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환경&자연 영화] 기러기 20마리와 14세 소년의 '아름다운 비행'

글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 입력 2021.05.25 09: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름다운 여행>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1903~1989)라는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가 있다. 도시에서 떨어진 자연 속에서 오리와 두루미를 비롯한 온갖 조류들과 함께 생활하며 유형별로 동물의 고유한 행동을 수십 년간 상세히 관찰, 기술한 과학자이다.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인 비교행동학을 창시했고, 그 공로로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조류의 고정적인 행동 양식을 연구한 콘라트 로렌츠는 갓 태어난 오리와 거위의 ‘각인刻印, imprinting’ 현상을 발견했다. 인공부화기에서 부화시킨 새끼 거위들에게 특정한 결정적 시기 동안 움직이는 물체를 보여 주면, 마치 그 물체가 어미인 양 성체가 될 때까지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거위의 경우엔 생후 13~16시간이 결정적 시기에 해당했다. 따라서 각인이 일어나는 시간에는 주변에 다른 동물이나 사람이 없어야 한다.

로렌츠 박사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어미처럼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이 거위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로렌츠 박사를 어미로 알고 졸졸 쫓아다녔다. 정확하게는 그의 방수 장화를 어미로 안 것이다.

로렌츠 박사는 거위를 관찰하면서 각인된 새끼 거위들에게 어미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풀을 손으로 쪼아 먹는 것처럼 보여 주었다. 비 오는 날에 어미 거위가 날개를 펴서 새끼 거위를 빗물로부터 막아 주기도 하기에, 로렌츠 박사는 비옷을 입고 새끼 거위 옆에서 자고 물 위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보트를 타고 함께 있기도 했다.

각인 현상은 새끼 오리뿐만 아니라 병아리 등 다른 새의 경우에도 관찰되었고, 움직이는 것 대부분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에 다른 새, 사람, 심지어 로봇조차 부모로 각인시킬 수 있다고 한다.

철새의 ‘각인 현상’ 다뤄

<아름다운 여행Donne-Moi Des Ailes, Spread Your Wings>(감독 니콜라스 배니어, 2019)은 이러한 조류의 각인 현상을 소재로 한 프랑스 영화이다.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14세 소년 ‘토마’(루이 바스케)는 엄마 ‘파올라’(멜라니 두티)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다. 어느 날 엄마는 회사에서 신규 프로젝트로 바쁘니 전 남편이자 토마의 아빠인 ‘크리스티앙’(장 폴 루브)에게 가 있으라고 말한다. 토마는 조류학자인 아버지와 3주간 생활하기 위해 남부 생로망으로 떠난다.

습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는 멸종위기에 처한 쇠기러기들을 위해 장거리 비행을 하는 새들의 철새 습성에 따라 안전하고 순조로운 새 비행길을 만들어 주고자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근무하고 있는 박물관의 관장은 예산 문제와 더불어 그 계획이 실패할 것이라는 이유로 승인해 주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은 박물관장의 직인을 훔쳐 프로젝트를 강행하고, 역시 조류연구를 하고 있는 ‘비욘’(프레데릭 소렐)으로부터 쇠기러기 알 20개를 전달받는다.

문명과 떨어져 와이파이도 잘 터지지 않는 농장에서 지내게 된 토마는 아빠가 키우는 알들에게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알들의 부화과정에 동참한다.

경비행기로 철새와 장거리 비행

크리스티앙의 목표는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켜 자신을 따르게 한 뒤 경비행기를 탄 채 기러기들과 함께 장거리 비행을 하는 것이다. 기러기들을 차에 태운 채 프랑스 남부에서 노르웨이령 북극 지역까지 이동한 뒤 북극에서부터 프랑스 남부까지 자신의 경비행기로 안전한 비행길을 안내하면 기러기들이 그 새로운 경로로 오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철새가 번식지와 월동지를 매년 정해진 계절에 반복해서 이동하는 것을 철새 이동이라고 한다. 이동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는 먹이, 일조시간, 기온 변화 등이 꼽히고 있다. 생식샘의 기능 변화나 호르몬 변동 등 체내요인을 들기도 한다.

철새의 이동은 일정한 경로를 거치는데, 철새들이 어떻게 방향 감각을 잃지 않고 대규모로 대륙 이동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분분하다. 새들이 낮에는 태양을 나침반 삼아 이동하고, 밤에는 별이나 달의 위치를 보고 방향을 찾는다는 주장이 있다. 일부 조류는 지구의 자기장을 이용한다고 알려졌지만, 새의 종류에 따라 방향 감각을 찾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크리스티앙은 조류학자로서 기러기 이동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를 보여 준다. 우선, 알에서 막 깬 새끼 기러기들이 크리스티앙은 동족으로 인식하되 다른 인간들은 경계하게끔 만들기 위해 기러기처럼 보이는 누더기 망토를 걸친다. 아들 토마에게도 같은 망토를 입힌다.

또 하늘 길을 이용하는 기러기들의 이동 경로가 직선이 아니라 북해를 건너 덴마크,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 남부로 이어지는 먼 길을 돌아서 날게 한 것인데, 이는 기러기들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인 공항, 송전선, 사냥꾼, 빛 공해 등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아버지의 프로젝트에 매료되고 둘도 없는 조력자가 된 토마는 아버지에게서 경비행기 조종술도 익힌다. 토마는 엄마의 허락을 얻어 노르웨이까지 아버지와 동행한다. 하지만 노르웨이 관련 기관이 까다롭게 나오고, 파리 박물관이 허가한 프로젝트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이때 느닷없이 토마가 경비행기를 몰아 기러기들을 하늘로 안내한다.

탁월한 영상미 돋보여

<아름다운 여행>은 실제 철새를 이동시킨 조류학자 크리스티앙 물렉의 실화에 가상 인물 토마를 접목시켜 환경 보호에 대한 메시지는 물론, 한 아이의 성장담도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토마가 기러기들을 어떻게 훈련했는지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토마와 기러기들 사이의 교감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고 있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1996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아름다운 비행Fly Away Home>(감독 캐롤 발라드)과 닮아 있다.

<아름다운 비행>은 야생 거위의 알을 발견한 소녀 ‘에이미’(안나 파킨)가 새끼들의 각인 현상으로 16마리 거위를 이끌고 아빠와 함께 경비행기로 남쪽으로 비행을 한다는 스토리이다.

<아름다운 비행>과 달리 <아름다운 여행>의 감독은 쇠기러기 무리에 흰뺨기러기 한 마리를 섞어 특별히 소년과 교감하도록 만들었다. 영화 앞부분에서 토마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밤에는 <닐스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는데, 이 작품은 요정의 마법에 걸린 닐스가 모든 동물과 대화를 나누면서 생명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배운다는 내용이다. 14세 소년이 기러기들과 함께 엄청난 거리를 비행한다는 <아름다운 여행> 또한 이런 동화 같은 요소를 갖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압권은 경비행기와 기러기들이 함께 하늘을 나는 장면들이다. 주로 동물과 인간의 교류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연출해 온 감독은 <아름다운 여행>에서 탁월한 영상미를 보여 준다. 강과 바다, 협곡과 들판, 일몰과 구름을 배경으로 하늘을 가르는 장관은 과도하지 않은 음악과 어우러지면서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본 기사는 월간산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