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배가 우리 연해를 침범” 250년 前 신경준의 고발

  •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고문
    입력 2021.09.07 11:51 | 수정 2021.09.08 13:53

    최선웅의 고지도 이야기 <109>
    地誌에 밝았던 여암이 해안 방어를 위해 만든 ‘강화이북해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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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 신경준이 제작한 ‘강화이북해역도’(출처: 순창군 공식 블로그)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여암旅庵신경준申景濬 유지遺址에는 그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고지도 두 점이 전해 오고 있다. 두 지도 모두 제목과 간기刊記가 없어 ‘북방강역도北方江域圖’와 ‘강화이북해역도江華以北海域圖’라고 불리고 있다. ‘북방강역도’는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관방關防을 나타내는 지도이고, ‘강화이북해역도’는 강화도에서 압록강 하구까지의 연안 해안방위海岸防衛를 나타내는 지도이다.
    신경준은 1769년(영조 45) 왕명으로 당상관 서명응徐命膺과 채제공蔡濟恭, 낭청 서호수徐浩修 등과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간행할 때 지지地誌에 해박했던  관계로 <여지고輿地考> 부분을 담당했다. 이듬해 <동국문헌비고> 40권이 완성되어 임금께 바치니, 영조는 “3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숭정전 월대에 나아가 섬돌 밑으로 내려서서 친히 완성본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동국문헌비고> 권6~권22에 수록되어 있는 <여지고>는 17권 분량으로, 관방에 관해 성곽 조와 함께 해방海防 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해방에 관해서는 동해와 남해, 서해의 남과 북으로 나뉘어 기술되어 있다. 서해 북방에 관한 해방 체계는 경기도 강화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어지는데, 경기도의 2개 군현, 황해도의 14개 군현, 평안도의 18개 군현이 포함되고, 각 군현에 속한 곶串과 진津·포浦·섬島·강江 등에 대한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여지고> 저술의 바탕이 된 것은 그의 문집 <여암전서旅庵全書>에 수록된 역사·지리 관련 논고 때문이다. 신경준의 모든 저술을 한데 모은 <여암전서>는 1979년 경인문화사에서 간행되었는데, 권8의 <사연고四沿考>는 해로海路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사행로使行路ㆍ조석潮汐ㆍ해로 등 바다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신경준은 <사연고> 서문에서 “삼가 강역을 지킴은 사방의 변방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동·남·서 세 변방이 바다에 접해 있고, 북쪽 한 변방은 두 강으로 경계를 이룬다”고 <사연고>를 저술한 취지를 밝히고 있다.
    <사연고> 내용 중에 ‘서해범월선西海犯越船’은 중국 배가 우리나라 연해를 침범해 무단으로 해산물을 채취해 가는 현실을 고발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신경준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혀 저들의 국경을 넘어가는 일이 없는데, 중국인들은 해삼과 해방풍海防風, 갯방풍을 채취하기 위해 넘어온다. 큰 배 수십 척이 몰려오는데, 한 배에 100여 명 혹은 70~80명이 타고 있다. 2월 10일이 지나 나타나서 7월 그믐께가 되어서야 돌아가는데, 해마다 늘 있는 일이다. 장연長連·은율殷栗·풍천豐川·장연長淵·옹진甕津·강령康翎 등지의 연해에 출몰하는데, 장연과 옹진이 가장 심하다”고 기술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경기도에서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 요동遼東지역으로 이어지는 연안 항로는 해안 요충지로,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청나라의 어선들이 출몰해 불법으로 어로작업을 하거나, 해안에 상륙해 주민들과 부딪치거나 밀교역이 성행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연안방어를 위해 해안과 주요 도서에 요망대暸望臺를 설치해 연해에 출몰하는 선박의 동태를 살피고, 포구마다 전선戰船을 배치했다.
    신경준은 나이 53세 때인 1764년(영조 40) 겨울에 황해도 장연 현감이 되어 실제 이러한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 대비책에 부심한바 있다. 이때 어업과 염업 등 민생 관련 생산 활동과 조운漕運 등 해상운송의 안전과 해상에서의 효율적인 군사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조석潮汐 현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는 수많은 해도海島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신경준이 당시 해상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 ‘강화이북해역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강화이북해역도’는 얇은 한지에 그려졌는데, 종이가 얇고 워낙 크기 때문에 가로로 3폭의 종이를 덧붙였으며, 세로 쪽도 밑단에 21cm 정도의 종이를 2폭이나 덧붙였다. 따라서 지도의 전체 크기는 가로 278.5cmㆍ세로 81.5cm로, ‘북방강역도’보다 3배 이상 크다. 지도의 방위는 전체적으로 지도의 위가 동쪽이지만, 엄밀히 구분하면 강화도에서 장산곶까지는 위가 북쪽이 된다.
