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을 보면 농부의 ‘연봉’을 알 수 있다

  • 글·사진 이남석 자전거 여행가
    입력 2021.11.23 10:05 | 수정 2021.11.23 10:06

    화촌일기 <18> 가을 추수
    기후 변화로 절기와 기온 뒤죽박죽… 그래도 어김없는 가을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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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확기를 앞두고 무르익어 가는 홍천군 화촌면의 벼. 40~50년 전만 하더라도 화폐 대신 사용될 정도로 귀중한 식량이었다.
    이렇게 긴 가을장마는 처음이다. 숲의 버섯들은 포자를 만들어 퍼트릴 새도 없이 썩었으며, 떨어진 열매는 흙에 묻히기도 전에 싹을 냈다. 그렇다고 계곡 수량이 풍부해진 것은 아니다.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간 짐승들은 절기를 어긴 환경과 기온에 갈팡질팡하고, 부엉이와 올빼미들이 야밤에 노래하는 위치도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짝을 찾기 위해 암수가 주고받는 곡조도 어색하다.
    마을의 어떤 농부는 바짝 마르라고 뽑아놓은 고춧대가 다시 잎을 내면서 꼿꼿이 서는 것은 이번 가을에 처음 봤다며 길어지는 가을장마를 표현했다. 이번 가을은 느리고 눅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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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아무리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 비록 구름이 빛을 막는 날이 많아져도 논밭의 곡식은 시간에 맞추어 여문다. 잎은 색을 버리면서 마르기 시작하고, 뿌리와 줄기는 단단하고 억세어지기 시작한다. 논밭을 둘러본 농부들은 수확에 대한 기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속으로만 기뻐한다. 아직 수확하는 수고로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은 어깨가 뻐근하고 근육이 단단해질 정도로 기분 좋은 것이다. 수확의 힘듦은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보살피는 것 이상이다. 도시의 근로자들은 일하면서 매달 급여를 받지만, 농부들은 봄과 여름 내내 노력과 비용을 지출하기만 하다가 가을 단 며칠에 수확이라는 급여를 받는다. 농부들에게 수확이 신성하고 고귀한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가꾸지 않으면 가을에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은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라는 말과 잘 상응한다.
    추석이 지나 낟알이 무거워지면 농부들은 들로 나가서 논 한가운데 벼 포기 사이를 헤집고 물길을 잡았다. 벼를 베기 전 논에 고인 물을 빼내기 위해서다. 보송보송하게 논바닥을 말려야 벼를 베는 데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락이 있는 위는 마르고 밑동만 습기를 품고 있어서 낫으로 돌리면 썩둑 썩둑 쉽게 잘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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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빛 들판을 이룬 수확 직전의 벼.
    노련한 농사꾼의 벼 베기 요령
    품앗이로 벼를 베러 나가는 날이면 노련한 일꾼은 벼 포기의 밑이 젖은 곳으로 가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바짝 마른 곳으로 가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벼 포기가 마른 곳은 맨발로 논바닥을 밟는 데는 편하다. 그러나 벼가 잘 잘리지 않아 힘이 더 들 뿐만 아니라 낫도 금방 무뎌져 자주 숫돌에 갈아야 한다.
    마른 가을 햇빛 아래에서 쉬지 않고 벼를 베다 보면 손아귀와 어깨의 힘이 점점 떨어진다. 낫을 쥔 손에 침을 뱉는 횟수만 늘어나고 쓸데없이 하늘에 붙어 있는 해만 쳐다보며 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나이 든 일꾼이 걸걸한 목소리로 창부타령이나 아니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가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세 자루 낫을 바꾸어도 마지막 한 배미 벼는 아직도 그대로네. 에야. 상강 지나 해는 짧은데 이놈의 하루해는 더디도 가누나. 어이야. 도랑에 피래미는 냇가로 나가고 갈개에 가재는 뒷걸음질 치누나. 해지기 전에 서둘러 베자꾸나! 에이야.”
    누님과 어머니가 참을 내오면 일꾼들은 낫을 내려놓고 논둑에 둘러앉아 참으로 배를 채웠다. 거기다가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치면 따끈한 가을빛에 몸은 나른해지고 솔직히 다시 논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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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뒷산의 느타리버섯.
    메뚜기들은 이리저리 뛰고 하늘에는 고추잠자리들이 날아다니며 높은 구름은 학이 되기도 하고 쟁기를 짊어진 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잔잔한 가을 풍경은 꾀가 난 일꾼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농약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당시에는 논에 우렁이가 많이 살았다. 우렁이는 논을 기름지게 하는 데 순기능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황새와 같은 겨울 철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그러니 가을이면 벼를 베고 난 논으로 황새들이 내려앉아 우렁이를 잡아먹는 광경이 흔했다.
