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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화촌일기] 보리싹 갉아먹던, 그 많던 산토끼는 어디 갔을까

글·사진 이남석 자전거 여행가
  • 입력 2021.04.1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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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 태우기와 쥐불놀이 모습.
섶 태우기와 쥐불놀이 모습.

입춘과 정월 초하루가 지났음에도 기온이 널뛰기를 반복했다. 그 바람에 땅속에서 해동을 기다리던 곤충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라니나 멧돼지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주말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였는데 먹이를 구하지 못한 새들이 우리 집 마루까지 몰려들었다. 이후 날이 풀려 눈 두께가 줄어들기는 했어도, 아직 심산 응달에 쌓인 눈은 요지부동이다.

올봄에는 햇빛이 많이 드는 양달로 장독을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옮길 땅을 고르고 주변 나무를 벤 후 손수레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길을 냈다. 산골에서 일하다 보면 몸이 따라가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데, 어느새 일이 끝난다. 비결이라면 일의 양을 정하지 않고 그날 컨디션에 따라 진행한다. 육체와 정신이 무리하지 않고 흡족할 만큼 한 후 멈춘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하는 방법으로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새 일이 끝나 있다. 이 방법은 은퇴 전 직장생활을 하면서 두꺼운 고전문학 서적을 읽는다든지, 복잡하고 긴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때 터득한 방법이다. 믿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으나, 나는 고교에서 ‘마이크로 프로세서’ 과목을 가르쳤다.

독을 다 옮기고 나면 그 자리에 밭을 만들고, 거름을 내서 지력을 높인 다음 무엇을 심을지를 결정할 계획이다. 거름이라 하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려서 가장 힘들고 하기 싫은 일 중 하나가 밭에 두엄을 내는 일이었다. 평지에서는 소가 끄는 마차에 거름을 싣고 논이나 밭으로 나가 펴니 크게 수고로울 게 없었지만 다랑구지나 비탈밭이 많은 강원도 산골에서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보리밭. 겨울을 난 보리가 이제 막 잎을 내기 시작한다.
보리밭. 겨울을 난 보리가 이제 막 잎을 내기 시작한다.

길이 가파르고 좁아 우마차나 손수레가 다닐 수 없으니 거의 지게를 사용했다. 지게에 싸리나무를 잘라 엮어서 만든 바작(발채의 방언)을 얹은 후 그 위에 두엄을 올려놓고 밭으로 날랐다. 두엄이라는 게 물기가 많은데다 무거워 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가 밭에 쏟아 붓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너덧 번을 옮기면 허리나 어깨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화학비료가 귀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지금 보면 친환경 농법을 실천했던 셈이다. 거름 만드는 방법은 보통  외양간 바닥에 깔았던 검불이 소가 배설한 똥이나 오줌과 섞여 만들어졌다.

소가 없는 집에서는 돼지라도 키워서 거름을 만들었다. 외양간이나 돼지우리에서 파낸 거름은 냄새가 고약하고 발효가 덜 되어 두엄창에 쌓아놓고 한 달 이상을 기다리면서 눈이나 비를 맞혀 발효된 뒤 밭이나 논으로 옮겼다. 아무리 잘 썩은 두엄이라고 해도 그 냄새가 즐거울 리 없으니 온종일 그 일을 하고 저녁에 방에 들어오면 온 방 안이 두엄 냄새였다.

시골집 처마에 걸려 있는 수수와 절구통. 이런 풍경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골집 처마에 걸려 있는 수수와 절구통. 이런 풍경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무밥에 가재찌개 먹는, 그리운 저녁

“밤나무집 도령은 힘도 좋아 하루갈이 밭일은 일도 아닌데 한 뼘도 안 큰 보리는 언제 자라 이삭을 맺을까. 나싱개(냉이의 충청도 방언) 벌금자리 한 바구니를 캐도 보리밥 한 그릇으로 배 채우기 힘들어라. 에헤야, 이놈의 봄바람에 처녀 가슴만 설렌다네. 에헤야.”

