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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10월의 섬 흑산도] '자산어보'를 낳은 섬! 생 홍어 씹듯, 꼬들꼬들한 산길

월간산
  • 입력 2021.10.0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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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 섬&산100-10월의 섬 흑산도]
천혜의 전망대 상라산과 칠락산 종주산행

흑산도 해안 초원 너머로 내영산도와 대둔도 다물도가 펼쳐진다. 육지에서 100여㎞ 떨어진 먼 섬인만큼 자연이 잘 보전되어 있다.
흑산도 해안 초원 너머로 내영산도와 대둔도 다물도가 펼쳐진다. 육지에서 100여㎞ 떨어진 먼 섬인만큼 자연이 잘 보전되어 있다.

밤나무가 있는 정자에서 이별하다(율정별)

‘초가 주막 새벽 등잔불 파르르 사위어가고 / 일어나 샛별 보니, 장차 할 이별이 참담하구나 / 연이어 입을 다물고 둘 다 말이 없다가 / 억지로 목소리 가다듬다 오열하네 / 멀고 먼 흑산도는 바다와 하늘 맞닿은 곳 / 그대 어찌 이 속으로 가셔야 하나’

정약전·정약용의 유배길. 나주 율정주막에서의 밤을 마지막으로 형정약전은 흑산도로, 아우 정약용은 강진으로 갈라져 유배되었다. 우애 깊었던 형제는 이날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날 밤 정약용이 쓴 시가 ‘율정별栗亭別’이다.

칠락산 산길을 걷는 연세산악회 최동혁씨와 사막마라토너 김채울씨. 자연미 가득한 산길이지만 걷는데는 지장이 없다.
칠락산 산길을 걷는 연세산악회 최동혁씨와 사막마라토너 김채울씨. 자연미 가득한 산길이지만 걷는데는 지장이 없다.

쾌속선을 타고 2시간 30분이면, 옛날엔 며칠이 걸렸겠다. ‘바다와 하늘 맞닿은 곳’이라 한 섬에서 정약전은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수산동식물 백과사전을 썼다. 세상 끝 유배지의 대명사로 꼽혔던 이곳에서도 어민과 밀착된 삶을 살며 그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흑산’이 어두운 느낌이라며, 섬 이름을 ‘자산玆山’이라 바꿔 불렀다. 

장난스런 표정으로 바윗길을 오르는 김채울씨.
장난스런 표정으로 바윗길을 오르는 김채울씨.

‘흑산도 아가씨’ 노래 들려와

지루하던 망망대해를 깨치고 산이 나타났다. 바다와 산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黑山島 이름이 유래하지만, 바다는 투명했고 산은 밝은 초록이었다. 다만 능선의 기세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해 큰 섬다운 힘이 뿜어져 나왔다. 

첫 발을 딛자 ‘홍어 도매’ 간판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흑산도에 온 것이 실감났다. 홍어회 한 점 먹고 싶은 식욕이 올라오는 걸 누르고 산부터 찾았다. 

흑산도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내영산도의 독특한 산세에 반해 접근했으나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흑산도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내영산도의 독특한 산세에 반해 접근했으나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차량으로 꼬불꼬불한 도로를 올라서자 고개 전망대가 나타났다. 해발 154m치곤 과분한 풍경이었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는 꼭대기 전망대에서 맞닥뜨린 건 거대한 상어 지느러미였다. 부속 섬인 소장도의 기묘한 생김새에 저절로 “우와”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칼로 자른 듯 매끄럽게 뻗은 능선이 무척 독특했다. 무인도인데다 위태로울 정도로 날카로운 칼바위능선이라 종주한 사람이 지금껏 없을 것 같았다. 모험적인 종주를 해보고픈 생각이 불끈 들었으나 일대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비법정 코스나 마찬가지였다.

흑산도의 전망대로 유명한 상라산(230m)을 오른다. 가파른 계단을 잠깐 오르자 금방 정상이다. ‘열두굽이길’이라 불리는 알파벳 S 모양의 비탈길이 발아래로 드러난다. 급경사를 차도로 잇기 위해 굽이굽이 이은 길의 생김새는, 귀양살이 온 이들의 인생 역정이었다. 소박한 데크 전망대까지 있어 국립공원이 아니었다면 낭만적인 풍경을 하룻밤 즐기려는 백패커들로 몸살을 앓았을 법하다. 

진짜 산행을 할 시간이다. 마리재에서 칠락산(252m) 산길로 든다. 섬 최고봉은 문암산(405m)이지만 군시설물이 있어 칠락산이 산행의 정상 역할을 한다. 능선 따라 종주해 샘골로 하산하는 5.2km 코스. ‘산거머리’에 주의해야 한다고 신안군청 직원인 명대현씨가 알려준다. 그를 비롯해 본지에 백두대간 일시종주기를 연재하고 있는 김채울씨와 연세산악회 최동혁씨가 함께한다.

