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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Art Hiking] 산행 목표는 정상이 아닌, 내 마음에 꽂힌 장면!

글·사진 김강은 벽화가
  • 입력 2021.04.2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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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림 이야기·마지막회
산에 올라 그림 그리는 벽화가의 마지막 독백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 오세브레이로 마을의 순례자 숙소에서 그림을 그렸다. 저녁 식사에 포함된 와인을 가지고 숙소 앞에서 일몰을 화폭에 담았다.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 오세브레이로 마을의 순례자 숙소에서 그림을 그렸다. 저녁 식사에 포함된 와인을 가지고 숙소 앞에서 일몰을 화폭에 담았다.

머리털이 자라고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보행기 시절부터 연필과 종이를 쥐어 주면 하루 종일 지칠 줄 모르고 선을 그어 댔다고 한다. 초등학교·중학교의 생활기록부 장래희망을 적는 칸에는 늘 화가나 만화가가 채워져 있었다.

A4용지를 반 접어 직접 만화책을 만들어 반 전체에 돌려 연재를 하고, 시험 기간에는 문제집 뒤에 몰래 연습장을 두고 하루 만에 한 권을 그림으로 채우기도 했다. 평생 그림 그리면서 살면 행복하겠다 싶었다. 어쩌면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전공으로 삼으니 그림이 재미없어졌다. 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3년 동안 입시 미술을 공식처럼 익혀야 했고,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교수님은 입시 스타일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3년간 가까스로 익힌 입시 스타일을 버리기 위해 다시 4년간 고군분투했다. 작업에는 작품성이 있어야 했고 특별해야 했다.

첫 아트하이킹. 도봉산에서 선인봉을 그림으로 담았다
첫 아트하이킹. 도봉산에서 선인봉을 그림으로 담았다

점점 그림은 내게 재미있기보다 어려운 것, 아리송한 것이 되었다. 과제로 제출한 드로잉은 교수님께 쓰레기 취급당하며 찢겨 버려지기도 했다. 드로잉과 함께 내 마음도 찢어졌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따라 그린 그림에 영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림 그리기가 다시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건 산에서 붓을 들고부터다. 졸업 후에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벽화가로서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내가 좋아서 그리는 그림’은 오랜만이었다. 산에서는 내 그림을 평가하는 교수님이 없었고, 무엇보다 사진으로만 보던 아름다운 풍경 속을 두 발로 직접 걸어서 마주하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나를 가장 자극했던 것은 ‘색’이다. 신록이 돋아나는 계절의 청초한 연둣빛, 수천 수만 가지의 화려한 단풍색, 하늘에 불을 지른 듯한 일몰과 초록색이 아닌 푸른색 산 그리메. 생생한 색을 마주 할 때면 머릿속에선 벌써부터 화폭을 펼쳐 붓질을 시작했다.

제주도 바굼지오름(단산)에서 산방산을 바라보며 아트하이킹.
제주도 바굼지오름(단산)에서 산방산을 바라보며 아트하이킹.

몇 년간 잊고 살았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책상에 앉아 작품성을 고민하기보다 지금 당장 일어나는 충동과 영감에 집중하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색을 고르고, 붓질하고, 나의 색감들로 화폭을 채우는 과정이 그저 즐거웠다.

학생 때도 직접 현장을 찾아 다녔다면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제라도 다시 그림을 즐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늦지 않았다. 온 세상을 걸으며 색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내 배낭 속에는 등산 장비와 함께 팔레트와 손바닥만 한 드로잉북, 붓들이 동행했다. 먼 타국의 땅이든, 국내 명산이든, 집 앞 들판이든. 언제든지 말이다.

고창 선운산 단풍의 화려한 색감을 그림으로 옮겼다.
고창 선운산 단풍의 화려한 색감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림을 그리면서 산행 스타일도 변했다. 이전까지는 최대한 많은 곳을 볼 수 있는 종주 산행을 선호했다. 또 몸이 힘들어야만, 정상을 올라야만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붓을 들고부터는 어떤 풍경이든 마음에 꽂히는 나만의 프레임을 찾았다.

산행의 목표는 산 정상이 아니라, 내 마음에 꽂히는 장면. 그거 하나면 충분해졌다. 산행 스타일이 달라지며 산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이름 없는 산도, 작은 동산도 내게는 명산이 되었다.

미국 PCT 시에라 구간을 걸을 때. 눈이 잔뜩 쌓인 풍경을 그렸다.
미국 PCT 시에라 구간을 걸을 때. 눈이 잔뜩 쌓인 풍경을 그렸다.

한때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이 싫어지면서 ‘그림은 취미로 해야 한다’는 말에 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이 ‘업’이어야 하는지, ‘취미’여야 하는지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깨달음은 그림은 즐길 때 비로소 더 풍부해진다는 사실이다.

2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결과물에 집중하기보다, 피사체를 선정하는 과정, 세밀히 관찰하는 과정, 한 땀 한 땀 터치를 올리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마음이라면, 평생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머리가 하얗게 새어서도 등산화를 신고 붓을 들고 산을 오르는 근사한 할머니의 모습을 그려 본다.

한여름의 울릉도 깃대봉에 올라 그림을 그렸다.
한여름의 울릉도 깃대봉에 올라 그림을 그렸다.
가장 아끼는 팔레트와 붓들.
가장 아끼는 팔레트와 붓들.
'본 기사는 월간산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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