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鳥嶺은 현재 조령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산보다 고갯길로서 더욱 유명했으며,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도 매우 많다. 이 사건은 역사적 지명으로 연결된다.
신라의 오령은 조령·죽령竹嶺·화령化嶺·추풍령秋風嶺·팔량령八良嶺으로 삼국시대 때 신라가 고구려와 한강으로 진입하는 관문역할을 한 고갯길들이다. 조령을 넘어가면 바로 충주가 나오고 한강 상류로 연결된다. 조령은 또 죽령과 함께 두 고개의 남쪽에 있는 경상도를 영남으로 불러 영남이란 지명의 유래가 됐다. 다시 말해 조령·죽령 이북은 충청도, 남쪽은 경상도로서 두 지역의 경계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조령과 죽령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령은 매우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시문집 <번암집>에 실린 ‘조령’이란 시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남쪽에 극히 험한 고개 있으니 炎維有絶險/ 조령은 천하에서 으뜸가는 곳 鳥嶺天下獨/ 태곳적의 쇠가 닳아 절벽 이루고 壁磨太始鐵/ 두터운 지맥 끊겨 벼랑이 됐네 崖絶厚地脉/ 지난 날 신라와 고려시대에 新羅及高麗/ 하늘이 남과 북을 갈라놓으니 天以限南北/ 벌벌 떨며 공중에 자도 만들고 凌兢斲飛棧/ 기어올라 북극성 뚫으려 해도 仰攀穿斗極/ 신령한 도끼날이 도리어 무뎌 神斧力反脆/ 단번에 돌 모서리 깎지 못하여 未遽剗石角/ 숲에서는 음산한 기운 풍기고 林木集送氣/ 자주 하늘 컴컴해져 비를 뿌렸네 往往天潑黑 (후략)//’
채제공보다 훨씬 앞서 조선 초기 인물인 김시습(1435~ 1493)도 조령을 지나며 ‘유조령 숙촌가 踰鳥嶺 宿村家’란 시를 남겼다.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嶺分南北與西東/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路入靑山縹緲中/ 이 좋은 봄날에 고향에도 못 가는데 春好嶺南歸不得/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구나 鷓鴣啼盡五更風//’
이와 같이 조령은 예로부터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험한 고갯길로서 남에서 북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죽령이 그 역할을 했으나 조선 들어 한반도에 8대 대로를 개통하면서 영남대로의 핵심 관문으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죽령과 계립령 하늘재가 주요 통로였다. 죽령은 이미 알려진 대로 신라 죽죽장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기 위해 넘었던 최초의 길로서 <삼국사기>에 자세히 소개된다.
특히 왜군이 한반도를 침범해 왔을 때 신립 장군이 조령관문을 버리고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충주 탄금대를 방어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뿐만 아니라 많은 개인 문집에서도 잘못된 방어라고 질책하는 항소가 수십 차례 등장한다.
조령은 남북·동서 가르는 고갯길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편에 ‘조령산성은 조령의 세 성으로, 하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는 조령관이고, 하나는 응암 북쪽에 있는 중성이며, 하나는 초곡에 있는 주흘관이다’라고 나온다. 신립 장군이 철옹성 같은 조령의 3개 성을 버려 지금까지 그 명성에 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임란 이후에도 그 3개의 성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제1 관문(주흘관), 제2 관문(조곡관), 제3 관문(조령관)이다.
조선시대까지 조령은 하나의 고갯길로 봤을 뿐 산으로서의 개념은 부각되지 않았다. 현대 들어서 조령에 산을 붙여 조령산(1,026m)이라 명명하게 됐다. 조령산의 범위는 제3 관문인 조령관에서 이화령까지의 능선을 말한다. 조령산과 동쪽으로 마주보는 주흘산이 예로부터 문경의 진산으로 대접받아 왔다. 문경의 북쪽을 완전히 감싸는 산이 바로 주흘산과 조령산인 것이다. 그리고 넘어가면 충청도로 연결된다.
문헌이나 기록에는 조령이 여기저기 등장하는데 16세기에 발간된 <동람도>에는 조령이란 지명이 어디에도 없다. 조령이 위치할 만한 장소에 ‘草岾초점’이란 명칭만 보인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옛날부터 ‘새도 넘나들기 험한 고개’라 하여 조령으로 사용하다가 조선시대 들어서 지명을 한글로 바꾸면서 새재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초점이 과연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해 한국지명학회 회장을 지낸 전남대 국문과 손희하 교수는 “새도 넘기 어렵다고 해서 새재라 했다는 설명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에 그만한 높이의 고개는 매우 많다. 우리말에서 ‘새’는 원래 풀을 의미한다. 채소의 옛말이자 방언인 남새밭이나 초가집을 말하는 샛집, 그리고 억새 등에 포함된 새는 전부 풀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조령에만 풀이 많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고갯길에는 다 풀이 있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손 교수는 “새는 풀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이란 뜻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조령과 동쪽으로 마주보는 주흘산이 동서로 뻗어 있는 중간에 있는 험한 사잇길이었기 때문에 새재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언어는 당시 편리한 대로 사용하고, 문자는 형식을 갖춰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 영남대로를 개통하면서 새로 난 신작로란 의미로 새재로 명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손 교수는 결론적으로 “민간에서 말을 할 때는 새재라 쓰고, 문장으로 남겨야 할 때는 초재 또는 초점, 조령으로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앞에서 언급한 조선 초기 김시습의 시나 서거정(1420~1488)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 15세기에 쓴 그의 시에 ‘조령’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만경萬景의 높은 누각 반공에 서 있는데, 올라와 보니 아름다운 흥치를 금하기 어렵구나. 달천의 푸른 물은 금탄을 접하였고, 조령 푸른빛은 월악을 연하여 높도다. 물결에 뜬 백구와는 맹서가 친숙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황학은 부를 지어 부를 만하구나. 남북으로 보내고 맞는 일이 어느 때나 끝나리. 산은 스스로 푸르고 물은 스스로 아득하도다’라고 노래했다. 서거정은 또한 ‘조령의 남쪽은 본래부터 이름난 곳과 경치 좋은 땅이 많다고 일컫는다’는 문장도 남겼다. 따라서 당시에 문장에서는 조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