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짐승 같은 원시의 숲…俗人은 두려움을 느꼈다

  • 글·사진 거칠부(필명)
    입력 2021.09.08 09:29 | 수정 2021.09.08 13:53

    제주 숲길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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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물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
    제주를 다시 찾은 건 5년 만이었다. 그 사이 나는 해마다 반년씩 히말라야 기슭을 걷는, 히말라야를 걷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2년 연속 하늘길이 막히면서 어디로도 떠나지 못했다. 걷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던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제주의 숲이었다. 전남 고흥 녹동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떠났다. 비대면 여행을 위해 이번에도 홀로 차박을 하며 다녔다.   
    나무가 빼곡한 숲을 걷고 싶었다. 한라생태숲의 숫모르숲길이 그랬다. 설렁설렁 걷다가 편백나무숲에서 잠시 멈췄다. 나무의 청량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참으로 아름다운 숲이다. 숫모르숲길은 절물휴양림으로 이어졌다. 혼자 걷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걷는 김에 장생의 숲길까지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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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모르숲길에서 만난 편백나무숲.
    육지에서 제주로 이사 왔다는 아주머니들 중 한 분이 나를 “아저씨”하고 불렀다. 아주머니는 “총각이라 부를까 아저씨라 부를까 고민했다”면서, “다시 보니 아가씨”라며 깔깔깔 웃었다. “혼자 걷기 무섭지 않냐”며, “모자만 쓰면 영락없이 남자처럼 보일 것”이라고 했다. “혼자 다닐 때는 여자처럼 보이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낫겠다”며 혼잣말도 했다. 나는 왠지 그 말이 더 무섭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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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나무로 가득한 삼다수숲길.
    장생의 숲길은 편백나무숲, 삼나무숲, 곶자왈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대체적으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지만 길어서인지 걷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장생의  숲에서 숫모르숲길로 되돌아가다가 편백나무숲에서 멈췄다. 평상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 시간.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바람이 불 때마다 마음속까지 시원해졌다. 행복은 매번 이렇게 소소했다.  
    삼다수숲길은 오른쪽으로 천미천을 끼고 걸었다. 키가 큰 삼나무는 깊은 그늘을 만들어냈다. 한낮인데도 숲이 어두웠다. 걷는 동안 사람을 거의 마주치지 않아서 호젓하게 걷기 좋았다. 숫모르와 장생의 숲길이 잘 다듬어진 길이라면, 삼다수숲길은 좀더 싱그러운 자연숲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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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주차장에서 차박을 했다.
    제주의 숲에는 육지의 산과 다른 묘함이 있었다. ‘쉼’과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높이가 비슷해서 방향감각이 둔해졌다. 자칫하다가는 환상방황(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숲에선, 까마귀 울음소리만 요란할 때도 있다. 그럴 때 혼자 걸으면 괜히 등골이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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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차박은 차량 안에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까마귀 울음만이 적막을 깨다
    제주에서의 차박은 한적한 주차장이나 포장임도를 따라가다 만나는 숲에서 했다. 차박을 할 때는 1열과 2열 사이를 무릎담요로 가렸다. 특히 P선배가 만들어 준 차창 가리개가 유용했다. 발포 매트리스를 창 크기에 맞게 자른 후, 큐방을 꽂아서 만든 가리개였다. 나의 차박은 먹고 자기 위한 공간을 넘지 않았다. 바깥에서 음식을 하거나 테이블을 펼쳐 놓지 않았다. 
    누가 보면 차박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차 안에서 다 해결했다. 제주도의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쓰레기도 집으로 가져와서 버렸다. 어디라도 내가 머문 자리는 치우고 정리한다. 그곳이 내 집이든, 하룻밤 야영지나 게스트하우스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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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수국으로 가득했던 사려니숲.
    사려니숲은 제주에 올 때마다 가는데도 왠지 안 가면 섭섭할 것 같았다. 인기를 실감하듯, 평일인데도 붉은오름 쪽 사려니숲은 아침부터 차가 꽉 찼다. 몇 년 사이 사려니숲 입구에는 무장애 길이 생겼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배려다. 깔끔하고 단정한 길이라 일반인들이 걷기에도 좋았다. 사려니숲은 붉은 흙길과 숲이 대비되어 독특했다. 2016년에 사려니숲에서 만난 산수국이 감동이었는데, 올해는 너무 일찍 왔다. 나는 차량 회수를 위해 월든삼거리까지만 다녀왔다. 조용히 걷기엔 사람이 너무 많기도 했다. 
