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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5월의 섬 손죽도] 요절한 청년 장수의 넋…벚꽃이 눈물처럼 흩뿌렸다

월간산
  • 입력 2021.05.0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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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 섬&산100,
마제봉과 깃대봉, 하이라이트 삼각산까지 잇는 선착장 원점회귀 9km

손죽도의 백미인 삼각산을 오른다. 편안한 등산로를 두고 경치 좋은 해안 바윗길에서 잠깐 바위맛을 보았다.
손죽도의 백미인 삼각산을 오른다. 편안한 등산로를 두고 경치 좋은 해안 바윗길에서 잠깐 바위맛을 보았다.

바다는 말이 없었다. 허공을 옮겨 놓은 듯 파도는 손 놓고 있었다. 가만히 차올랐다 가라앉으며 섬의 굴곡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날의 아픔을 알고 있다며, 그들의 이름을 초혼가에 실어 읊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그가 무구장터여. 이대원 장군의 목 없는 시신, 부하들 시체가 널려 있던 곳이여. 그걸 주민들이 묻어 주고 무구장터라 이름 붙였제. 장군 목은 왜놈들이 가져갔지라.”

<선조수정실록>은 1587년 2월 1일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적이 고흥에 침범하였는데, 녹도를 지키는 장수 이대원이 막아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이보다 앞서 왜선 수 척이 침범했을 때 이대원이 미처 수사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그들을 쳐서 물리쳤는데, 수사 심암은 그가 자기의 공으로 삼은 것을 미워하였다(심암은 그 공을 자기가 세운 것으로 하자고 이대원에게 말했다가 거절당했다). 얼마 안 되어 왜선이 손죽도를 침범하자, 심암이 이대원을 선봉으로 삼고는 뒤이어 응원하지 않았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적이 되지 않았으므로 이대원이 전사했다.’

 무구장터의 이대원 장군 청동 동상. 선착장에는 이대원 장군 석조 동상이 있다.
무구장터의 이대원 장군 청동 동상. 선착장에는 이대원 장군 석조 동상이 있다.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전라좌수사는 수적 열세를 알고도 단지 100여 명의 병사를 주며 장군의 출병을 재촉했다. 장군은 이미 날이 저물고 군사도 적은데 출정하는 것은 무모하니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군사를 더 모아 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간언했다. 하지만 좌수사는 강제로 출병시켰다.

장군은 출병하며 수사에게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수사는 출병하지 않았고 장군과 병사들은 3일 밤낮을 격렬히 싸웠다. 중과부적이었기에 다시 한 번 병력 지원을 요청했으나 좌수사는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생포된 장군은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왜군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덮일 뻔했으나 전투에서 살아남은 부하 손대남이 돌아가 진상이 밝혀졌다. 분노한 선조는 전라좌수사 심암을 참수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심암은 한양으로 압송돼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이순신 장군은 이대원 장군을 잃은 것은 ‘국가의 큰 손실’이라 하여 이 섬을 잃을 ‘손損’ 큰 ‘대大’자를 써 손대도라 불렀다(이후 손죽도巽竹島로 바뀌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기명은 ‘녹도가’를 지어 장군의 죽음을 위로했고, 학자 안방준은 ‘이대원전’을 지어 널리 알리고자 했다.

선착장에서 마제봉으로 이어진 완만한 오름길.
선착장에서 마제봉으로 이어진 완만한 오름길.

전망데크 지나 또 전망데크, 조망의 섬

산이 마중 나와 있었다. 두 개의 바위봉우리인 삼각산이 배에서 내린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두 명의 선인이 서 있는 듯 쌍봉은 독특하면서 위엄 있었다. 이대원 장군의 현신마냥 모진 바닷바람에도 타협 없이 뜻을 세우고 있었다.

