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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Pitch by Pitch] 굶주림과 체력 고갈…나는 두려움에 정복당했다

글 ·사진 서울대산악부 김서은
  • 입력 2021.11.2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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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ch by Pitch <10> 서울대·이화여대 산악부 인수봉 등반기
인수봉 등반 중 탈진한 산악부원의 일기

대슬랩을 오르는 필자 뒤로 서울시내 전경이 펼쳐지고 있다.
대슬랩을 오르는 필자 뒤로 서울시내 전경이 펼쳐지고 있다.

‘Pitch by Pitch’는 한 피치 한 피치 앳된 오름짓을 이어가는 대학산악부원들의 진솔하고 톡톡 튀는 목소리를 담은 연재다. 이번 호에서는 인수봉 등반 중 탈진해 구조받아야 했던 김서은씨의 이야기를 다룬다. 등반에 동행한 이는 서울대 산악부 주진석(17), 정해은(21), 김서은(21), 이다연(21), 이화여대 산악부 김미진(20). - 편집자 주

산악부에 들어온 지 반 년. 한 학기 동안 열심히 활동했지만, 멀티피치(등반 루트가 길어 2개 이상의 ‘피치’로 나눠 각 피치당 마련된 확보지점을 거쳐 등반하는 방식)와 인수봉은 모두 처음이었다.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어프로치를 시작했다. 관악산에 위치한 자운암장의 짧은 어프로치와 다르게, 인수봉 어프로치는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암벽등반 내공은 바위 타는 실력에서도 알아볼 수 있지만 ‘어프로치’를 얼마나 수월하게 할 수 있는지에서도 드러나는 듯하다. 일단 길을 알고 있으면 심리적 부담도 덜하고, 암벽을 다닐수록 체력도 늘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어프로치를 해내고 싶다.

그 전날 비가 온 탓에 물바위라 등반이 어려울 것이라 예상하고, 비교적 쉬운 난이도인 인수B 혹은 고독길 중에서 등반하기로 했다. 도착해 보니 고독길에는 이미 열 명가량의 사람들이 붙어 있는 게 보여, 대슬랩을 통해 인수B를 가기로 했다. 진석 오빠가 선등, 해은이가 세컨을 보고 나-미진언니-다연이 순으로 뒤에 붙었다. 미진 언니는 등반 능력이 충분하지만, 대학산악부 후배들을 위해 중간에 서줬다.

인수B 시작점으로 트래버스 하는 동기 이다연.
인수B 시작점으로 트래버스 하는 동기 이다연.

시작은 수월, 그러나 ‘금식’이 발목

대슬랩은 3피치로 끊어서 갔다. 슬랩에 대한 내 이전 생각은 ‘두려움’이라 정의할 수 있다. 슬랩은 잡을 것이 없고, 오로지 발과 몸의 균형을 중시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수봉에 가면 슬랩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언제까지나 슬랩을 무서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름의 공부를 해갔다. 그리고 오늘의 슬랩을 ’두려움‘이 아닌 몸의 균형과 발 위치를 연습해 보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더불어 침착하고 차분한 등반을 오늘의 목표로 세웠다. 단단히 각오해서 그런지 콩알만 한 홀드도 잘 이용하고, 발을 딛고, 몸을 이동하고, 다리를 펴서 올라가는 슬랩 등반의 모든 것이 재밌었다. 쑤욱쑤욱 몸이 올라가지는 게, 마치 시루에 담겨 쑥쑥 자라는 콩나물이 된 기분이었다. 이보다 더 경사가 더 심하고, 비스듬히 보아도 튀어나온 곳이 없는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달걀형 슬랩이라면 어떻게 등반할지는, 다음의 과제로 남겼다.

자일(로프)을 이고 트래버스(수평 이동)를 진행한다. 자일에 확보줄을 걸고 왼쪽으로 간다. 트래버스 하는 부분에 홈이 파여 있어 생각보다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인수B 1피치 시작점에서 좋은 테라스가 나왔고, 거기에서 잠시 쉬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때 무언가를 먹었어야 했는데…. 매번 단피치만 하니 멀티에서는 ‘한번 바위에 붙으면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인수B 3피치에서 실패요소로 작용했다.

다가올 고난을 미처 모르고 1피치 항아리크랙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필자.
다가올 고난을 미처 모르고 1피치 항아리크랙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필자.

대슬랩은 햇빛 덕분에 말라 있었지만 인수B 1피치는 햇빛이 들지 않아 물바위 그대로였다. 물바위는 처음 겪어보는데, 단순히 바위에 물을 끼얹은 느낌이 아니라 바위와 물과 이끼가 어우러져 세 곱절이나 더 미끄럽게 느껴졌다.

