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어느 여성 산악인의 신발장…오래된 장비가 아름답다

  • 글·사진 거칠부(필명)
    입력 2021.02.1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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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등산인의 신발장. 히말라야 장기 트레킹을 갈 때마다 중등산화를 구입했고, 4켤레의 마인들 중등산화가 생겼다. 등산과 관련 없는 신발은 검정색 운동화뿐이다.
    1998년, 산에 다니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당장 필요한 게 등산화였다. 당시 산악회에는 초보자들을 위한 ‘장비모임’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종로5가 ‘산으로 가는 길’ 장비점에서 주로 모였다. 친구와 나는 쭈뼛거리며 모임에 참석했고, 그들의 추천을 받아 몇 가지 장비를 샀다. 그중에서도 중등산화는 꽤 낯선 물건이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는 무겁기까지 했고, 이런 것을 신고 걷는다고 생각하니 뭔가 대단한 걸 하는 것 같았다.  
    산행경력이라고는 몇 번이 전부였던 어느 날, 두 사람이 내게 지리산 무박종주를 제안했다.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른 채, 길들지도 않은 새 등산화를 신고 따라 나섰다. 중산리에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많아서 버거웠고, 간신히 도착한 천왕봉에선 세찬 바람에 겁을 먹었다. 
    바람을 피해 통천문 구석에서 먹던 라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문제는 세석을 지나면서부터였다. 등산화 뒷부분이 발목을 쓸면서 멍이 들었고, 얇은 면양말이 전부라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나의 머릿속은 온통 발목의 고통뿐이라서, 처음인 지리산을 걸으면서 내내 울상이 되었다. 정상석을 설치하고 있는 삼도봉을 지나면서 사진을 찍고, 여차저차해서 밥 먹는 시간 빼고 12시간 만에 성삼재에 도착했지만, 등산화에 대한 원망이 컸다. 이놈의 등산화를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했다. 지독한 고통을 줬던 등산화는 이후 모든 산행을 같이 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처음이 참 중요했다.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따라 산행 스타일이 결정되고, 선호하는 장비도 달라진다. 나는 지리산 무박종주 이후 24년째 중등산화만 신는다. 1시간짜리 산행부터 몇 개월에 걸친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오직 한 등산화만 신는다. 등산화가 크고 무겁지 않으면 어색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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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타시랍차라(5,755m) 아래 절벽에서의 야영. 정상까지 갔다가 폭설로 넘지 못하고, 아래에서 대기한 후 다음날 다시 넘었다. 이때 사용한 텐트는 소위 말하는 짝퉁이다. 현지 여행사에서 제공한 텐트인데, 지퍼가 매끄럽게 열고 닫히지 않아 조금 불편했다.
    가장 좋아하는 ‘반포텍’ 텐트
    첫 텐트를 개시한 것도 지리산이었다. 2002년 2월 웅석봉 아래 마른 풀밭, 생애 처음으로 가져본 내 집이었다. 그 뒤로 야영지를 물색하고 텐트를 치는 일이, 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산에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에게도 선호하는 장비가 생겼다. 특히 텐트를 좋아해서 한때는 종류별로 6동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반포텍’ 텐트를 좋아했는데, 중요한 산행에는 둘 중 하나를 꼭 챙겼다. 3인용 텐트는 히말라야에서 악천후를 같이 견디기도 했다. 
    중저가에 속하는 반포텍 텐트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하던 나도 고가의 텐트를 구입한 적이 있다. 1년 동안 준비한 시험에 합격한 후 스스로에게 전하는 축하의 의미였지만, 100만 원이나 되는 텐트를 사놓고 오랫동안 후회했다. 예쁘기는 했지만 값에 비해 쓰임새가 모호했고, 내 산행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고가의 텐트보다 실용적이면서 튼튼한 텐트를 선호하게 됐다. 
    나는 산에 오랫동안 다녔지만 산에 대해서도 장비에 대해서도 서툴기만 하다. 그래서 누군가 장비에 대해 물으면 난감하다. 내게 필요한 장비는 적당히 구입할 수 있지만, 다른 이에게 추천할 정도로 박식하지는 않다. 여러 산을 다니는 것보다 좋아하는 산을 자주 가는 것처럼, 장비도 그렇다. 
    좋아하는 장비를 오랫동안 사용하는 편이다. 등산화는 창갈이를 하고, 스틱은 여러 번 손잡이와 촉을 교체하고, 텐트나 등산복은 수선해서 다시 쓴다. 최근에는 8년 동안 입은 겨울 바지를 수선했는데, 감쪽같이 수선돼서 만족스럽다. 좋아하는 장비를 고쳐 쓰는 즐거움이다.
    한창 국내산을 다닐 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어떤 장비들이 있는지 구경이라도 했는데, 요새는 유행이 뭔지 모른다. 한 가지 장비를 닳도록 쓰는 편이어서 장비를 구입할 때 유행을 따라가는 일도 많지 않다. 온라인 쇼핑몰의 땡처리 등산복도 자주 입고, 사이즈가 작은 남성용을 구입해서 입기도 한다. 그래서 더러는 사이즈가 맞지 않기도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산행하기에 불편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로 해발 3,000~5,000m대의 히말라야를 걷는 고산 트레킹을 한다. 이 정도 높이에서는 보통 특별한 등반 기술이나 전문 장비가 필요하지 않기에, 고산 적응만 된다면 걷는 데 무리가 없다. 좋아하는 고도는 4,000~5,000m, 이 높이에서 걸을 때 가장 쾌적함을 느낀다. 하지만 높이가 높이인지라 히말라야에 갈 때만큼은 나도 질 좋은 장비를 마련한다. 히말라야에서 등산장비는 곧 생존이라 생각하기에 중요한 장비는 제대로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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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키스탄 비아포빙하 마르포고로(4,410m)에서의 야영. 마인들 중등산화와 야크털 양말, 침낭을 말리고 있다. 침낭은 마모트 콜멤브레인 구스다운 1,064g. 히말라야 트레킹 할 때는 장비를 건조시켜야 다음날 운행이 쾌적하다.