    지도의 전체적인 내용은 오른쪽 끝의 수유水踰·양천陽川·김포金浦에서부터 강화도·연평도·백령도·장산곶반도·초도椒島·신미도身彌島·가도椵島ㆍ압록강 하구까지의 서북 해안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 놓은 것이다. 가장 큰 섬인 강화도는 성곽에 둘러싸인 관부官府가 중심에 위치하고, 해안가에는 49개의 돈대墩臺와 함께 진보鎭堡·창고·수문 등이 성벽을 따라 촘촘히 그려져 있다. 강화도 주변의 섬들은 대부분 길쭉한 모양으로 그려 마치 강화도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강화도 서쪽의 볼음도(지도에는 보음도甫音島)와 연평도 사이에는 마치 지렁이 모양의 신초新草·삼승초三升草·대초大草·모로초毛老草ㆍ수중초水中草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 섬들은 해수면의 상승과 오랜 기간 강한 왕복성 조류에 의해 수직 또는 수평 방향으로 성장한 사주沙洲로 ‘풀등’이라고 불린다. 그밖에 작은 섬인 서嶼, 암초인 여礖, 바위섬인 암岩과 압狎ㆍ문門 등이 있는데, ‘문’은 두 개의 바위섬이 마치 문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고, ‘압’은 ‘오리 압鴨’ 자와 같은 표기로 새가 날아서 갈 수 있는 섬을 뜻한다.
    육지의 만입과 주요 섬 곳곳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선박처船泊處가 표시되어 있고, 사람이 사는 섬에는 ‘인가人家’라고 적혀 있다. 또한 해상 방위상 요충이 되는 섬에는 진鎭 또는 연대煙臺를 표시했고, 육지와 섬, 섬과 섬 사이의 뱃길에는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화진까지의 수로는 40리延安東距寅火津水路四十里’와 같이 수로水路의 방향과 거리가 적혀 있다. 섬과 바위섬 곳곳에는 파도 모양을 그려 넣었는데, 이런 곳은 조류 변화가 심하고 파도가 거센 곳을 표시한 것이다.
    지도상 등산곶登山串과 장산곶長山串 앞 바다의 섬에는 모두 파도 표시가 있어 이곳이 위험한 뱃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황해도 서남쪽에는 소강진所江鎭ㆍ순위진巡威鎭ㆍ장산곶 오차내진吾叉乃鎭ㆍ백령진白翎鎭ㆍ허사진許沙鎭ㆍ초도진椒島鎭 등이 밀집되어 있어 해안 방어의 요충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시되던 곳이 백령진인데, 백령도는 중국 상선이나 불법 어선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장산곶에 이르면 수로가 나뉘어 서남쪽은 장연ㆍ옹진ㆍ강령 등지에 이르고, 북쪽은 초도를 거쳐  풍천ㆍ은율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이다.
    평안도 해안에는 삼화광량진三和廣梁鎭과 함께 육지에는 산성과 연대가 즐비하다. 용강군 해안의 노강진老江鎭은 조선 초 성종 때 설치된 수군진이나, 다른 진과 달리 붉은색이 칠해져 있지 않다. 평안도 북쪽 해안에는 선사포진宣沙浦鎭ㆍ미곶진彌串鎭ㆍ인산진麟山鎭ㆍ양하진楊下鎭 등이 있고,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는 인조 때 동강진東江鎭이 설치되었으나, 지도에는 둥글게 붉은색으로 표시하고 ‘구성舊城’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검은 해삼 취한 듯 흐늘거리고, 그 빛깔 비단처럼 빛나네. 저들이 잠수해 와서 채취하기에, 우리네 이를 막느라 수戍자리 선다네.”
    이 글은 신경준이 장연 현감 시절 영조의 명에 의해 지은 민은시民隱詩이다. 이와 같이 신경준은 중국인들의 해삼 채취를 막기 위해 해안을 방비하던 일을 거론했는데, 이때에 ‘강화이북해역도’를 제작한 것이 틀림없다.
    본 기사는 월간산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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