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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낭만야영] 궁예가 강씨부인 찾듯, 어둠 속에서 선배 이름을 부르다

글·사진 민미정 백패커
  • 입력 2021.02.0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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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정의 낭만야영ㅣ한북정맥 국망봉]
칠흑 산속 희미한 랜턴 빛… 선배 배낭엔 진수성찬이

수묵화처럼 펼쳐진 민둥산 설경을 등지고 서걱거리는 눈길을 걸어오르는 필자.
수묵화처럼 펼쳐진 민둥산 설경을 등지고 서걱거리는 눈길을 걸어오르는 필자.

눈 소식에 백패킹 멤버들이 모였다. 유초연 언니를 비롯한 4명이 모여 오랜만에 폭설이 내린 한북정맥漢北正脈을 걷기로 했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白頭大幹 북한 쪽 추가령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철원, 포천, 양주, 의정부를 거쳐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에 이르는 산줄기다. 중부 지방 내륙에 위치해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 산지는 대부분 6·25전쟁 이후 민간인의 출입과 개발이 제한된 지역이며, 산림이 울창하고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다.

복계산, 광덕산, 도마치봉, 국망봉, 견치봉, 운악산에 이르는 1,000m급 연봉들은 계절을 막론하고 즐겨 찾는 곳이다. 이번 설산 백패킹은 강씨봉과 민둥산의 중간 지점에서 시작해 국망봉 자연휴양림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잡았다.

토요일 근무로 국망봉휴양림에서 출발하는 이경철 선배는 숙영지인 국망봉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차를 나눠 타고 포천으로 향했다. 가평 강씨봉자연휴양림을 들머리로 해서 도성고개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차량 회수가 용이한 포천 일동면을 들머리로 잡았다.

식당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는 쉘터. 겨울 백패킹에선 텐트 무게를 줄이기 위해 쉘터 하나에 모여 자기도 한다.
식당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는 쉘터. 겨울 백패킹에선 텐트 무게를 줄이기 위해 쉘터 하나에 모여 자기도 한다.

마을을 지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선 SUV 차량은 놀이기구라도 탄 듯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험한 돌무지를 한참 달리고 나서야 멈췄다. 차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얼굴을 할퀸다. 두 눈을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살을 에는 날카로운 바람을 막아내며 배낭을 짊어지고, 서둘러 산행을 시작했다. 몸이 데워질 때까지 고개 숙여 꽁꽁 언 땅만 보며 걸었다. 허벅지를 스치는 매서운 바람의 아릿한 통증, “춰, 춰, 춰, 춰(추워)”라는 말을 가뿐 날숨처럼 쉴 새 없이 내뱉었다. 기대했던 설경은 없고, 회초리처럼 메마른 잔가지만 무성한 살풍경은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배낭 무게는 느낄 겨를도 없이 빠른 속도로 목표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고도계가 800m를 나타내자 능선에 올라섰고, 그곳엔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씨봉에서 민둥산으로 이어지는 중간 어디쯤이었다.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민둥산으로 길게 늘어선 길을 훑어보았다. 공기까지 하얗게 얼어버린 듯 흑백 사진처럼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기대했던 설경을 만났지만, 금세 식어버린 땀에 한기를 느끼며 차가워진 손을 움켜쥐었다. 설경에 녹아들어가는 앞선 일행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묵화 같았다. 매년 접하는 모습이건만 겨울이 시작되면 항상 그립고, 감동적인 풍경이다. 저 멀리 밋밋한 민둥산 너머로 희뿌연 안개에 희미하게 가려진 연봉들을 보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발길을 재촉했다. 민둥산까지는 비교적 수월했다. 설경에 감탄하느라 추위도 잊은 채 정상에 도착했다. 어느 여름날 찾았던 민둥산에서는 화악산 정상이 뚜렷하게 보였는데, 온통 하얗게 변해 버린 탓에 키 작은 정상석만 민둥산이라는 걸 알려 줄 뿐이었다.

화이트 아웃의 설산을 걷다 보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몽환적 느낌이 들곤 한다.
화이트 아웃의 설산을 걷다 보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몽환적 느낌이 들곤 한다.

현기증 날 만큼 아름다워

민둥산에서 이어지는 견치봉犬齒峰은 봉우리 몇 개가 개의 이빨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다고 해서 개이빨산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이전 기억으로는 그리 뾰족했던 것 같진 않지만, 화이트아웃으로 보이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하얗게 얼어붙은 숲길을 따라 비교적 수월한 능선길을 걸어 견치봉에 도착했다. 여전히 하늘은 하얗게 닫혀 있었지만, 나뭇가지마다 곱게 핀 눈꽃들은 현기증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국망봉을 오르는 길은 역시 쉽지 않았다.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지체한 탓에 벌써 오후 4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종일 해는 없었지만, 날이 저물어 가면서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다. 재킷을 하나 더 꺼내 입었지만, 한기는 여전했다. 몸을 빨리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한낮의 기온에 살짝 녹아 있던 눈이 돌덩이처럼 아이젠에 엉겨 붙어, 가뜩이나 무거워진 발걸음은 딱딱한 나막신에 발을 구겨 넣고 걷는 느낌이었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걸음을 방해하는 진드기 같은 눈덩이를 스틱으로 떼어내느라 멈춰서야 했다.

