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잊었던 ‘첫사랑’을 다시 찾다

  • 글 이재진 편집장
  • 사진 황문성 사진작가, 주유혁
    입력 2021.07.13 09:49

    숨은 고수를 찾아서 <26> 주유혁
    늦깎이 현역 등반가 “한국 등반문화, 더 다양해져야”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주유혁(54)은 즉각 산악부 선배에 의해 스카우트된다. 코오롱 등산 바지를 입은 그는 누가 봐도 등반 꿈나무였다. 그는 등반가로서 성장하기를 원했지만, 1980년대 고교 산악부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북한산 인수봉 자락에서 1박2일 야영했지만, 단 한 살 많은 선배들의 등반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 배울 점이 많지 않았다. 등반 장비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규율이 엄격해 자주 ‘집합’과 얼차려를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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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코끼리 크랙 등반 중.
    결국 주유혁은 당시 인수봉 일대에서 활약하던 명문 산악회인 ‘고르고’에 몰래 가입한다. 등반력이 뛰어난 선배들과 어울리며 실력을 키웠고, 고2 때는 인수봉 등반 중 선등을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은밀한 이중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학교 선배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이중 산악회 활동은 배신으로 간주됐다. 선배들은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주유혁을 화장실로 불러내어 때렸다. 그는 신체적 통증보다 등반에 대한 갈증을 견디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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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 믹스 등반으로 인수B를 오르고 있다. 동행한 이는 문성욱.
    40 넘어 등반 재개… 등반 멈추면 등반가 아냐
    이처럼 주유혁은 뜨거운 등반 열정으로 똘똘 뭉친 등반가다. 그렇기에 ‘이중 산악회’ 활동 사건으로 얼차려를 받은 후에도 산악부 활동을 접지 않았다. 오히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후로는 산악부 대장을 맡았고, 전국 오리엔티어링 대회에 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 달 동안 장비 점검, 독도법 등 오리엔티어링 대회에 필요한 기술들을 연마했었죠. 주말마다 모의 훈련도 했어요. 우승을 차지하고 나선 학교에서 산악부의 위상이 달라졌죠. 재정 지원도 받았고요. 이때 배운 독도법은 지금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잠시 바위에서 손을 떼고 다른 산을 오르기로 결정했다. 인생이란 산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 혼자 생계를 책임지는 가정 형편 속에서 마냥 등반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또한 2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기에 3사관학교에 지원해 5년간 간부로 복무했고, 전역 후에는 작은 벤처 회사에서 일하며 지방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다시 등반의 꿈을 품은 것은 마흔이 넘은 2008년이었다.
    “지방근무가 끝나고 서울 관할 지점장으로 오면서 경제적인 형편과 고용 환경이 다 안정됐어요. 그러던 어느 날 북한산에 오르고 있는데 인수봉에서 등반하고 있는 사람들이 딱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20년 동안 완전히 꺼져버린 줄 알았던 등반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죠.”
    예전에 몸담았던 산악회는 전부 활동을 중단한 상황.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문을 두드렸다. 그는 “등반가로서 몸이 가장 황금기일 때 등반하지 못한 건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라면서도 “하지만 등반이란, 한 지점에 오르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산악계에는 ‘마우스 클라이머’들이 정말 많습니다. 정말 딱 ‘한때’ 등반한 것을 가지고 이를 우려먹으면서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죠. 등반가는 절대 등반을 멈춰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자기만의 목표를 세우고, 달성해 나가는 과정을 이어가야 참된 등반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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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당 크랙(5.11d) 등반 중.
    한국 등반가들, ‘트레드 클라이밍’ 지향해야
    주유혁은 마치 그간 등반을 못 했던 설움을 토해 내듯 미친 듯이 빈 칸을 채워 나갔다. 전과 달라진 건 고산 거벽 자유등반과 크랙 등반(바위에 생긴 갈라진 틈새의 선을 따라 올라가는 등반)에 심취했다는 것. 미국 요세미티 엘 캐피탄의 인디언 크릭, 노즈, 이스트 버트레스와 알프스 타퀼 북벽, 코스믹 남벽을 등반했고, 한국에선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의 코끼리 크랙, 남측 오버행 크랙, 무당 크랙과 선운산의 스피드(5.13a) 루트를 완등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트레드 클라이밍에 눈을 떴다. 트레드Trad 클라이밍은 원래 전통이란 의미의 트레디셔널Traditional 클라이밍이란 말의 약자로,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도록 바위에 인공장치를 설치하지 않는 등반을 말한다. 
    “어릴 때는 정말 시야가 좁아서 내 눈앞 바위밖에 못 봤어요. 그런데 다시 등반을 시작하고, 해외 원정도 가보고 세계 각국의 등반가들도 만나 보니 한국의 등반 문화가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에 비해 등산인구는 물론, 등반인구도 많이 늘었는데 오히려 등반문화의 다양성이나 진취성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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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스쿼미시의 ‘드림캐쳐(5.14d)’ 루트를 바라보며 한국에서 이 루트를 등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트레드 클라이밍은 다음 세대 등반가들이 더 폭넓게 참가하고 지향해야 할 등반 양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환경을 훼손하지 않아야 하므로 조금 더 까다롭고 불편하며, 더 모험적이지만 그만큼 등반 가치는 상승한다고 봐요. 이런 등반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도 이어집니다.”
    끝으로 그는 알피니즘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깨기 위해 기꺼이 고통에 몸을 던지는 모든 몸부림의 합집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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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봉 남측 오버행(5.12-) 핑크 포인트 완등 중.
    1985 전국 오리엔티어링 대회 우승
    2015 미국 요세미티 엘 캐피탄 인디언 크릭 등반
    2016 중국 리밍 일대 등반, 선운산 ‘스피드(5.13a)’ 완등
    2017 미국 요세미티 엘 캐피탄 ‘노즈’, ‘이스트 버트레스’ 등정
    2018 캐나다 스쿼미시 일대 등반, 선인봉 ‘남측 오버행(5.12-)’ 핑크 포인트 완등
    2019 알프스 타퀼 북벽, 코스믹 남벽 등반
    본 기사는 월간산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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