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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동악산 달마대사가 말하다 “씨부리지 마라 다 알고 있다”

석창홍 대구시 수성구 신매로
  • 입력 2021.09.23 10:07
  • 수정 2021.09.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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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감동산행기

동악산에선 짙은 운무가 번갈아 수묵화를 그려댔다.
동악산에선 짙은 운무가 번갈아 수묵화를 그려댔다.

이른 산행을 위해 야영장에서 하룻밤 보내기로 했다. 도림사 계곡은 많은 야영객들이 밥 짓고 고기 굽는 냄새로 꽉 차 있었다. 밤하늘엔 왕소금을 뿌려 놓은 듯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날이 밝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빗속 산행이 될 예감이 들었다. 일기예보에는 오후부터 날씨가 갠다고 했다. 곡성군수와 도림사 주지 스님이 공동 발행한 동악산(737m) 산행 안내도를 손에 꼭 쥐고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도림사에서 시작해 도림사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으로 올라갈 길과 내려올 길을 다르게 정했다.

절 주위에 있는 나무들도 도림사 불경을 많이 듣고 자라서인지 전부 자비스럽게 보였다. 세속에서 물든 것을 다 내려놓고 깨끗한 마음으로 산행하라고 들머리에 산사가 있었다. 계곡 너럭바위에 선비들이 많은 글을 새겨 놓았다. 너럭바위에 팔 베고 누우니 세상 모든 것이 내 것 같다. 계곡 바람이 시원했고 물도 맑았다. 8부 능선 이상은 구름에 가려 시야가 불편했다. 산 전체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구름을 한 움큼 쥐니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 나가 버린다. 잡히는 건 빈손. 빈손으로 산에 왔으니 빈손으로 가라는 뜻인가보다.

오락가락 비가 내린다. 바위에 주저앉아 쉴 때면 우두커니 비에 젖는 빗속 산행이다. 오르는 동안 옷이 비에 젖고 체온으로 건조되길 반복했다. 40대로 보이는 부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세 번 하고 나니 정상이다. 날아드는 벌레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목으로 몇 마리 넘어간 느낌이라 거북스럽다.

산행 중 만나는 비를 꼭 짜증과 원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낭만이자 새로운 기쁨으로 만나야 한다. 산은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 되는 즐거움을 누리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문하던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정상이다. 정상에 도착해 숨 한번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쯤에 배넘어재와 대강봉이 구름 사이로 보이고 공룡능선도 보이고 그 뒤로는 형제봉도 보였다. 산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과 가까워져서 좋고, 오르면 오를수록 가장 순수하고 고독한 바람을 만날 수 있어 좋고, 또 내 자신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세상은 흑백의 단조로운 색상이다. 구름이 발묵 기법과 농묵 기법을 섞어가며 수묵화를 그렸다. 진하게 칠할 곳은 진하게, 여백의 미도 잊지 않고 그린다. 그러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확 지워버리고 다시 그렸다. 하루 종일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난 그냥 멍 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길을 살피니 정상에서 왼쪽으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서슴없이 내려갔다. 한참 내려오니 길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마 폐쇄된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 내려와서 보니 ‘등산로 폐쇄’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오르는 쪽은 폐쇄 표시가 되어 있었으나 내려오는 쪽엔 표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넘어질 때 손을 펴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길을 잃으면 당황한다. 길이 폐쇄되었으면 산행 안내도를 수정했어야 된다. 덕분에 엄청 고생했다. 도가니는 은을 단련하고 풀무는 금을 단련하고 산은 모난 나를 둥글게 단련했다. 직무 유기를 한 곡성군수와 도림사 주지 스님께 산을 내려오는 내내 볼멘소리를 해댔다.

하산 후 산사에서 한 잔의 차로 스스로를 달랬다. 산사에는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는 멋진 시도 있었다. 저쪽 한 편엔 큰 손수건에 달마대사 얼굴이 그려져 있고 옆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씨부리지 마라. 다 알고 있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곡성군수와 도림사 주지 스님을 원망할 거란 걸 달마대사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비가 그치고 날이 갰다.

본 기사는 월간산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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