슬랩, 크랙(바위 사이의 갈라진 틈)으로 구성된 인수B 1피치에서는 다양한 자세를 취해 볼 수 있었다. 크랙도 재밍(갈라진 틈 사이에 신체 일부를 못처럼 박아넣어 오르는 방식)을 하려다가 간격이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레이백(크랙의 모서리를 잡고 반대편 발을 밀어 지지력을 얻는 방식) 자세를 취했다. 사실 노력했다는 게 맞는 것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슬쩍 볼트도 밟았다. 수능이었다면 부정행위로 탈락하는 게 맞지만 수능이 아니었으므로 너그럽게 봐주었다. 알고 보니 ‘항아리 크랙’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크랙이었던 구간이 끝날 무렵, 근처에 있는 나무에 너무 완벽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인 홀드가 있었다. 정말 홀드가 너무 완벽하게 좋아서 짜릿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인수B 1피치는 정말 재미있었다. 대슬랩에서 슬랩에 대한 자신감도 붙은 상태였고, 힘들다는 생각도 안 들었으며, 긴장도 안 풀렸고, 발을 토독토독 움직여서 슬랩에서 크랙으로 이동하는 구간도 재밌었고, 크랙에서 이것저것 자세를 취해 보면서 올라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흥미롭다’, ‘재미있다’를 넘어선 그 묘한 희열이 있었고, 생생하고 신선하고 두근거리는 묘한 희열에서 멀티 피치의 재미를 처음으로 느껴보았다.

무한 재밍으로 등반하는 정해은.
무한 재밍으로 등반하는 정해은.

인수B 2피치에서 탈진

그러나 위기는 금방 다가왔다. 사실 진짜 위기는 인수B 3피치에서 벌어졌지만, 그 시작점은 분명 2피치였다. 우선 1피치에서 확보를 걸고 기다리는 구간이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등반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 문득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내가 올라갈 차례가 되었다. 재밍의 연속이었다. 손과 발이 아프더라도 밀어넣고, 그 틈 안에서 부피를 넓혀 지지력을 얻어야 함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등반의 방법을 터득하는 데에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간과 체력 모두를 많이 소모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인수B 3피치. 다시 크랙 직상, 즉 재밍의 시작이었다. 크랙 위 끝부분에서 기다림에 지친 진석 오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만, 그 이후 머릿속이 아주 잠깐 새하얘졌다. 무한 재밍, 장시간의 굶주림, 앞서 올라가는 사람을 기다리며 지친 시간들, 제대로 쉬지 못하는 멀티피치의 특성들이 모두 합쳐져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힘드니 마음속에 무서움이 솟아났다. 고도가 실감이 나고, 발이 떨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진석 오빠가 위에서 구조의 필요성을 알아차리곤 내 옆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슬링으로 연결한 채, 같이 확보 지점으로 트래버스했다. 확보 이후엔 탈진을 염려한 진석 오빠에게 촉촉한 초코칩 쿠키와 젤리빈을 ‘먹임’ 당했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구조로 인해 시간이 늦어져 해가 진 뒤 하강을 마무리하고 있다.
구조로 인해 시간이 늦어져 해가 진 뒤 하강을 마무리하고 있다.

나의 구조 탓에 시간이 늦어, 정상까지 1피치를 남겨두고 모두 하강을 택했다. 정상을 바라보고 온 모임인데,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인수B 3피치에서 조금 올라가 하강 포인트에 도달했고, 두줄 하강을 하여 미진 언니와 다연이가 계속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해은, 다연이가 외줄 하강으로 동시에 하강하고, 나는 두줄 하강으로 내려왔다. 마지막 크로니길 시작점에서 하강할 때는 경사가 가팔랐는데, 딱히 크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하강을 하고, 자일을 사리는 중 가벼운 농담이 오고 갔는데 모두에게 미안해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모두에게 고마웠다. 늘 고마운 진석 오빠, 침착한 해은이와 다연이, 후배를 열심히 격려해 준 미진 언니, 등반 중 이것저것 조언해 주신 문리대 산악부OB 권오웅 선배님! 그리고 운전해 준 무형 오빠까지 말이다. 서울대학교 총산악부 카페에 올리는 등반일지를 열심히 읽고 댓글 달아 주시는 모든 선배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하다.

도봉산 할머니집 식당에 있는 산행일지에는 ‘바위 타는 건 역시 어렵다. 선배님들은 참 잘 타신다.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왜 못 올라가나’라는 수십년 전 서울대 문리대 OB분이 남긴 기록이 있다. 나 역시 등반이 좋다. 포기할 생각은 없다. 포기하기에는 손에 닿는 암벽의 촉감, 내리쬐는 햇살, 춤추는 듯한 발의 움직임이 여전히 생생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언젠가는 이 글을 보고 ‘그땐 그랬지’ 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게도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지나고 보니 풋풋하고, 노력이 장하고도 예뻤던 !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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