    가장 중요한 장비는 등산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등산화다. 등산화만큼은 가장 좋은 것으로 구입한다. 우선 히말라야의 돌길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내구성이 있어야 한다. 웬만한 등산화는 밑창이 금방 닳거나 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파키스탄 히말라야 트레킹 때 일행들의 등산화 밑창이 6켤레나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한 일행이 예비 등산화를 빌려줬다가, 정작 자신의 등산화 밑창이 떨어졌을 때 돌려받지 못한 일도 있었다. 
    오랫동안 걷는 만큼 발수 기능도 좋아야 하고, 눈과 비에도 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5~6개월 연속으로 걸어야 할 때는 안전을 위해 등산화를 새로 구입한다. 덕분에 똑같은 등산화가 4켤레나 있지만, 히말라야를 다녀오면 창갈이를 해서 다시 신는다.  
    다음은 침낭이다. 각별히 신경 쓰는 장비지만 브랜드 상관없이 따뜻하면 된다. 몇 개월 동안 연속으로 쓰는 통에 다른 사람들보다 교체 주기가 빠르지만, 운 좋게 네팔에서 쓸 만한 침낭을 구해서 꽤 오랫동안 들고 다니기도 했다. 당장 침낭을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으면, 기능을 보강할 수 있는 추가 장비를 챙긴다. 이를 테면 침낭 라이너나 커버 같은 것들이다. 
    아무리 땡처리하는 저렴한 등산복을 입어도 다운재킷, 겨울바지와 티셔츠, 양말, 내복 같은 건 검증된 것들로 준비한다. 산에서 추위 때문에 고생해 본 사람이라면 동계 장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추위 앞에서 무기력해지기에 동계 장비만큼은 세심하게 챙긴다. 참고로 히말라야 트레킹은 사계절 등산복이 모두 필요하고, 계절과 고도에 따라 여름 등산복을 더 자주 입기도 한다.  
    히말라야 횡단을 할 때는 원정용 텐트를 챙겨갔다. 어렵게 텐트를 구해서 횡단을 마쳤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현지에서 중고로 팔아버렸다. 등반이면 몰라도 트레킹에선 그렇게 좋은 텐트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현지 여행사에서 내준 짝퉁 텐트를 사용하면서, 이 정도면 우리나라 일반 텐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음번 트레킹 때는 국산 백패킹용 텐트로 해발 2,000~5,800m에 이르도록 야영을 했고, 문제없이 트레킹을 마쳤다. 날씨가 도와준 덕분이기도 했지만, 일반 텐트도 내 기준에서는 쓸 만했다.
    2011년 백두대간 할 때 하늘재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북진 후 다시 남진 중이었다. 할아버지의 짐은 크지 않은 배낭이 전부였는데, 텐트가 아닌 비닐 한 장으로 비박을 했다. 그때의 놀라움이란. 파키스탄에서 만난 포터들 역시 돌담 위에 씌운 비닐이나 방수포가 전부였다. 꼭 필요한 조리도구와 침낭, 밀가루와 차. 그게 그들의 짐 전부였다. 네팔에서도 포터들의 짐은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그들이 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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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용 구스다운 침낭. 다운은 잘 펴서 보관해야 보온력이 유지된다.
    고수의 장비는 간소하고 소박해
    내가 만난 산행 고수들은 하나같이 장비가 소박하고 간소했다. 그들은 꼭 필요한 것은 챙기되, 그렇지 않은 것은 욕심내지 않았다. 북인도 히말라야에서 같이 걸었던 한 분은 20년이나 된 등산화를 계속 수리해서 신고 다녔다. 옷차림도 수수했다. 
    어떤 분은 빛바래서 낡고 찢어진 배낭을 꿰매서 쓰고, 너무 오래 입어서 버려야 할 것 같은 옷도 기워서 입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데도 그랬다. 그게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적어도 그들은 좋고 화려한 장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비를 알뜰하게 사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산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멋모르고 잘 쓰다가, 장비에 눈을 뜨면 이것저것 사들이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중복되는 장비들이 방을 채우게 되고, 한두 번 쓰고 끝나는 것들도 생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에 다니면서 장비를 비교하게 되고, SNS용 사진도 필요하고, 유행도 따라가고 싶고, 그러면서 장비 욕심은 경쟁적으로 변한다. 대개의 경우 산에 다니는 동안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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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낭을 보관한 옷장. 장비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한 번 구입한 장비는 소중히 관리한다.
    하지만 어떤 장비를 어떻게 이용하든 그건 개인의 취향이라서,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비에 관심이 없다. 멋진 장비를 폼 나게 사용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좀 궁색해도 절약이 미덕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취향은 있는 거니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산에 다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렇게 많은 장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장비로 멋지게 차려입은 것보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빛바램이 내 눈에는 더 멋있어 보인다. 낡음이 주는 연륜과 아름다움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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