    차박을 하다가다도 정비를 위해 며칠에 한 번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다. 비가 내리는 저녁, 슬리퍼를 끌고 근처 현지 식당에 갔다. 두루치기 1인분이 안 된다고 해서 2인분을 주문했다. 그냥은 심심해서 맥주도 한 병. 다른 테이블엔 나 말고도 혼자 온 여자가 두루치기 2인분을 먹고 있었다. 혼자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요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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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체왓 소롱콧길의 구불구불한 나무들.
    머체왓숲길은 휴식년제 도입으로 탐방 불가였지만 ‘소롱콧길’은 갈 수 있었다.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계곡을 만났다. 비가 내린 다음날이라 건천인 계곡에 물이 있었다. 빽빽한 나무는 계곡을 함부로 보여 주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간장 색깔의 물만 조금씩 보여 줄 뿐이었다. 
    촉촉한 편백나무숲은 나무 냄새로 가득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나무는 거친 숨소리도 평온케 했다. 걷는 내내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 편백숲이 끝나자 다시금 울창한 숲으로 들어섰다. 숲은 몇 번이나 모습을 바꿔가며 새로운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러다 구불구불한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숲에서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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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사의 이끼 가득한 계곡.
    오래 된 숲을 마주하는 것 같은, 태초의 숲인 것처럼 알 수 없는 신성함으로 가득했다. 나는 잠시 동안 숲을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함께 감탄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효명사의 천국의 문은 인터넷을 보고 즉흥적으로 찾아간 곳이다. 콩자개란이 잔뜩 덮인 아치형 문은 비밀스러운 숲의 입구처럼 보였다. 천국의 문 너머 맞은편 계곡에는 초록색 이끼가 가득했다. 원시의 느낌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만났던 제주의 어떤 계곡보다 습하고 독특한 느낌이었다. 왠지 이곳은 비가 오고 난 뒤나 저녁이 좋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빛이 약해졌을 때, 음의 기운이 충만해졌을 때 더 강렬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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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체왓 소롱콧길의 촉촉한 편백나무숲.
    깊고 검은 물… 압도적 신성함
    차박지를 정해 놓은 게 아니라서 마음이 동하면 종일이라도 돌아다녔다. 오후 늦게 고살리숲을 찾았다. 왕복 5㎞로 짧은 거리라 가볍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고살리숲길은 어디가 입구라고 말하기 애매했다. 주차할 곳을 찾다가 학림교부터 시작했다. 마을을 지나 이정표를 만난 곳부터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갔다.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왼쪽으로 깊은 계곡이었다. 길만 따라서 걸으면 이 숲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길을 벗어나 계곡 아래까지 내려가야 잘 보였다. 고살리숲길의 진짜는 계곡이었던 것이다. 이 숲은 호기심을 자극했고, 적당히 모험을 즐기고 싶을 만큼 비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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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살리숲길의 신비로운 계곡.
    갑자기 시커먼 물과 함께 폭포가 나타났다. 속괴였다. 순간 ‘깔로빠니’라는 말이 떠올랐다. 네팔어로 ‘검은 물’이라는 뜻인데 왠지 이곳의 묘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속괴 왼쪽으로는 기도터가 있었다. 깊고 검은 물은 두려움을 주었지만 검은 물을 감싸는 빛은 편안함을 주었다. 신성함이 가득해서 누군가 옷자락을 붙잡는 것만 같았다. 신성한 깔로빠니. 나는 한동안 속괴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안덕면에서 돌오름숲길로 향했다. 2016년 우연히 발견한 이 길에서 숲이 주는 아름다움에 몇 번이고 감탄한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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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에 걸었던 돌오름숲길.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숲이 주는 감동은 여전했지만 뭐든 처음만 못했다. 아는 것을 다시 보는 느낌엔 새로움이 빠져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췌한 표정의 노루도 이번에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환상의 숲은 이제 여느 숲과 다르지 않았다. 
    돌오름 입구의 벤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몰려왔다. 사람이 거의 없는 숲길이라 으스스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안개는 더 깊고 짙게 다가왔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순식간에 어두워진 숲. 문득 이 숲 어딘가에 꼭꼭 숨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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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돌오름숲길에서 만난 노루.
    며칠 동안 산에서 버틸 수 있는 짐을 지고 무작정 걷는 숲길 여행. 그러다가도 멀리에서 사람이 보이면 길을 잃지 않았구나 싶어 안심이 되기도 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비가 내렸다. 나는 다시 어딘가로 출발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한라산 산행으로 마무리했다. 제주의 숲은 여전했고, 걷고 싶었던 마음도 충분히 해소되었다. 숲이 주는 치유의 힘과 위안.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본 기사는 월간산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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