구름이 몸을 포개어 하늘을 지우고 있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시선이 멀리 가 닿는다. 부드러운 풍채의 덕스러운 능선, 그 흘러내림 끝에 이개해변과 목섬이 있다. 빨갛고 파란 소박한 지붕과, 시간이 멈춘 해변. 온 산을 울리는 새소리가 덧없는 생각의 흐름 밖으로 끄집어낸다.

망재를 지나 750m를 걷자 처마를 화려하게 펼친 정자가 있는 비조봉飛鳥峰(292m) 정상이다. 날아가는 새를 닮은 산세라는 이름처럼 덕적군도를 호령하는 비경의 정점이다. 섬 북쪽은 능선이 길게 뻗었으며, 그 끝에 국사봉이 있다. 국사봉(314m)이 실제 최고봉이지만 군 시설물이 있어 비조봉이 정상 역할을 한다.

소야도 갓섬과 갓덴섬을 잇는 바닷길을 걷는 변별씨와 지형준씨(우측). 갓덴섬은 썰물일 때만 들어갈 수 있으며 조개 조각이 모래사장을 이룬 독특한 명소다.
소야도 갓섬과 갓덴섬을 잇는 바닷길을 걷는 변별씨와 지형준씨(우측). 갓덴섬은 썰물일 때만 들어갈 수 있으며 조개 조각이 모래사장을 이룬 독특한 명소다.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 같은 굴곡의 섬들이 덕적도를 에워싸고 있다. 시선을 잡아끄는 건 발아래 해변. 풀쩍 뛰어 내리면 닿을 것처럼 밧지름해변이 가깝다. 모래와 물빛이 곱다. 더 먼 곳으로는 덕적도 대표 명소인 서포리해변이 특유의 부드러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해가 저물어가고 노을 속으로 알파벳 V 대형의 새떼가 남쪽으로 날아간다.

덕적도가 고향인 장석남 시인의 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 살아서 날갯짓 한다. 

덕적도 BAC 인증지점인 비조봉 정상에 선 지형준씨와 변별씨. 비조봉 표지석은 밧지름해변 방향 초입에 있다.
덕적도 BAC 인증지점인 비조봉 정상에 선 지형준씨와 변별씨. 비조봉 표지석은 밧지름해변 방향 초입에 있다.

‘오랜 세월 지난 후 /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 자기 울음 가파른 /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중략)’

시 때문일까. 침몰하는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새떼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BAC 인증지점인 정상 표지석은 정자 아래 밧지름해변 가는 길 입구에 있었다. 인증사진을 찍고 하산에 나선다.

순한 맛인줄 알았는데, 매운맛도 있다. 서포리로 내려서는 길, 거친 뿔 같은 바윗길이 모처럼 손을 쓰며 산을 타게 해준다. 이제야 제대로 된 산행을 하는 양 흥이 오른다. 짧지만 강렬한 키스처럼 바윗길이 순식간에 지나고 고도를 급하게 내려 도로에 닿는다.

땅거미가 내린 도로를 따라 500m를 걷자 기다렸던 서포리해수욕장. 1,000그루의 소나무숲 너머로 해변이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 텐트를 치고 망연히 바다만 보았다. 바다를 보는 것은 나인데, 바다는 사람 속내를 다 알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정상에서 서포리해변으로 내려서는 길의 바윗길. 암릉구간이 짧아 산행이 어렵지는 않다.
정상에서 서포리해변으로 내려서는 길의 바윗길. 암릉구간이 짧아 산행이 어렵지는 않다.

이중환이 얘기한 300년 전 선경

아침이 되자 이중환이 얘기했던 덕적도가 눈앞에 있었다. <택리지>에는 덕적도를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밭이고, 가끔 해당화가 모래를 뚫고 올라와 빨갛게 핀다. 비록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도 참으로 선경이다’라고 표현했다. 고개가 끄덕여지며 300여 년 전 사람과 같은 감동을 느꼈다.

