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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독자산행기] 흘림골에 홀리다

제상출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 입력 2021.04.2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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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설악 흘림골의 아름다움에 취해 걷고 있는 일행들.
남설악 흘림골의 아름다움에 취해 걷고 있는 일행들.

“한계령을 오르는 너도 힘에 겨워 숨을 몰아쉬고 있구나. 너를 타고 있는 나도 힘이 드는구나. 이 고개를 넘으려면 힘이 한계점까지 다다른다고 고개 이름을 한계령이라 지은 것은 아니겠지?”

바들바들 떠는 자동차에 말을 걸며 남설악 흘림골 들머리에 도착한다. 신발 끈을 다시 묶고 굳은 몸을 푼 뒤 흘림골로 오른다. 단풍이 제법이다. 

날과 달이 지나면 계절은 틀림이 없이 찾아와서 나뭇잎을 물들인다.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주말을 피해 평일에 온 것이 적중했는지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흘림골 등산로로 오른다. 잠시 오르면 여심폭포가 나온다. 이곳은 한 선녀가 흘림골에 홀려 너무 신나게 놀다 보니 몸에 살이 쏙 빠진 탓에 고쟁이가 헐렁해져 하늘에 오르다가 그만 고쟁이가 흘러내려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폭포라고 한다. 

신비롭고 오묘한 여심폭포의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세 딸의 아빠로서 아들 욕심에 냉큼 입가에 폭포수를 가져가려다  새삼스러워 그만둔다. 그저 예쁜 폭포를 남겨 준 선녀에 고마울 따름이다. 

여심폭포를 돌아 등심폭포에서 손을 씻고 깔딱고개를 지나 등선대에 닿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고사가 이곳에서 만들어졌지 않을까 싶다. 술이 있으면 신선이 되고, 술이 없으면 부처가 된다는 곳이 여기인 것 같다. 혹시나 스틱이 썩었을까 한 번 괜히 만지작거려 본다.

실한 칠형제 바위가 한편에 자리하고 있고, 건너편엔 튼실한 설악의 서북능선이 내달린다. 힘든 구간은 없이 약간의 오르락내리락을 즐긴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져 온 도시락을 펼쳤다. 와이프가 한껏 준비한 도시락이다. 달걀말이에 쇠고기 두루치기, 멸치, 김치로 맛나게 먹었다.

단풍 한 잎을 와이프 머리에 꽂아 줬더니 소녀 시절 겪은 단풍에 얽힌 웃픈(?) 얘기를 들려준다. 

방과 후 남아서 교실 청소를 하는데, 유리창을 닦으면서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하고 노래를 불렀단다. 그런데 운동장을 지나 교문으로 향하던 한 선생님이 노래를 듣고 돌아와서 혼을 홀랑 빼놓을 정도로 혼을 냈다고 했다. 이유도 까닭도 모른 채 잔뜩 혼쭐이 나고 뒤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선생님 이름이 이부영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도 단풍이 한창이라 절로 노래가 나왔었다고 했다. 

아름다운 주전골의 풍경風景…은은한 성불사의 풍경風磬

옛날과 지금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흘림골 단풍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를 이루고 가끔 붉은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의 차분한 정취가 은은히 젖어 들게 했다. 

봄의 꽃은 꽃대로, 가을의 단풍은 단풍대로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 동안 바람과 비가 깎아 내어 더욱 흘림골을 멋있게 만들어 놓았다.

“지금이라면 선녀님은 일부러 목욕할 때 옷을 잘 보이는 곳에 벗어 뒀을 거야.”

“왜?”

“나무꾼처럼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 요새 얼마나 귀한데.”

실없는 듯, 있는 듯한 소리를 하며 성불사 경내에 들어선다. 괜히 걸음이 더 조심스러워진다. 은은한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문득 가곡 <성불사의 밤>이 떠오른다. 찾아보니 이 절이 아니라 함경도에 있는 동명의 절이란다.

주전골은 이번 등산의 백미다. 바람이 불어 하늘에 구름을 걷어내니 주전골이 훤히 밝아져 온다. 큰 비는 계곡을 깎았고, 작은 비는 계곡을 다듬어 놓는다. 멋진 풍경과 신비로운 전설로 가득한 흘림골과 주전골의 매력에 푹 빠진다.

힘겹게 넘어온 걸 아는지 오색약수가 반겨 온다. 한 바가지 가득 떠서 벌컥벌컥 마신다. 산을 더 높고, 힘들게 오르는 것보단 쉬엄쉬엄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순수하게 즐기고 재미를 찾는 산행이 더 좋다. 세상에서 배운 엇나간 행동과 생각을 산에 앉아 하나씩 풀어 놓고, 다시 맞추어 봐야 잃어버린 몸이 내게 걸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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