BAC 인증지점인 흑산도 칠락산 정상에 선 최동혁, 명대현(신안군청), 김채울씨(왼쪽부터).
BAC 인증지점인 흑산도 칠락산 정상에 선 최동혁, 명대현(신안군청), 김채울씨(왼쪽부터).

기다렸다는 듯 구름이 짙게 드리웠다. 가끔씩 시야가 터지는 바위에 올라도 보이는 건 없으나, 악천후는 익숙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습도 높은 산길에 몸을 맡긴다. 정글에 가까운 짙은 숲이지만 의외로 노거수가 없다. 30년 이내에 인공 조림한 나무가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섬 특성상 난방연료를 구하기 어려워 험준한 능선까지 올라와 땔감을 해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고 보면 전기가 들어온 지 30년이 되지 않았을 정도로 살기 팍팍했던 섬 살이였다. 뭍에서 온 이는 귀양살이지만 섬사람은 삶이었다. 

정약전은 귀양살이라 하여 낙심하지 않았다. 신분이 미천한 창대 정덕순의 말을 귀 여겨 듣고 해양 연구의 동반자이자 스승으로 삼았으며, 필리핀까지 표류했던 어물 장수 문순득의 경험을 기록해 <표해시말> 같은 책으로 남겼다. 세상 끝이라 여겼던 흑산에서 바른 삶의 전형을 보여 준 것이다.

진리당 숲길 끝에 있는 바다 전망데크.
진리당 숲길 끝에 있는 바다 전망데크.

햇살이 쏟아졌다가, 빗방울이 떨어졌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습하고 바람 한 점 없는 흐린 날이 되기를 반복한다. 칠락산七樂山 이름처럼 기쁨, 분노, 근심,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이 차례로 산을 스쳐간다. 

넝쿨식물과 졸참나무, 소사나무, 팥배나무, 소나무, 노간주, 동백나무로 빽빽한 와중에도 사람 한 명 지나갈 산길만 아담하게 열려 있다. 아담한 통로지만 피부가 쓸릴 정도로 풀이 높은 곳은 없다. 오히려 환영한다는 듯 새며느리밥풀, 맥문동, 닭의장풀, 참취, 태양국 같은 예쁘장한 꽃이 눈인사를 한다. 

칠락산을 오르는 두 사람 뒤쪽에 소장도와 대장도가 드러난다.
칠락산을 오르는 두 사람 뒤쪽에 소장도와 대장도가 드러난다.

200m대로 고도를 높이자 숨 돌리기 좋은 너른 마당바위다. 맞은편 대장도에는 미니 한라산마냥 섬 가운데에 백록담 같은 분화구가 있는데,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독특한 섬이다. 더 특이한 것은 대장도마을 지붕이 하나같이 주황색이라는 것. 신안군청에서 컬러마케팅 사업을 한 결과물이다. 

산세가 거칠어진다 싶은 곳엔 항상 계단이 나타나 초보자도 어려움 없이 산을 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짧은 산행 코스인데 의외로 정상이 멀다. 302m봉, 277m봉을 지나고 나서 마지막에 252m 높이의 칠락산 정상이 나타나기에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지는 것. 405m의 힘 있는 문암산 줄기가 힘자랑을 하며 뻗었다. 그 너머 선유봉(307m)까지 치면 꽤 첩첩산중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상라산 기슭의 열두굽이길.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는 찻길에서 200m를 걸어서 오르면 상라산 정상에 닿는다.
드론으로 촬영한 상라산 기슭의 열두굽이길.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는 찻길에서 200m를 걸어서 오르면 상라산 정상에 닿는다.
정상은 귀양살이 온 문장가들이 감탄했다는 조망 명당이다. 1889년 흑산에 거주하는 글깨나 썼다는 문장가들이 합동 산행을 하여, 늦은 오후 이곳 정상에 닿았다고 한다. 마침 석양이 바다에 드리운 가운데 포구로 어선들이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범어귀포 행렬에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흑석을 유완하니 선경이 여기구나’라고 평했다고 한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는 전망대 고개에서 본 바다 경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이어진 능선이 소장도이며, 뒤쪽 큰 섬이 대장도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는 전망대 고개에서 본 바다 경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이어진 능선이 소장도이며, 뒤쪽 큰 섬이 대장도다.

흑산도에서 먹는 생 홍어 맛!

오늘은 해무가 바다를 삼켰다. 오욕칠정五慾七情 속을 헤매다 닿은 정상은 결국 뜬구름뿐이라는 것을 칠락산이 일러 준다. 