차로 이동해 벗개저수지에서 다시 배낭을 멨다. 능선 따라 1.9㎞를 걸어 바다 끝에 닿았다. 툭 튀어나온 반도 끝 조망 터인 바갓수로봉이다. 능구렁이처럼 길게 뻗은 섬이 바다 너머에 있었다. 최근 몇 년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굴업도다. 동쪽은 문갑도가 검은 거북이처럼 불룩 솟은 산세를 과시하고 있다. 야금야금 먹는 간식처럼 벤치에 앉아 경치를 즐기고 사면 임도를 따라 벗개저수지로 돌아왔다.

바갓수로봉을 향해 걷는 강태선나눔재단 변별씨와 블랙야크 청년셰르파 지형준씨. 능선길과 사면 임도길 중 택할 수 있다.
바갓수로봉을 향해 걷는 강태선나눔재단 변별씨와 블랙야크 청년셰르파 지형준씨. 능선길과 사면 임도길 중 택할 수 있다.

서포리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급하게 차를 몰아 밧지름해변과 소야도 때뿌루해변을 둘러보았다. 작고 아담하지만 매력은 결코 작지 않은 해변들이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도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쾌적하고, 해양 쓰레기 한 점 없이, 그 흔한 건물 하나 없이 순수한 자태로 300년 전 모습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해변은 마음에 더 큰 느낌표로 다가왔다.

문득 침몰하는 노을이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았다. 노을의 부스러진 가루가 쌓이고 쌓여, 덕德이 쌓이듯 해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선착장에 닿자 굴업도에서 나온 사람들이 덕적도는 관심 없다는 듯, 곧장 인천행 배에 올라탔다. 수심 깊은 바다에 있다는 섬이, 속 깊은 사람처럼 우리가 점이 될 때까지 보고 있었다.

바갓수로봉 끝까지 가면 바다에 이르게 된다. 멀리 정면으로 보이는 섬이 굴업도.
바갓수로봉 끝까지 가면 바다에 이르게 된다. 멀리 정면으로 보이는 섬이 굴업도.

섬 가이드

진리도우선착장에서 1.8㎞ 이동하면 비조봉 등산로 입구인 진리성당에 닿는다. 망재까지 오른 다음 운주봉 들렀다가 비조봉을 거쳐 서포리해수욕장으로 내려서는 3.7㎞ 코스가 일반적이다. 서포리해변 송림에 텐트를 칠 수 있으며 식당, 편의점, 오토캠핑장, 펜션 등 편의시설이 많다. 덕적도 볼거리는 ‘BAC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고.

서포리해수욕장 소나무숲에서의 야영. 서포리해변은 덕적도를 대표하는 명소다.
서포리해수욕장 소나무숲에서의 야영. 서포리해변은 덕적도를 대표하는 명소다.

BAC 섬&산 인증지점 

비조봉 정상 표지석 좌표 37.219127, 126.10907

교통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1599-5985)에서 겨울 기준 하루 3회(08:30, 09:10, 14:30) 운항한다. 오전 9시 10분에 출발하는 ‘코리아익스프레스 카훼리’편이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철부선이며, 나머지 배편은 승객만 탑승 가능하다. 고속훼리인 코리아나호는 1시간 10분, 철부선인 코리아익스프레스카훼리는 1시간 50분 소요.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나오는 배 역시 하루 3회(10:00, 15:00, 16:00) 운항한다. 뱃시간은 매달 바뀔 수 있으므로 인천항만공사 홈페이지 icferry.or.kr에서 미리 확인해야 한다. 요금은 코리아나호 왕복요금 4만6,000원. 코리아익스프레스카훼리 왕복요금 3만1,500원. 차량 왕복 요금은 승용차·SUV 기준 11만~13만 원선.

조용하고 단아한 매력이 있는 밧지름해변.
조용하고 단아한 매력이 있는 밧지름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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