    우렁이는 논물이 빠지면 흙 속으로 몸을 숨긴다. 병뚜껑 모양으로 살짝 들어간 곳에 손가락을 찔러 넣으면 틀림없이 우렁이가 나왔다. 학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벼를 베고 난 논으로 들어가 우렁이를 잡아 빈 도시락에 채워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러면 어머니는 된장국이나 찌개에 우렁이를 넣어 요리해 주셨는데 논바닥 흙냄새와 된장이 버무려진 찌개는 특별한 맛이었다. 하지만 화학비료와 농약이 들어오며 우렁이는 논에서 나왔다.
    “이제 번식기가 지났으니 분봉도 끝났고, 마지막으로 채밀을 하고 겨울을 나게 준비해야죠. 올해는 피나무며 헛개나무꽃이 좋아 수입이 괜찮았어요. 하지만 아카시아 꿀을 좀 얻으려고 밭 옆 야산으로 들어갔다가 농약 때문에 벌 여러 통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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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버섯.
    임도 입구에 가지런히 배열된 벌통에서 꿀을 뜨던 농부는 잠깐 작업을 멈추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농약으로 벌을 잃은 게 많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임도 경사면에는 토사가 흘러내리는 걸 막기 위해 싸리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봄에 개화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양봉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나라 땅이니 먼저 오는 사람이 임자겠지만 농부의 말에 의하면 옛날과 다르게 양봉하는 사람들 사이에 정보가 빨라 밀원이 있는 곳으로 벌통을 싣고 갔다가 먼저 온 이가 있어 허탕치고 되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독점하던 정보가 이제는 누구나 결심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외국인들 없으면 농사 못 지어. 누가 이런 뙤약볕에서 일당 받고 호박을 따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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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이버섯.
    화촌면의 군업과 장평은 호박 재배로 유명해 넓은 밭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호박 농사를 짓는다. 터널식으로 비닐하우스용 파이프를 설치하고 그 위에 호박 줄기를 올린다. 한 번 심어놓으면 농약이나 거름 주는 것은 터널을 드나들며 기계로 가능하지만 호박을 따는 것은 사람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따야 한다. 완만한 구릉과 평지에 작게는 수백 평에서 넓게는 몇 천 평의 호박밭을 누비며 호박을 따는 인력은 거의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동네로 들어가는 길은 과거 아이들과 지게를 진 농부, 경운기나 우마차가 오갔지만 지금은 트랙터나 외국인 노동자들, 아니면 나이 든 사람들이 다니는 곳으로 바뀌었다. 지붕이나 마당에 자리를 깔고 건조하기 위해 널어 놨던 고추나 호박고지들도 보기 어렵다. 건조기 안에서 하루만 지나면 완벽하게 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넝쿨 콩을 올리던 흙담도 보기 힘들어졌으며, 낮은 지붕에 툇마루와 대청마루를 품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아 거의 무너져가고 있다. 관리하기 힘들고 주방 같은 편의시설을 설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농촌 주택은 편의시설을 잘 갖춘 조립식 주택으로 대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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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모스가 핀 가을 들판.
    당연한 변화가 일고 있는 농촌
    사실 나이 든 사람들이 시골에 내려와 이런 변화에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산골이나 시골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도시에 거주하다가 귀촌을 위해서 또는 옛날 향수를 떠올리기 위해 내려온 사람들은 과거 추억 찾기에 바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세대가 변하는 원리에 의해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변화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젊은 세대에게는 지금의 농촌이 또한 새로운 추억이고 향수로 남을 것이다.
    뒷밭에 고추는 다섯 번을 딴 후 서리가 내릴 것을 대비해서 모두 뽑아 놨다. 건조기가 없는 덕에 씻은 후 칼로 고추 하나하나를 반으로 잘라서 말리려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옛날 고추와는 다르게 지금 고추는 고춧가루를 많이 생산하는 품종으로 개량해 껍질이 두꺼워 통으로 말리기가 힘들다.
    늙은 호박을 따다가 마루 위에 올려놓고 오랜만에 뒷산에 올랐다. 혹 떨어진 밤도 줍고 작년에 싸리버섯을 땄던 곳에서 뜻밖의 선물을 수확하기 위해서였다. 둘 다 성공했지만 밤은 비가 많이 내린 덕에 대부분 벌레가 들어갔으며, 싸리버섯도 작년처럼 바구니를 가득 채울 정도로 소담스럽지 않았다. 눅눅한 숲에서 나는 냄새가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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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 좋은 식용 버섯인 갓버섯을 따고 즐거워하는 집사람. (필자 소유 산지)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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