SNS에서 ‘설악아씨’로 유명한 설악산적십자구조대원 문승영씨와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손창건씨와 함께 입도한다. 손죽도의 유일한 산악회이자, 고향 지킴이들인 손죽산악회원들이 등산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맞아준다. 오늘은 마제봉과 삼각산을 오르고, 내일은 깃대봉을 오르면 시간 안배가 맞아떨어진다며 일행을 이끈다. 작은 섬이지만 봉우리가 여럿이고, 지형이 복잡해 선물세트를 하나씩 풀어헤치는 것마냥 잔재미가 있다.

편백나무와 활엽수가 섞인 깃대봉 오름길을 걷는 문승영(우측)씨. 최근에 등산로를 정비해 산길이 전반적으로 잘 나있다.
편백나무와 활엽수가 섞인 깃대봉 오름길을 걷는 문승영(우측)씨. 최근에 등산로를 정비해 산길이 전반적으로 잘 나있다.

산악회 송정민 부회장의 안내로 입산한다. 정갈한 시작이다. 대나무가 많아 이름에 ‘죽竹’ 자를 쓴다는 섬답게 대나무숲이 반긴다. 몇 발자국 들어서니 딴 세상이다. 내륙 산에서도 흔히 듣기 어려운 꾀꼬리와 맑은 새 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벚꽃 잎이 축포처럼 흩날리고, 뒤돌아보면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펼쳐진다.

귀한 섬산 풍경을 온 몸으로 음미한다. 코끝은 향기롭고, 눈은 시원하고, 피부에 닿는 햇살과 바람은 은은하다. 벌레가 적은 계절이라 모든 것이 쾌적하다. 산행이랄 것도 없이 능선은 순하여 땀 좀 뺄 만하니, 정상 언저리다.

흰백의 처녀총각 같은 손죽산악회원들이 바람 좋은 팔각정에서 간식을 차려놓고 기다린다. 이제 800m 왔는데 벌써 정상이라니, 웃음이 난다. 마제봉(173m) 실제 정상은 조금 더 가야 하지만 별다른 표지석이나 경치가 없어 팔각정이 산행의 정상 역할을 한다. 말 발자국이 있었다 하여 산 이름이 유래하지만, 실제로 말 발자국은 본 적 없단다.

손죽도의 풍파를 수백 년간 보았을 느티나무 노거수. 
나무 뒤로 삼각산 암봉이 드러난다.
손죽도의 풍파를 수백 년간 보았을 느티나무 노거수. 나무 뒤로 삼각산 암봉이 드러난다.

마제봉을 넘어서자 전망데크가 쉬었다 가라고 권한다. 이웃한 섬인 소거문도 상산(328m)이 힘 있는 산세로 우뚝 솟아 푸른 화폭을 꽉 채운다. ‘손죽마을 전망대’라는 별명답게 파랑·빨강이 섞인 지붕이 옹기종기 모인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 너머에 무뚝뚝한 장남 같은 육산 깃대봉과 재주 많은 막내 같은 삼각산이 바위산 특유의 현란한 굴곡을 드러낸다.

얼마 안 가 다시 너른 전망대에서 손죽산악회원들은 배낭을 내려놓는다. 다시 한가득 간식을 꺼내 권한다. 걸을수록 배가 불러오는 인심 좋은 산행이다. 섬 동쪽 해안선을 따라 걷는 벼랑길 맛도 별미다. 깎아지른 절벽과 순한 송아지 등 같은 산길이 도시에서 온 일행의 굳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바꿔놓는다. 실없는 농담과 자연스런 웃음이 흐르는 섬산의 봄날이다.

손죽도는 숨이 찰 만하면 어김없이 전망대를 내어준다. 전망데크의 섬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전망데크가 많다. 다음은 벼랑 끝에 자리한 바다전망대인 목넘전망대다. 섬 동쪽 벼랑에 있어, 주민들이 해돋이 명소로 찾는 곳이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돌담은 아기자기한 사진 명소로 거듭났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돌담은 아기자기한 사진 명소로 거듭났다.