곱게 딴 머리끝을 흰색이나 붉은색 댕기로 묶은 누나들이 부르던 노래이다. 대바구니와 짧은 칼을 들고 밭둑과 논둑을 따라가며 막 잎을 낸 냉이와 벌금자리 같은 나물을 뜯으며 부르던 노래이다. 정확하게 가사를 외울 수는 없으나 하굣길에 책보 집어 던지고 누나들을 좇아다니며 나물 이름을 물어보던 일이 엊그제 같으니 참으로 세월이 빠를 줄 어찌 어려서 깨달았겠는가.

누님들과 얘기하는 게 물리면 도랑으로 달려가서 돌을 쳐들거나 깊이 고인 웅덩이 속에 가라앉은 가랑잎을 걷어내면 그 속에서 겨울을 난 가재나 징거미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당시 학교에서는 게나 가재를 날로 먹으면 간이나 폐가 무슨 디스토마 균에 감염된다고 협박을 했는데 아이들은 그런 얘기 따위는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가재와 징거미로 꽉 채운 주전자를 들고 집으로 가서 등껍질을 벗겨 내고 냄비에 넣은 후 고추장과 무, 그리고 파를 썰어 넣고 간을 한 후 팔팔 끓였다. 그러면 가재와 징거미 색깔이 붉은색으로 변했으며, 저녁 밥상에 올라온 무밥에 가재 찌개를 먹는 저녁도 이른 봄에나 맛볼 수 있는 유일한 먹거리 낙 중 하나였다.

방 안에 설치한 통가리 속에 고구마도 얼마 남지 않고 광에 쌀과 보리까지 바닥이 드러나면 소위 말해 보릿고개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굶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니 어머니는 어떻게든 부엌에서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려야 했다. 그중 하나가 이른 봄에 들판에서 뜯어온 봄나물이었다. 얼마나 아이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 힘들었으면 이때부터 학교에서는 강냉이 빵이나 강냉이죽,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분유 덩어리를 나눠줬다. 그거라도 먹고 허기를 때울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느티나무에 걸친 금줄. 오래된 느티나무만큼 우리 민초들의 대접을 받은 나무가 있을까?
느티나무에 걸친 금줄. 오래된 느티나무만큼 우리 민초들의 대접을 받은 나무가 있을까?

그 많던 산토끼는 어디로 갔을까?

“광에서 밀가루라도 꺼내야겠어요.”

아버지가 가을에 사방공사를 다니면서 타온 밀가루를 꺼내 수제비 만들어 먹는 것도 보릿고개를 넘기는 데 힘이 되기는 했으나 매일 세 끼를 수제비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하루걸러 한 번씩 보리밥과 수제비가 번갈아 밥상에 올라왔다. 사방공사라 하면 나무가 없는 민둥산에 홍수를 줄이기 위한 녹화작업으로 충청도에서는 싸리나무 씨나 풀씨를 뿌리고 오리나무나 아카시아나무를 심었으며, 강원도에서는 잣나무나 낙엽송을 심는 일이었다.

그러니 산골 사람들에게 가을에 씨를 뿌리고 겨울을 지낸 보리나 밀 싹을 지키는 것도 큰일 중 하나였다. 당시 산에 나무란 나무는 거의 모두 부엌 아궁이 속에서 화목으로 소진되고 그나마 경사가 덜한 곳은 밭을 일궈 먹으니 유난히 산토끼가 많았다. 이것들이 겨울에는 싸리나무나 칡넝쿨을 갉아 먹다가 보리싹이나 밀싹이 쑥쑥 올라오는 초봄에는 야음에 밭으로 내려와 사정없이 먹어 치우니 산골 사람들은 보통 골머리를 앓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계책 중 하나가 밭을 관통하는 길 줄을 늘이고 거기에 깡통으로 만든 종을 매달아 그 줄을 집 기둥에 묶어 놨다. 그러면 새벽에 식구 중 누구라도 요강에 오줌을 누러 나와서는 기둥에 묶인 줄을 흔들어 소리를 내 토끼를 쫓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밭 가장자리에 난 보리싹은 어쩔 수 없이 토끼에게 보시해야만 했다.

지난해 가을에 심은 마늘. 봄이 되면 성장을 시작한다.
지난해 가을에 심은 마늘. 봄이 되면 성장을 시작한다.