해가 넘어간 건지 아닌지 모호한 시간이 되어서야 반듯하게 깎아 세워놓은 국망봉 정상석에 도착했다. 국망봉은 험하지 않은 육산이지만, 해발고도 1,167m로 한북정맥 최고봉이다. 높고 산세가 웅장해 경기의 지리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산이다. 고산답게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 있어 날씨가 좋을 땐 북한산까지 드러난다. 멋진 풍경만큼 흥미로운 전설도 전해진다. 이 일대의 산들은 궁예와 관련된 전설이 많은데, 궁예가 태봉국을 세워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기강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폭정이 심해지자, 이에 간언하는 부인 강씨를 쫓아냈는데, 그곳이 바로 강씨봉이라는 것이다. 이후 왕건에게 패한 궁예가 잘못을 깨닫고 부인 강씨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궁예는 자책하며 봉우리에 올라 도성 철원을 바라보았다 하여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이 담긴 국망봉이라 불린다.

인적 드문 일동면 등산로에는 이정표가 없지만, 계곡으로 이어진 산길을 오르면 능선에 닿는다.
인적 드문 일동면 등산로에는 이정표가 없지만, 계곡으로 이어진 산길을 오르면 능선에 닿는다.

배낭을 풀고, 쉘터와 텐트를 쳤다. 경철 선배도 곧 도착할 것이었다. 쉘터에 모여 몸을 녹이고 점심을 건너뛰어 허기진 배를 간단히 채웠다. 밖은 어두워졌고, 벌써 도착했어야 할 경철 선배는 아직도 오르는 중이라고 했다. 눈이 많이 쌓여 홀로 러셀을 하며 올라오고 있다지만 어둠이 짙어지도록 보이지 않자 걱정이 엄습해 왔다. 전화로 현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너무 추운 날씨 탓인지 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눈이 많이 쌓여 있었기에 등산로를 벗어나 길을 잘못 들었을까봐 걱정되었다. 우리는 대략 올라오는 경로가 보이는 곳으로 각자 흩어져, 경철 선배의 랜턴 불빛을 찾기로 했다. 산길로 올라도 힘든 된비알을 비등산로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홀로 러셀하며 오르고 있다면,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났을 것이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시야가 좁은 랜턴 빛 하나에 의지한 채 오르노라면, 멘탈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급기야 경철 선배는 “전화 받는 것도 여의치 않다”며 “알아서 올라가보겠다”는 말만 남긴 채 통화도 되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철 선배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아래쪽에서 우리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소리로라도 가늠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쉴 새 없이 외쳤다. 나라를 빼앗긴 궁예가 착잡한 마음으로 서 있었을 이곳에서 선배가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반대쪽을 살피던 일행이 “저기 있다!”고 외치자 피로도 잊은 채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여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들 미끄러지듯 아래로 뛰어갔다. 하나였던 여린 빛은 여러 개의 빛으로 쪼개져 힘차게 흔들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견치봉 정상. 열린 경치는 없지만 나뭇가지마다 설화가 피어 심설 산행의 즐거움을 알려 준다.
견치봉 정상. 열린 경치는 없지만 나뭇가지마다 설화가 피어 심설 산행의 즐거움을 알려 준다.

폭소 유발자…한겨울의 아이스팩

다행이었다. 경철 선배의 모습이 뚜렷해지자 눈물이 핑 돌았다. 피로에 수척해진 얼굴이 안쓰러웠지만,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인 선배는 배낭에서 커다란 디팩(짐을 보관하는 케이스)을 꺼냈다. 디팩 안에는 많은 음식과 커다란 아이스팩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종주하느라 음식을 많이 못 챙긴다는 걸 알고, 맛난 음식을 가득 챙기고 상할까봐 아이스팩까지 넣었던 것이다. 이 겨울에 아이스팩이라니… 우리는 한바탕 배를 잡고 웃었다. 좀 전까지 지옥을 맛본 우리는 맛난 음식 덕에 천국을 맛보았다.

새롭게 맞이한 아침의 하늘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지만, 도마치봉과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치열한 능선은 장관이었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국망봉휴양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산 길은 분명하게 하나로 나있지만, 샛길로 빠질 만한 곳이 제법 있었다. 경철 선배는 정확히 어디서부터 샛길로 빠진 건지 알고 있었다. 휴양림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 거의 산행 시작부터 잘못 들어섰던 것이다.

우리는 산행 경력이 얼마인데 길을 놓쳤냐며 선배를 놀렸다. 하산할 때까지 경철 선배는 진땀 섞인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놨다. 오랜만에 한 종주 산행에 두고두고 곱씹을 새로운 안주거리 가 생겼다며 모두가 만족해했다.

산행정보

1일차 일동면 들머리(202m)~민둥산(1,008m)~견치봉(1,102m)~국망봉(1,168m) 총 11㎞ 5시간 10분 소요

2일차 국망봉(1,168m)~국망봉자연휴양림(318m) 총 4.6㎞ 2시간 30분 소요

심설 산행 주의사항

■ 평소보다 산행 시간을 두 배로 잡고, 오후 4~5시 이전에는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계획한다.

■ 보온 및 방수 의류를 철저히 준비해 체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산행 중 식사를 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해, 칼로리가 높고 무게가 덜 나가는 간식을 준비한다. 초콜릿, 건포도, 곶감, 양갱 등.

■ 초보자는 혼자 하는 심설 산행은 피하는 것이 좋다.

■ 비상사태에 대비해 헤드랜턴과 휴대폰을 충전할 수 있는 보조 배터리를 충분히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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