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등반 만드레아] 로프도, 확보물도 없이 ‘블랙홀’에 빠지다

  • 글·사진 임덕용 꿈속의 알프스등산학교
    입력 2021.11.18 10:13

    [해외 등반ㅣ이탈리아 아르코 만드레아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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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홀로 진입하는 베네데타.
    블랙홀Black hole은 극도로 높은 중력으로 인해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 형성된 검은색 구형 천체를 말한다. 탈출 속도가 광속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빛을 포함한 그 어떤 물체도 내부로부터 탈출할 수 없어 ‘블랙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블랙홀은 항성이 진화의 최종단계에서 폭발 후 수축되어 생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강력한 밀도와 중력으로 입자나 전자기 복사, 빛을 포함한 그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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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니가 루트 크럭스인 디에드로의 좁은 크랙을 오르고 있다.
    만드레아 벽에 생긴 블랙홀
    어린이 동화 <별가족 블랙홀에 빠지다>라는 책은 별 가족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진짜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날아가 벌어지는 일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별 가족은 연속되는 실수 속에서 블랙홀에 빠졌다가 태양계의 비밀을 알아내곤 무사히 지구로 귀환한다.
    박범신 작가가 쓴 <촐라체>는 2005년 1월 산악인 박정헌·최강식이 히말라야 촐라체(6,440m) 북벽을 등정한 후 하산하다가 사고 당해 7일 만에 극적으로 생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최강식은 크레바스로 약 25m 추락하면서 양 발목이 골절되었고, 안자일렌을 하고 있던 박정헌은 갈비뼈가 부러졌다.
    최강식은 등강기로 크레바스를 탈출했고, 둘은 서로 의지하며 구르고 기어서 하산하다가 야크 몰이꾼을 만나 구조되었다. 그러나 박정헌은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최강식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잃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4년 SBS에서 ‘하얀 블랙홀’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소개되었다. 블랙홀이든 화이트 블랙홀이든 빠지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는 의미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트렌토Trento에서 아르코Arco로 가는 길목에 ‘만드레아Mandrea’라는 거벽이 있고, 이 벽에는 ‘블랙홀’이라는 루트가 있다. 이 루트를 스노보드 강사며 알파인 가이드를 준비 중인 22세의 당찬 여성 베네데타와 같이 오르기로 했다. 막내 딸 같은 나이인 그녀는 나의 산행 가이드 동반자이며 등반도 잘해 주로 난이도 높은 등반을 함께한다. 그녀는 나에게 선등 기회를 잘 안 주지만 어려운 루트를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복권 당첨이라 생각하고 즐겁게 등반에 나선다.
    아르코의 상징인 옛 성을 끼고 올리브 과수원을 지나 굽이굽이 좁은 길을 올라간다. 이내 만나는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15분 정도 걸어 만드레아 벽과 마주한다. 만드레아는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기다란 벽의 윗 부분에 있는 2층 벽이라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등반 루트들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고, 고난이도의 루트만 있어 클라이머들이 많이 찾는 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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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니가 손을 들어 확보를 알렸다.
    장비 사용할 수 없어 공포감 극대
    ‘블랙홀’ 루트는 입구부터 만만치 않았다. 3m 높이의 작은 오버행을 오른 후 경사가 매우 급하고 흙과 돌이 많은 잡목 지대를 헤쳐 나가야 하는데, 이제까지의 등반보다 훨씬 어려웠다. 나무 사이를 헤집고 지그재그로 올라야 했기에 로프 확보를 하지 않고 각자 오르기로 했다.
    블랙홀 1피치는 약 50m 길이에 70도 경사의 아주 위험한 잡목 지대였다. 잡목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25m 슬랩이 이어지지만 바위 표면이 거칠어서 발을 딛고 등반하기에는 좋았다. 두 번째 피치는 35m 길이로, 3개의 하켄과 슬링이 고정되어 있는 쉬운 5+ 난이도의 루트다. 3피치는 12m 길이로, 왼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5+급 난이도지만 아찔한 고도감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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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럭스인 디에드로를 오르는 필자 옆에 엄청난 경사의 오버행이 보인다.
    4피치부터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데, 6+급으로 크랙과 레이백이 섞인 재미있는 루트다. 5피치는 크럭스 구간인데, 오버행을 포함해서 15m 길이의 인공등반 구간이다. 자유 등반으로 하면 7+급 난이도다. 이 구간에는 7개의 하켄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 등반하기 좋았다. 모처럼 인수봉 궁형 크랙을 오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궁형 크랙이 둥글둥글하다면 블랙홀의 크럭스는 매우 날카로워 커다란 톱날을 오르는 것 같았다. 6피치는 8m 길이로 매우 짧지만 더 이상 올라가면 로프가 전혀 유동이 안 되는 구간이다. 여기서부터 블랙홀에 빠지게 된다.
    45m 길이의 7피치는 두 개의 작은 오버행을 지나 나무를 잡고 올라서야 하는데, 경사는 80도에 이르지만 확보물을 전혀 설치할 수 없어서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땅에 노출된 가는 나무뿌리에는 슬링을 걸 수 없어 발이 미끄러지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올라갔다. 8피치 역시 부서지기 쉬운 돌과 흙, 나무를 잡고 40m 길이 구간을 기어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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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 당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낡은 우드팩이 정겹다.
    자꾸만 생각나는 ‘매운 맛’ 루트
    <별가족 블랙홀에 빠지다>의 별 가족은 태양계의 비밀을 알아낸 후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는데, 만드레아 벽의 ‘블랙홀’에서는 마지막 7~8피치를 오르면서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벽에서는 아무리 난이도가 높아도 장비의 도움을 받아 올라갈 수 있는데, 그런 것 없이 오로지 자연의 흙과 돌,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가야 했던 ‘블랙홀’에는 다시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블랙홀’ 루트를 먼저 올랐던 클라이머들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루트지만 자꾸 생각나는 루트’라고 평한다.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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