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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황매산 철쭉으로 다진 부자의 정

박정도 부산시 사하구 다대로
  • 입력 2021.07.2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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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매산 철쭉을 배경으로 부자가 포즈를 취했는데 그 모습이 꼭 닮아 웃음이 절로 났다.
황매산 철쭉을 배경으로 부자가 포즈를 취했는데 그 모습이 꼭 닮아 웃음이 절로 났다.

아들은 현재 대학 4학년이다. 해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고 작년에 복학해 지금 졸업반이다.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19 전염병으로 계속 재택수업이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으니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고 친구들도 만나기 어려우니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다. 그리고 장래의 직업에 대한 고민도 상당히 깊어 보인다. 전염병과 경기불황으로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으니 당연히 고민이 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아들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 주고 격려할 요량으로 산행을 제의했다. 같은 남자이자 아버지와 아들로서 산행을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 좋을 듯해 제의한 것이다, 아들도 흔쾌히 수락했다. 어떤 산을 선택할지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철쭉으로 유명한 합천 황매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황매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가회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해발 1,113m에 이른다. 준령마다 굽이쳐 뻗어나 있는 빼어난 기암괴석과 그 사이에 고고하게 휘어져 나온 소나무가 명품이고 철쭉이 병풍처럼 수놓고 있어서 흔히 ‘영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산이다.

아내에게 부탁해 산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배낭에 갖가지 음식과 물을 넣고 승용차로 새벽에 출발했다. 부산 집에서 새벽 6시에 나서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군북 IC로 빠져 대의면, 가회면을 거쳐 황매산군립공원 아래에 도착하니 아침 9시였다.

자동차를 덕만주차장에 주차했다. 철쭉군락지를 거쳐 황매산 정상에 도달한 뒤에 다시 덕만주차장으로 돌아오는 7km가량의 비교적 쉬운 코스를 택했다. 명산이어서 그런지 무척 북적였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산행객은 온갖 수다를 떨며 화사한 봄의 정취를 유감없이 누리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쌓인 갖가지 번뇌와 스트레스를 산행하며 자연 속에서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평소엔 아들과 그다지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 산행을 하며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었다. 아들은 전공인 식품자원경제학과를 졸업하면 1차로는 식품기업에 취업하고 싶고, 2차로는 농협이나 농어촌공사 등을 생각하고 있었다. 창의력과 도전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대기업 식품회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래서 치열하게 준비해 뜻하는 곳에 취업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취업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진인사대천명’ 자세로 노력하면 언젠가는 뜻을 펼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아들은 각고의 노력으로 반드시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연분홍 물감으로 칠해진 황매산 능선

두세 번 쉬다가 철쭉군락에 도착했다. 역시 철쭉 명소답게 연분홍 철쭉이 장관을 이루었다. 온 산을 연분홍 물감으로 칠한 풍경이었다. 철쭉 풍경을 구경하고 있으니 마치 나와 아들도 온몸이 철쭉 빛깔로 물들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여기저기서 철쭉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 사람으로 북새통이었다. 누구나 꽃을 보면 기분이 흐뭇해지는 모양이었다.

어린 시절 산에 가서 진달래는 ‘참꽃’이라 부르며 따 먹었고, 철쭉은 ‘개꽃’으로 부르며 독성이 있어서 따먹지 않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아들은 진달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나는 진달래를 비롯해 아까시 꽃, 감꽃 등을 많이 먹었다는 추억담을 들려 주었다.

황매산 철쭉군락에서 철쭉을 실컷 구경한 뒤에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을 밟은 뒤에 다시 철쭉군락으로 돌아와 민생고를 해결했다. 땀 흘린 뒤에 먹는 음식은 정말로 맛이 일품이었다. 역시 음식은 배가 고파야 맛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들도 밥맛이 좋다며 평소보다 두 배 가까이 음식을 많이 먹었다. 김밥을 비롯해 과일, 과자, 초콜릿 등을 먹고 충분하게 쉬었다.

철쭉군락에 앉아서도 아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아들은 생각 이상으로 의젓했고 자신이 살아갈 방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아들도 흙수저 출신이기에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들은 세계적인 부자 미국의 빌 게이츠가 “태어날 때 가난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죽을 때 가난하게 죽는 것은 죄가 된다”고 한 말을 명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들에게 재산이든 권력이든 마땅히 물려 줄 게 없어서 아쉬웠지만 아버지도 빈털터리로 시작해 불굴의 노력으로 지금의 안정된 직업을 구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노력을 존경한다며 자신도 노력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부자간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산 길에 들어섰다. 덕만주차장으로 돌아와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들은 모처럼 아버지와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며 만족해했다. 집으로 달리는 자동차는 남해고속도로를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질주했다. 약간의 정체 구간이 있었지만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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