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촌일기] 장딴지 들러붙던 거머리, 물방개, 드렁허리… 다 어디 갔을까

  • 글·사진 이남석 자전거 여행가
    입력 2021.06.08 10:05

    새 소리 가득한 산골의 5~6월 풍경과 그 시절 모내기 이야기
    화촌일기 <13> 산골 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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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기가 끝난 후 모가 뜬 곳(제대로 땅에 모 뿌리가 박히지 않은 모)을 찾아다니면서 땜질(다시 모를 꽂는 일)을 하고 있다.

    나긋한 바람 뒤로 습기를 품은 구름이 비를 뿌리자 숲을 채운 나무와 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의 잎눈이 터지면서 보일 듯 말 듯 엷은 초록은 숲 낮은 곳부터 시작해 점점 높은 봉우리로 번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넓은 초원에 천천히 접근하는 구름 그림자와 같았다.

    숲이 그리는 수채화의 초벌 그리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색을 입히는 붓질이 시작된 셈이다.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이 풀이다. 먹을 게 풍부해지니 노루나 고라니들은 짝을 찾느라 분주하고 반려자를 정한 새들 역시 터를 정하고 집을 짓는 데 필요한 풀뿌리나 떨어진 깃털을 주워 모으느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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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터를 닦은 땅을 일구어 밭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새만 쫓아다니면서 사진 찍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깊은 산에 가면 새가 많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고 한다. 뱀이나 담비 같은 천적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엉이나 참매 같은 맹금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안전한 민가 주위의 작은 굴이나 나무에 둥지를 튼단다. 그래서 그런지 봄만 되면 집 주변으로 작은 새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새들도 봄만 되면 주택난으로 힘들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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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만든 새집을 뚝버들에 매달고 있다. 요즈음은 새들도 주택난이라고 한다.

    5월이 오면서 집 주변의 작은 구멍이란 구멍에는 박새나 딱새 같은 새들이 들락날락했다. 새 전문가의 충고에 따라 날을 잡아 한 동을 여섯 개의 방으로 나누어 총 두 동의 새집을 만들어 나무에 걸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과연 몇 쌍의 새가 입주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숲 깊은 곳에서 딱 그때가 되면 노래하기 시작하는 홀딱벗고새(검은등뻐꾸기), 귀신새(호랑지빠귀), 쏙독새도 어김없이 산골 농부에게 목소리를 들려 주기 시작했다. 이제 뻐꾸기 노래만 돌아오면 본격적인 여름이다.

    꼼꼼하게 일과를 정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어도 일단 아침에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면 뭔가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산골 생활의 전형이다. 얼마 전에 작은 터 두 개를 하나로 합쳤는데 비가 와서 자연적으로 땅이 굳기 전에 먼저 밭을 만들기로 했다. 고추를 심기 위해 땅을 파고 고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어서야 밭이 만들어졌다. 얼마나 돌이 많은지 하나하나 주워 옆에 쌓아놓으니 제법 형태를 갖춘 돌담이 되었다. 화전민 터에 남아 있는 돌무더기들이 다 밭을 일구면서 쌓아놓은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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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를 내기 위해 두렁을 새로 만들고 평평하게 써레질을 한 논.

    겨울잠에서 깬 구렁이 만나

    일군 밭에 두엄을 펴고 다시 새 흙을 덮었다. 새 흙을 퍼오느라 작년 봄에 베어 한쪽으로 쌓아놓은 잣나무 우적(나뭇가지를 모아 쌓아놓은 것)을 치우는데 그 속에서 길이가 한 발도 넘는 구렁이가 나왔다. 겨울잠에서 일어나 겨우 기동을 하려는데 아직 날씨가 쌀쌀하니 동작이 기민하지 못했다.

    옛 어른들 말씀에 ‘그해 처음 나비를 보면 몸이 노곤해지고, 구렁이를 만나면 살려 주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내가 이승에서 아무 원수진 일이 없거늘 해코지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5월 초에는 개울 건너에 제대로 된 화장실을 만들고 한밤중에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다리까지 놓았다. 그동안은 누가 찾아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예전 산골 사람들에게 인분과 재는 빼놓을 수 없는, 그리고 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연 발효 거름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분해되지 않은 인분을 남새밭에 주다 보니 아이들에게 유독 기생충이 많았다. 해마다 학교에서는 봄·가을에 학생들에게 회충이나 십이지장충 같은 기생충 약을 먹였으며, 선생님들도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맨발로 남새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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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물을 파종하기 위해 투드린 밭. 지금은 모두 기계로 하지만 옛날에는 소나 사람이 했다.

    풀 자라는 속도가 빨라지고 비록 넓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밭에 나가 쇠스랑과 곡괭이로만 작업하니 일꾼 하나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 곡괭이질 두어 번에 허리 한 번 펴느라 밤나무 옆에 서 있으면 다람쥐들은 새 굴을 찾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산자락 밑으로 쏟아지는 빛에 여름은 서너 걸음씩 앞으로 다가온다.

    사실 이런 산골에서 밭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 아이들은 일하러 밭으로 나가지 않고 학교에 가는 날이 좋았다. 아침 일찍 책보를 메고 서낭당이 있는 첫 번째 고개에 이르면 비탈밭으로는 보리들이 막 패기 시작하고, 응달이 진 반대편에는 아버지가 감자를 심기 위해 지게에 쟁기를 짊어지고 소를 앞세워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날은 봇도랑을 지나 샛길로 접어들면서 만사와 상여를 앞세운 긴 장례행렬과 만날 때도 있었다. 집에서의 일은 힘들고 지겨워도 학교 교실에서 동무들과 교과서를 펼치고 운동장에서 달리고 넘어지며 학교 뒷담에 기댄 살구나무에 돌 던지는 일은 유쾌하고 행복한 놀이였다.