동네 청년들은 겨우내 산으로 가서 청솔가지를 잘라 가두리를 만들고 군데군데 촘촘히 토끼 올무를 놔 수없이 잡았으나 워낙 번식력이 좋은 산토끼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근자에 산이 우거지면서 그토록 산골 사람들을 괴롭혔던 산토끼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음산한 귀신 소리를 닮은 게 올빼미 소리여.”

저녁 먹고 나서 해가 떨어지고 얼마 안 있으면 집 좌우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마치 하나가 부르면 다른 하나가 화답하듯 주고받으면서 그 친구 말마따나 귀신 소리를 냈는데 처음에는 부엉이인 줄 알았다. 뒤에 새를 전문으로 카메라에 담는 친구에게 녹음해서 보내줬더니 올빼미 소리라고 했다. 더구나 올빼미는 지금이 번식기라는 얘기를 듣고 더욱 놀랐다.

보통 새들은 봄이 와서 나무에 잎이 좀 나고 땅에서 풀이 올라와야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고 알고 있는데 절기상 봄이라고 해도 아직 눈도 녹지 않은 영하의 날씨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른다고 하니 그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주변에 고사목이 많고 바위로 뒤덮인 절벽이 있어 올빼미가 서식할 만한 장소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어쨌든 그 올빼미 소리가 음산하고 으스스했다. 밤에 화장실을 가려고 나와 보면 검은색 능선과 깊은 바다같이 무거운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시커먼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걸 봤는데 지금 생각하니 올빼미였다.

메주를 매달아 놓은 시골집.
메주를 매달아 놓은 시골집.

연날리기의 끝은 주먹다짐

“보름날 묵나물에 오곡밥 먹는 풍습도 우리 세대가 지나가면 끝난다고 봐야지.”

정월 보름 전 홍천 장날이었다. 나물거리도 사고 시장에 나온 메주도 알아볼 겸 장 구경을 하고 있었다. 말린 고사리나물과 취나물을 가지고 나온 노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명절 전이면 장마당이 북적했는데 요즘은 시장에 나온 사람이 적었다. 오히려 집에서 나물이나 채소, 띄운 메주를 들고 팔러 나온 노인이 더 많았다.

“보름날 귀밝이술 한 잔씩 마시고 딱딱한 밤이나 호두 같은 거 깨 먹구 그랬지. 산골 사람들은 호두 대신 가래나무 열매를 깨서 먹었는데 그냥 힘으로 하면 잘 안 쪼개지니 그릇에 기름을 약간 두르고 달구먼 가운데가 짝 쪼개졌어.”

정월 대보름이 되면 어른들은 마당에 멍석을 펴고 한쪽에 술상을 차려놓은 채 윷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만들거나 형이나 아버지를 졸라 만든 방패연을 날리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연을 날리다 보면 연싸움은 필연인데 그 끝은 늘 앙꾸잽이(껴안아 넘어뜨리는 행위의 충청도 방언) 아니면 주먹다짐이었다.

낮에 연날리기가 끝나면 아이들은 동네별로 패를 나눠 초저녁부터 쥐불놀이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놀이가 격해지면 연싸움할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 싸우거나 잘못해서 남의 집 짚가리를 태우기 일쑤였다. 어느 해인가는 쥐불놀이를 하다가 불이 산으로 옮아 붙어 어른들에게 경을 친 추억도 있다.

형 누나들은 저녁에 함께 모여 각 집을 돌면서 솥이나 찬장에 놔둔 밥이나 나물을 꺼내다가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이제는 볼 수도 없으며 잊혀가는 추억일 뿐이다. 당시 어른들은 애들이 놀다가 다투는 일에 끼지 않았으며, 또한 잘못하더라도 용서해 주는 관대함이 있었다. 사실 용서가 가장 혹독한 벌이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는 말은 사실 그것을 경계하는 말이었다. 청년들이 소중하고 아이들은 더 귀중하니 비록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이들을 잘 보살피고 걱정거리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해줘야 하는 건 기성세대의 책무라고 본다. 청년과 아이들이 이 강토의 주춧돌이고 기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커서 청년이 되며 그들이 일해서 낸 세금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그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도르륵” 노래를 부르는 개울 웅덩이에는 벌써 산개구리들이 알을 낳고, 단맛을 좇아온 토종벌들이 샘가에서 왱왱거리기 시작했다. 산골에 봄이 온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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