짙은 동백숲 터널이 봄에 다시 오라 유혹한다. 풋사랑 같은 붉은 동백꽃을 상상하는 사이, 벌써 찻길이다. 도로 따라 선착장 마을로 내려선다. 저녁은 홍어와 함께 했다. 평소 홍어를 찾아서 먹을 정도로 즐기지 않았으나, 홍어의 본향 아니던가. 

삭히지 않은 생 홍어회는 처음 먹어봤다. 꼬들꼬들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살짝 달콤한 끝맛이 있었다. 비리지 않았고 씹는 식감이 좋았다. 원래 흑산도 사람들은 홍어를 생으로 먹는데, 배로 육지에 도착하면 이미 삭혀져, 육지 사람들은 삭힌 홍어 맛만 안다는 것이 식당 주인장의 설명이다.

풍랑주의보로 홍도행 배가 결항돼 섬을 더 둘러보기 위해 나서는 20대 김채울, 최동혁씨의 표정은 여전히 밝다.
풍랑주의보로 홍도행 배가 결항돼 섬을 더 둘러보기 위해 나서는 20대 김채울, 최동혁씨의 표정은 여전히 밝다.

다음날 아침, 홍도 가는 배를 타려 했으나 풍랑주의보로 결항되었다. 흑산에 갇힌 김에 섬을 더 둘러보았다. 영혼을 부르는 나무 초령목이 있는 진리당숲길을 걷고, 철새박물관 소장의 열띤 설명으로 박제된 새들을 둘러보았고, 오래된 성당과, 정약전이 살았던 집도 둘러보았다. 

1814년 정약용은 ‘강진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며 ‘흑산도로 와 형을 뵙겠다’는 사연을 전했다. 이에 정약전은 “아우로 하여금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뭍에서 가까운 우이도로 내가 가서 기다릴 것”이라 했으나 흑산도 사람들이 계속 머물러 달라며 들고 일어나 붙잡았다. 은밀히 우이도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밤을 틈타 떠났으나, 이튿날 아침 흑산도 사람들이 배를 급히 몰아 뒤쫓아 와서 다시 정약전을 흑산도로 데리고 갔다.

흑산도 내 식당의 홍어회 상차림. 삭히지 않은 홍어의 깔끔한 식감에 놀랐다.
흑산도 내 식당의 홍어회 상차림. 삭히지 않은 홍어의 깔끔한 식감에 놀랐다.

이 사연을 들은 정약용은 “고을 수령이 서울 갔다가 다시 오는 길을 막고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귀양살이 하는 사람을 다른 섬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백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형의 높은 덕망에 놀라워했다. 

정약전이 살았다는 집 마당에 서자, 바닷바람이 훅 안겨 온다. 코로나로 일상이 유배 아닌 유배가 된 요즘, “세상 끝에서도 삶은 계속된다”고 정약전이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흑산도 가이드

큰 섬이지만 도보로 섬을 일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객선터미널에서 도로 따라 800m를 오르면 샘골 등산로 입구에 닿는다. 여기서 칠락산을 종주해 마리재로 하산한 후 상라산 정상에 올랐다가, 열두굽이 도로 따라 진리를 거쳐 여객선터미널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길은 전반적으로 뚜렷하며 이정표와 계단이 있어 어렵거나 위험한 곳은 없다. 다만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302m봉과 277m봉은 정상으로 혼돈될 수도 있으나 별도의 정상 표지석이 없다. 정상에는 ‘칠락산은 어머니의 산’이란 글귀가 적힌 표지석이 있다. 특히 문암산 갈림길에서 산길 진행 방향이 90° 꺾이게 되므로,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리재에서 도로 따라 400m 가면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는 상라산 입구에 닿는다.   

진리의 배낭기미해변은 작지만 흑산도의 유일한 모래해변이다. 해변 앞 작은 소나무숲은 유일한 야영 가능 장소이다. 일주도로가 있으며 버스가 운행한다. 

BAC 인증지점 
칠락산 정상 표지석 N34 40.567, E125 26.065

교통(지역번호 061)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1666-0910)에서 흑산도행 배가 하루 3회(07:50, 13:00, 16:00) 운항한다. 2시간 30분 소요되며 남해고속과 동양훼리에서 번갈아 운항한다. 아침 7시 50분 배편과 13시 배편은 흑산도를 거쳐 홍도로 간다. 흑산도에서 목포행 배는 하루 3~4회(09:00, 11:00, 15:30, 16:20) 운항한다. 운항 일정은 변경될 수 있으므로 미리 전화해 보는 것이 좋다.  
문의 동양훼리(243-2111), 남해고속(244-9915).   

맛집 BAC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등산 지도 특별부록 지도 참조

본 기사는 월간산 10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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