    그러나 한창 일손이 부족한 농번기에는 가정실습이라고 해서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집에서 부모님 일을 도와주라며 대놓고 학교 문을 닫았다. 지금처럼 트랙터나 경운기 같은 기계가 없던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도 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는 일꾼 하나가 있는 것이 큰 위안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가정실습은 주로 모내기와 추수철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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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에 물을 채우고 모를 내어 놓고 준비한 모습.

    소리 없이 사라진 소금쟁이, 물방개, 드렁허리

    5월 하순쯤 감나무꽃이 흰 눈처럼 우수수 쏟아지면 소금물에 담가 소독을 끝낸 볍씨를 모판에 뿌렸다. 말하자면 모내기를 위한 모를 키우는 일이었다. 다음은 다랑구지에 물을 가두고 쟁기로 논을 깊게 갈아엎은 후 두렁을 부쳤다. 뱀장어처럼 생긴 민물고기인 드렁허리나 땅강아지들이 파 놓은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지 않도록 새로 논두렁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두렁을 부치면 다음은 충분히 물을 대서 갈아엎은 흙이 질겅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소에 네 발이나 다섯 발짜리 써레를 지워 질겅해진 흙을 평평하게 폈다. 말하자면 쉽게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바닥을 고르는 일이었다. 소를 모는 사람은 다리에 거머리가 들러붙는 것도 잊은 채 이리저리 흙탕물을 밀고 당기고 소를 몰면서 써레로 논바닥을 폈다. 그때 부르던 소 모는 소리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랴! 쪄쪄쪄! 워! 워! 에! 갈게에 찬물 나도 여름 한나절에 벼는 잘도 크누나! 어야! 윗다랭이 아랫다랭이 다 합쳐도 다섯 섬 쌀가마니 채우기 힘들어라! 어이야!’

    논에 들어가기만 하면 소리 없이 장딴지에 들러붙어 피를 빨아대던 그렇게 많던 거머리와 소금쟁이, 방동사니를 헤치며 날렵하게 헤엄치던 물방개, 논 가장자리 작은 웅덩이에 살던 응거지(드렁허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 농사법은 계속 소출을 늘리고 편리하게 짓는 방향으로 개선되었으나 그 대가로 논과 밭에 살던 생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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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물에 담근 메주가 숙성되고 있다.

    보리나 밀을 베고 모를 내는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가 농부들에게는 일손이 가장 바쁜 시기였다. 어머니들은 농사일을 거드는 것은 물론 품앗이 온 일꾼들 밥을 해대는 일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모내기를 하는 날 일꾼들 아침식사는 집에서 했다. 이후 점심 그리고 그 사이에 내오는 새참까지 어머니들은 총 세 번을 음식 광주리를 지고 밭이나 들로 나갔다.

    일하는 날이 정해지면 어머니는 15리(6km)도 넘는 장에 나가 고기나 생선을 사고 양조장에도 미리 연락해 모내기 전날 막걸리를 집으로 배달했다. 아이들은 은근히 모내기하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는데, 고깃국은 물론이고 모처럼 기름진 반찬에 쌀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품앗이로 모내기 하는 집에 가면 밥상이 나오는데 밥의 양을 보면 어마어마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뒤로 자빠지거나 벌어진 입을 닫을 새가 없을 것이다. 큰 사기 주발에 고봉으로 밥을 올려 숟가락으로 푸는 것이 버거울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 양은 정해져 있으니 반만 먹고 나가려면 “금방 꺼지니 다 먹어라!” 하시면서 팔을 붙들곤 했다.

    산골 다랑구지에서는 ‘흔틀모’라고 해서 모를 꽂는 사람들이 적당한 어림짐작으로 간격을 잡아 심었으나 어지간히 큰 논에서는 못줄에 표시된 간격대로 모를 꽂았다. 대개 노인들이 논둑에서 못줄을 잡고 젊은이들은 논 한가운데서,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논 가에 붙어서 모를 꽂았는데 한 시간 이상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다 보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일하다 보면 아침에 먹은 밥은 어느새 다 내려가고 오히려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못밥이라고 해서 어머니들이 밥과 반찬을 담은 광주리를 이고 나오셨다. 집에서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 사기그릇으로 무겁고 번거로우니 들에서는 가볍고 쓰기 편한 바가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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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를 내기 전 논을 갈아엎고 물을 댄 모습. 그래야 두렁도 부치고 써레질도 할 수 있다.

    가을에 박을 타서 삶아 속을 빼낸 후 응달에 말린 것이 바가지이다. 바가지에 국과 밥을 넣고 한 그릇 뚝딱 해치운 후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면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바닥에 누우면 바로 코를 골 태세였다. 도랑 옆 버들가지는 빗질한 처녀의 머릿결처럼 찰랑거리고 한 발씩 자란 쑥대는 독한 향을 바람에 풀어 놨다.

    고추도 심고 씨를 뿌린 남새(밭에서 기르는 농작물)도 싹이 올라오기 시작해 그제는 오랜만에 아내와 자전거 대신 두 발로 주변 임도를 걸으면서 쑥떡을 만들기 위해 쑥도 뜯고 산나물도 채취했다.

    한 뼘쯤 자란 쑥이 향기가 강해 떡을 만드는 데는 최고다.

    본 기사는 월간산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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