능선을 내려서자 너른 사거리에 정자가 있는 지짐이재다. 매년 봄이면 주민들이 꽃으로 전을 부쳐 먹는다는 화전花煎놀이 마당이다. 그래서인지 봄꽃이 산길 구석구석 수놓았다. 산길 가운데에도 꽃이 꽤 피었는데, 그만큼 다니는 사람이 적어 숨 쉬는 흙이라 꽃이 핀다. 개별꽃, 유채꽃, 뽀리뱅이, 큰봄까치꽃, 흰민들레, 금창초, 제비꽃, 괭이밥, 장딸기꽃이 피어 산길이 컬러풀하다.

지짐이재에서 마을로 내려가 점심을 먹고, 삼각산으로 향한다. 손죽도는 배편이 하루에 한두 번밖에 없고 여수에서 올 경우 1시간 20분이 걸려 등산객이 많지 않다. 백패커들이 비교적 자주 찾는데 대부분 삼각산 전망데크에 텐트를 치고 일몰·일출을 보는 것을 정석처럼 여긴다. 하지만 주민들은 가급적 삼각산 정상 데크에는 텐트 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정상이 아니더라도 데크 3곳이 더 있다는 설명, 또 내년에 폐교가 확정된 거문도분교 손죽초교 잔디밭에 야영료를 내고 이용해 줄 것을 권한다.

BAC 인증지점인 깃대봉 정상. 무인 레이더탑이 있다.
BAC 인증지점인 깃대봉 정상. 무인 레이더탑이 있다.

손죽도 산행의 백미, 삼각산

파도치지 않는 바다와 흰 모래해변이 있는, 생계를 위한 활동이 멈춘 것 같은 마을에서의 식사. 싱싱한 풍경 같으면서 한편으로 쓸쓸한 정적의 시간이 마음에 든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고정관념의 숲에서 빠져나와, 바다를 처음 보는 것처럼 행복한 눈빛으로 삼각산(142m)에 들었다. 산악회 이안재 부회장은 뫼 ‘산山’자와 닮아 이름이 유래한다고 일러주었다. 작년에 뚫었다는 신작 임도를 따라 산에 든다.

 삼각산 해안 절벽 너머로 펼쳐진 망망대해와 초도군도. 촬영을 위해 바위 위에 잠깐 올라섰다.
삼각산 해안 절벽 너머로 펼쳐진 망망대해와 초도군도. 촬영을 위해 바위 위에 잠깐 올라섰다.

발품을 조금 팔았을 뿐인데 과분한 풍경이 이어진다. 북쪽 해안선 끝 전망데크에서 다시 바다다. 작은 무인도 몇이 정적에 휩싸여 있고, 시선은 섬과 섬 사이를 훨훨 날아간다. 나른한 날의 나른한 풍경, 하루쯤은 베짱이마냥 해먹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누리고 싶은 평화가 깃들어 있다.

푹신한 코코넛 양탄자를 따라 암봉을 돌아 데크계단을 올라서자 정상 데크다. 손죽도 최고 전망터임을 인정하게 되는 경치가 선물처럼 놓여 있다. 미인의 눈썹 닮은 해변과 마을, 마제봉과 깃대봉을 잇는 부드러운 능선, 거칠게 툭 튀어나온 소거문도 상산까지 시원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텐트 치고 하룻밤 자면 얼마나 달콤할까 싶은데 ‘야영금지’ 팻말이 보인다.

쾌속선 니나호와 손죽도 삼각산. 5월에는 운항 시간과 편수가 바뀔 예정이다.
쾌속선 니나호와 손죽도 삼각산. 5월에는 운항 시간과 편수가 바뀔 예정이다.

서쪽 해안선 벼랑으로 내려서니, 다시 전망데크다. 의정부에서 혼자 왔다는 사내의 텐트 한 동이 아담하다. 초도군도가 단정한 검은 실루엣으로 남은 해수면 위로 뉘엿한 햇살이 쏟아지는 풍경. 어찌나 여운 깊은지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 무구장터를 찾았다. 한스러움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조금 서늘했다. 장군의 동상과 묘에서 짧은 묵념을 하고 깃대봉(237m)으로 향한다. 코코넛 양탄자가 깔린 새로 만든 산길을 따라 오른다.

손죽도 최고봉답게 가파른 오르막 산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약초로 알려진 예덕나무가 유난히 많고, 편백나무도 작은 숲을 이뤘다. BAC 인증지점인 정상은 해양경찰의 무인레이더탑이 있다. 최고봉이지만 산행의 재미는 삼각산이나 마제봉에 비해 밋밋하다. 인증사진을 찍고 임도를 따라 내려서니 어제 왔던 지짐이재다.

삼각산 정상에서 본 손죽도. 바로 아래 자갈해변 기슭이 무구장터다. 방파제 뒷산이 마제봉이며 그 너머 봉우리가 소거문도 상산.
삼각산 정상에서 본 손죽도. 바로 아래 자갈해변 기슭이 무구장터다. 방파제 뒷산이 마제봉이며 그 너머 봉우리가 소거문도 상산.

꿈 많던 청년 장군의 눈물일까. 흩날리는 벚꽃 잎이 서글프다. 육지로 가는 길, 선착장의 이대원 장군 동상이 떠나는 이들을 바라본다. 죽음을 직감한 장군이 마지막 3일의 결전 중 썼다는 ‘절명시絶命詩’가 들리는 것 같다.

‘해 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 외로운 군사 힘이 다하여 끝나는 일생 슬프다 / 나라와 어버이 은혜 갚지 못하니 / 원한이 구름에 얽혀 풀릴 길 없네’

섬 가이드
AC 인증지점은 깃대봉이지만 산행의 재미는 삼각산이 으뜸이다. 마제봉부터 삼각산까지 일주하더라도 부지런히 걸으면 산행이 어렵진 않다. 선착장 부근 대합실 옆 데크계단이 등산로 입구다. 여기서 마제봉을 거쳐 지짐이재까지 3km이며, 지짐이재에서 깃대봉 지나 이대원 장군묘까지 2.4km이다. 여기서 삼각산을 거쳐 무구장터까지 2km이다. 순수 산행 거리는 7.4km이며, 무구장터에서 도로 따라 선착장까지 1.7km이다.

마제봉, 봉화산, 깃대봉, 삼각산 모두 별도의 정상 표지석은 없으며, 이정표와 등산안내판도 거의 없다. 다만 산길은 선명하게 잘 나 있으므로 등산지도만 준비하면 길찾기는 어렵지 않다.

최근 등산로를 정비한 깃대봉과 삼각산은 기존 등산지도나 인터넷 포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월간<산> 특별부록으로 수록된 지도를 참고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BAC 인증지점
깃대봉 정상 레이더탑 좌표 34.278811, 127.35386

교통(지역번호 061)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810-0120~4)이나 고흥 나로도연안여객선터미널(640-4090)에서 배를 타야 한다. 5월에는 배편과 출발 시간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전화 문의해야 한다. 4월 기준 평일에는 하루 2회(여수 출발 7시 10분, 16시), 주말에는 하루 3회(여수 출발 7:00, 13:00, 16:00) 운항한다. 여수를 출발한 배가 고흥을 거쳐 손죽도, 초도, 서도·동도, 거문도를 거쳤다가 되돌아온다. 여수에서 1시간 20분(편도 2만6,600원), 고흥에서는 30분 정도(편도 1만6,400원) 걸린다. 차량은 실을 수 없다. 고흥 출발 시간은 여수 출발 시간에서 50분을 더하면 된다. 손죽도에서 여수로 나오는 배는 평일 9시, 16시 20분, 주말 9시, 10시 55분이다.

등산 지도
특별부록 지도 참조.

본 기사는 월간산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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